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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관음사의 4·3 유적지

캄보디아를 떠올리게 만드는
▲ 관음사 입구 캄보디아를 떠올리게 만드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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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서 내려와 잠깐 숨을 돌린 뒤 향한 관음사. 4·3사건의 유적이 남아 있다기에 들른 그곳은 그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일주문에서부터 천왕문까지 양쪽으로 불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5년 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지 입구에서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다. 죄를 지었거나 뭔가 찔리는 사람들이 들어서면 괜히 주눅들 수밖에 없는 그 위엄서린 분위기.

불상들을 지나고 나니 4·3유적지에 대한 안내판이 나왔다. 그 옆의 돌무더기가 4·3사건의 유적이라는 것이다. 옆에 가서 보니 돌들을 쌓아올려서 만든 참호 비슷한 구조물이었는데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거의 준 전쟁이었던 그 당시 참호 하나 쌓아 올리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일 수 있었겠는가. 주어진 시간에 그냥 대충 만들어 그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수밖에.

불친절한 설명
▲ 4·3사건에 대한 설명 불친절한 설명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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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관리
▲ 4·3사건 당시 만들어진 참호 허술한 관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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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계속해서 돌무더기를 보고 있자니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조잡한 역사 유적이라고 할지라도 관광거리로서 돈이 된다 싶으면 투자를 하는 것이 요즘 지자체이거늘 왜 제주시는 이런 유적지를 가만히 두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삼별초의 대몽항쟁 유적보다는 4·3사건의 유적이 제주도 각지에 더 많이 퍼져있을 것이고, 그 보존 상태도 더 양호할 것이며, 현재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도 더 많을 텐데, 왜?

결국 이와 같은 유적들의 허술한 관리 상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4·3사건이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지분을 대변한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4·3사건이 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항쟁으로서 복권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 4·3은 언제 빨갱이들의 4·3사태로 평가절하 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사건이다. 게다가 지금은 그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가치가 뒤집히고 있는 전복의 시대 아니던가.

4·3사건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 틈 사이로 밖을 바라보았을까
▲ 돌무더기 사이로 4·3사건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 틈 사이로 밖을 바라보았을까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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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항쟁 복권의 불안함은 5·18 광주민주화항쟁과 비교해 볼 때 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한 때 불온한 빨갱이들이 일으킨 광주사태로 규정되었지만 군부독재의 종식과 함께 역사적으로 복원된 5·18 광주민주화항쟁. 결국 5·18이 더 이상 항쟁에서 사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그 당시 광주시민들을 학살했던 군사정권을 독재로 규정할 수 있게 된 민주주의의 힘이요, 대통령을 배출해낸 전라도의 힘이요,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인정했던 국민 대다수의 동의 때문이다.

반면 4·3은 피아가 분명했던 5·18과 달리 그 희생자와 가해자가 불분명하다. 물론 국가가 양민들을 학살한 건 분명하지만 친일과 반일, 친공과 반공이 뒤섞여 있던 해방정국에서 그 피해자들은 지금까지도 언제든지 아무 죄 없는 선량한 국민으로, 혹은 극악무도한 빨갱이로 덧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현재 4·3의 어정쩡함이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국가와 국민을 건설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타자를 적극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분단국가의 한계가 현재 4·3유적 관리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4·3 유적지의 허술한 방치는 한국 사회에서 제주도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힘과도 관련이 있다. 전라도의 김대중처럼 제주도 출신의 대통령이 있었다면 4·3 유적이 저렇게 방치되었을까? 따라서 4·3의 한은 곧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 제주의 한과도 밀접하다. 아마도 그 한풀이가 없이는 제주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뭍에 대한 잠재적 피해의식이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평화롭고 호젓했던 그곳
▲ 관음사 마당 평화롭고 호젓했던 그곳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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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를 둘러본 뒤 관음사 마당으로 향했다. 가장 눈에 먼저 띄는 것은 흔하게 생긴 대웅전보다 범종루에 걸린 이명박 정부 규탄 플랜카드였다. 서울이건 제주도건 불교에서는 모두 현 정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구나.

