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머니와 아내가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경호견인 진순이는 의연하게 사주경계를 펴는 동안 하룻 강아지인 햇살이는 목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펴다가 이내 목줄을 벗어버렸습니다.
 어머니와 아내가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경호견인 진순이는 의연하게 사주경계를 펴는 동안 하룻 강아지인 햇살이는 목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펴다가 이내 목줄을 벗어버렸습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지난 3월 우리 집에 분양된 '햇살이', 첫 생리로 이불과 방바닥 등 집안 곳곳을 피 칠갑 한 '생리견', 똥과 오줌, 털과 악취로 나의 평화를 침범한 '동거견', 나의 훈육 방식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이빨 드러내며 저항하던 '지랄견', 끝내 떠나보내고 나니 시원섭섭한 '유배견'….(관련기사: 첫 생리 소동... "아니 개도 생리를 해?" )

"아! 햇살이가 보고 싶다!"

햇살이를 어머니가 계신 시골로 떠나보냈습니다. 아내는 이 순간도 햇살이를 그리워합니다. '든 자리는 표가 나지 않아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는 옛말처럼 5개월간 동거한 가족을 떠나보냈으니 왜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조석으로 아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품에 안겼다 하면 두 발로 팔을 감싸며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던 애완견을 떠나보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에겐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가을 햇볕은 평화롭게 내리쬐고 선선한 바람은 향긋하게 코끝을 간지르며 스쳐갑니다. 모든 평화가 그렇듯이 나의 평화 또한 대가를 치르며 얻었기에 이 가을에 누리는 이 평화는 다신 빼앗기고 싶지 않은 소중한 평화입니다.

시골로 유배 보낸 햇살이... "야야, 걱정마라 아주 살판났다!"

좁은 아파트에서 대자연으로 풀려난 햇살이, 이유야 어찌됐든 '자유'와 '행복'을 얻은 햇살이는 시골에서 천방지축이라고 합니다
 좁은 아파트에서 대자연으로 풀려난 햇살이, 이유야 어찌됐든 '자유'와 '행복'을 얻은 햇살이는 시골에서 천방지축이라고 합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어머니가 뒤란에 떨어진 감을 주어오자 진순이는 근접 경호를 하는 반면 햇살이는 촐랑대며 자유를 만끽합니다.
 어머니가 뒤란에 떨어진 감을 주어오자 진순이는 근접 경호를 하는 반면 햇살이는 촐랑대며 자유를 만끽합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햇살이도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햇살이의 행복을 위해서도 떠나보냅시다!"

"햇살이 때문에 엄마 피부에 트러블이 발생했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집으로 보내야 한단다! 서운하지만 어쩌겠니 이해하렴!"

전자의 따옴표는 제 발언입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수사이지요. 후자의 따옴표는 햇살이와 헤어지는 것을 서운해 하는 애들을 달래기 위해 아내가 사용한 발언입니다.

사실 햇살이를 위한 자유와 행복은 허울이고 본질은 집안의 평화를 깨고, 아파트 복도에다 똥오줌을 싸대면서 민원발생을 일으키는 주범을 처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옥살이나 다름 없는 아파트에서 대자연 품으로 돌려 보냈으니 '자유'와 '행복'을 선물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와 고놈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동거해야 쓰는가.'(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을 빗댐)

그 놈은 저를 경계하고, 저는 그 놈을 미워하는 이 '불안한 동거'를 끝낼 방법을 찾던 중에 묘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유기견이었던 '햇살이'의 1차 입양자가 저희에게 분양하면서 '만약에 키우기가 힘드시거든 유기하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주세요!'라고 부탁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진짜로 유기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방도를 강구했을 뿐입니다. 그 방도는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닌 잡종 진돗개 암컷인 '진순이'와 14년째 함께 살고 있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개를 키운답니다. 어머니께 여차저차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지난달 21일 어머니에게 햇살이를 분양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놈의 정이 뭔지 햇살이를 떼어놓고 오는데 마음 한 구석이 짠했습니다. 아내는 오죽했겠습니까. 햇살이가 따라올까봐 방에 두고 문을 닫은 뒤 어머니와 인사 나눌 틈도 없이 서둘러 출발했는데 아내는 자꾸 "자식 떼어놓고 오는 것 같다"며 울적해 했습니다. 그런 아내가 햇살이 안부를 묻기 위해 다음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배신감을 맛보고 말았습니다.

"너희들이 간 뒤에 한 서너 시간은 기가 죽어 있더라. 나에게 오고 싶어도 진순이가 무서워서 오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살 보는 게 하도 짠해서 이리 오라고 했더니 잽싸게 내 품에 안겨서 하룻밤을 잤단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언제 기 죽었냐는 듯이 아주 살판이 나서 천방지축 날뛰고 다닌다. 하나도 걱정하지 마라. 아주 살판이 났다. 살판이…."

