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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 선정도서이자 작년 국방부 불온도서로 선정됐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의 현기영이 10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 <누란>은 직선적이다. 숨기지 않는다. 우회하지도 않는다. 소설 곳곳에서 비판의 날이 눈에 띈다. 무엇에 대한 비판인가. 민주화가 진전됐지만 자본에 지배당하는 오늘날을 향한 비판이다.

 

학생운동을 하는 허무성은 수배생활 중에 누군가에게 검거된다. 그를 잡아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남산 지하고문실로 데려간 것을 보면, 고문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누군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서 허무성이 당해야 했던 고문의 강도는 지독했다. <누란>은 초반부에 그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조금만 읽어도 눈살을 찌푸리게 될 정도다.

 

고문을 하던 사람의 이름은 김일강. 그는 민주주의와 정극단에 선 인물처럼 행동한다. 그의 지독한 고문 때문이었을까. 허무성은 굴복하고 만다.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말하고 만 것이다. 그 후에 허무성에게 찾아온 것은 무엇인가.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배신자라며 그를 손가락질한다. 그런 그에게 김일강이 달콤한 말을 건넨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교수가 되라는 것이었다. 영원히 굴복하라는 것이었는데, 허무성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또한 갈 수 있는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일본에 갔다가 온 허무성은 확연히 변한 한국사회를 바라본다. 붉은 악마가 광장을 지배하는, 돈을 중시하는 상아탑의 모습을, 자유를 만끽하는 개인들의 모습을 보며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세상은 옳게 변한 것일까? <누란>은 한국사회에 돌아온 허무성이 듣고 보고 겪은 일들을 보여주며 비판한다. 자본에 휘둘리는,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종속된, 또한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방종하는 사람들을 그리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누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소설이다. 그 비판의 날은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의 말에 나왔듯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누란>을 보고 있노라면 이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 농도가 짙다. 그것을 벗어나고자 <누란>이 말하는 비판의 것들을 반박하고 싶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문을 하던 김일강은 어떻게 됐는가. 정치인으로 성공한다. 과거의 일을 쉬쉬하며 대중이 원하는 것을 준 끝에 그는 성공한다. 순결한 운동을 주장하던 젊은 세대들은 어찌 됐는가. 권력을 얻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김일강과 같은 사람들에게 아부한다. 그 젊은 날의 정신을 버리고 철새가 되어 다른 곳으로 떠난 것이다.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가. 그들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자유롭지 않다.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학원을 갈까, 과외를 받을까 하는 정도의 선택에 관한 자유가 있을 뿐이다. 직장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교한 시스템 안에 갇혀 있다. <누란>은 허무강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는데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다. 치가 떨리지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기영은 왜 <누란>을 쓴 것일까. 이러한 것들을 보여주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힌트는 작가의 말에서 나온다. 현기영은 "희망을 말하면서 낙관론을 펼치려면 나 같은 비관주의자의 목소리도 조금은 경청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비관론은 적어도 우리의 타격대상이 얼마나 완강한 철벽인지를 일깨워준다"고 덧붙이고 있다. 타당한 말이다. <누란>의 모습들 하나하나가 그렇듯, 이 소설을 대하는 현기영의 생각 또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더 희망적인 것을 찾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적나라함에 읽기가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외면할 수가 없다. 오히려 더 매달리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더 희망적인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란

현기영 지음, 창비(2009)


태그:#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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