관음사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수많은 불상이었다. 4·3 당시 소각된 사찰이 1960년대 중창되었다고 하니 최근에 지어진 불상일 터인데, 똑같은 불상을 왜 저리도 많이 만들었는지. 예전과 같이 하나의 불상에 자신의 모든 바를 집중할 수 있는 장인이 없어서일까? 그것도 아님 신도들에게 공양을 하면 저와 같은 불상을 하나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일까? 어쩌면 4·3사건 당시 죽어간 영혼들을 위해 세웠을 수도.

어쨌든 새까만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불상들은 관음사의 분위기를 제법 오묘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많은 불상들
▲ 관음사 풍경 많은 불상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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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의 한맺힌 상일지도
▲ 관음사 불상 4·3사건의 한맺힌 상일지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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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돌 목장

관음사를 나와 우리가 향한 곳은 이시돌 목장이었다. 제주도의 상징인 말 목장을 보고 싶다며 두리번거리는 내게 나름 천주교 신자인 아내가 추천한 곳이었다. 제주도의 이시돌 목장 하면 굉장히 크고 체계적인 곳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제주도에 오면 피정센터로도 애용한다나.

제주도에 대한 판타지
▲ 말 농장 제주도에 대한 판타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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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이 내륙에 있었던 터라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도착한 이시돌 목장. 그곳은 과연 그 명성만큼이나 광활했다. 한쪽에서는 잘 생긴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적지 않은 젖소들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TV에서 볼 수 있던 흔한 풍경이었지만 직접 내 눈 앞에서 말들이 풀을 뜯는 모습을 보니 새삼 신기할 따름이었다. 서울 촌놈 같으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가 들어간 곳은 이시돌 목장의 전시관이었다. 방문객들을 위해 목장에 관한 역사 등을 전시해 놓은 곳이었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의외의 발견을 했다. 이시돌이 한국인 이시돌이 아니라 스페인 성인 Isidore(이시도르)의 한국식 발음이라는 사실이었다. 살아생전 신앙심 깊은 노동자로, 죽어서는 농부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된 이시도르의 이름을 딴 목장이라.

전시관은 목장 이름의 유래와 함께 그 설립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목장을 처음 세운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 신부에 대한 설명이었다. 1954년 4월 천주교 한림 교회의 주임신부로 왔다가 제주도민의 궁핍한 생활을 보고 1961년 자국의 축산업 기술을 들여와 목장을 세워 제주도민의 자립을 도왔다는 신부. 척박했던 그 당시의 사진을 보니 그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선교의 일환으로서 목장을 만든 신부. 그의 이와 같은 행위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존중되어야 한다. 어쨌든 그는 많은 제주도민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중요한 생계수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종교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먹고사는 문제 아니겠는가. 결국 이시돌 목장은 제국주의적 감수성을 갖고 선교 운운하며 이데올로기 전파에 급급한 요즘 우리네 종교인들이 다시금 생각해 볼 롤 모델이어야 할 것이다.

실제 사람 크기로 더욱 실감나는
▲ 이시돌 목장의 조각상 실제 사람 크기로 더욱 실감나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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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의 기도 시작점
▲ 이시돌 목장 묵주의 기도 시작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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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나와 아내와 함께 이시돌 목장 한 가운데 위치한 공원을 돌아다녔다. 그곳에는 예수의 일생을 나타낸 조각들과 천주교의 묵주기도를 형상화시킨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규모와 종교적 엄숙함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는 아내. 그러나 갑작스러운 등산으로 걷기조차 힘든 난 그 광활함이 야속할 뿐이었다.

목장에서 나와 아내가 블로그에서 봤다는 맛있는 횟집을 찾아 차를 몰았다. 그래도 제주도에 왔는데 싱싱한 회를 먹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 그러나 1시간을 해매 도착한 횟집은 성수기에 사람이 많아선지 생각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고, 그 맛 역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워낙 소문이 나서 그런가? 어쩌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그 서비스가 떨어지는 것이 정상일지도.

저녁을 다 먹고 실컷 부른 배를 두들기며 우리가 향한 곳은 마라도행 배를 탈 수 있는 모슬포였다. 기상예보로는 내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제발 우리가 마라도를 다녀올 때까지만 해가 쨍하길.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제주도, #4·3사건, #이시돌목장,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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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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