변심한, 아니 처지에 곧 적응한 햇살이 소식을 들은 아내는 "엄마랑 헤어져서 슬퍼할  줄 알았는데 세상에 하루만에 그렇게 빨리 적응하다니…"라면서 "그래도 징징 짜지 않고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라며 서운함을 달랬습니다. 햇살이는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도 30분가량 상황을 살피더니 이내 자기 안방에 온 듯이 활개친 바가 있습니다. 다음에 시골에 내려가면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데, 누구시더라?' 이러면서 안면을 깔지도 모르겠네요.

사람보다 열 배 나은 진순이 "시의원에 출마했으면 당선됐을 것"

이른 새벽, 마을 정자에 마실간 어머니와 진순이.
 이른 새벽, 마을 정자에 마실간 어머니와 진순이.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늙으면서 샘이 많아진 진순이는 햇살이가 등장하면서 심통이 났습니다.
 늙으면서 샘이 많아진 진순이는 햇살이가 등장하면서 심통이 났습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평생 내 궁둥이만 바라보고 살아온 우리 진순이는 말을 못하는 짐승이라 그렇지 사람보다는 열 배는 낫다!"

진순이는 자식보다 나은 게 사실입니다. 핏덩이로 어머님 품에 안긴 진순이는 열네 해 동안 어머니 곁을 지켰습니다. "새끼는 떼어놓고 가도 진순이는 떼어놓지 못 한다"는 가시 돋친 말엔 뼈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그야말로 반려견입니다.

어머니와 진순이는 주인과 개가 아니라 골육지정을 뛰어넘을 정도인데 자식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서러움까지 나누는 사이입니다. 진정한 '소통'이란 이런 것이겠지요. 

"진순이가 알아들어요?"

하고 물으면 "말을 못해서 그렇지 다 알아듣지 그럼! 그치, 진순아!"라며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진순이는 그동안 열세 번 임신해서 모두 50마리 넘는 새끼를 낳으면서 용돈을 보탠 살림꾼인데 재작년부터는 생산이 중단됐답니다.

사람으로 치면 팔순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이빨은 빠지고 시력은 흐려지는 등 노화증세에 시달리지만 어머니가 외출 채비를 하면 마치 최후의 일각까지 충성을 다하려는 듯이 노구를 이끌고 경호에 나선답니다.

어머니가 식당하실 때 술꾼이 해코지를 하려 하면 그 술꾼의 발을 물어 혼내고, 성당에서 올 시간이 됐는데도 귀가치 않으면 성당까지 마중 간답니다. 읍내 의원에선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 어머니 옆에 자리 틀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엔 난색을 표시하던 의사와 간호사도 그 충직함에 감동해 동반자로 인정할 정도가 됐답니다. 그 충성심 덕분에 시골로 이사간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도 읍내에서 제법 유명 인사가 되면서 어머니의 입지도 덩달아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시골로 이사 오기 전의 동네에선 더 유명짜~ 했는데 어머니 왈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가 '진순이가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면 아마 당선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진순이가 행방이 묘연한 어머니와 형님을 찾기 위해 동네 목욕탕, 술집, 노래방, 다방 등지를 찾아다니면 수소문해서 상봉을 돕기도 한답니다.

사족을 달자면 그 동네 사람들의 이구동성처럼 진순이처럼 충직한 후보를 시의원과 국회의원, 교육감과 대통령으로 뽑았다면 뇌물 챙기고, 압력 행사하고, 관광 외유하고, 국민의 소리를 깔아 뭉개는 개판 정치꼴을 면했을 것입니다. 주인 무는 개뿐만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을 물어 뜯는 정치인을 마땅히 처분해야 하겠지만 거짓 정치인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탕발림에 혹해 그런 무뢰배를 선출한 책임은 주권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늙으면서 샘 많아진 진순이... 어머니 "사람이나 개나 편하게 해주면 된다"

어머니와 아내, 진순이와 햇살이가 물안개 피어오른 새벽에 운동을 갔다가 귀가하는 중입니다.
 어머니와 아내, 진순이와 햇살이가 물안개 피어오른 새벽에 운동을 갔다가 귀가하는 중입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동생가족들과 함께 마을 정자에서 늦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동생가족들과 함께 마을 정자에서 늦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사람도 늙으면 아이처럼 토라진다고 하는데 팔순 나이에 이른 진돗개 진순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먼데 행차로 피치 못하게 떼어놓고 가면 어머니 방에 들어가 베개 베고 눕질 않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어머니 귀가가 늦으면 화단의 꽂을 뽑아버린 뒤에 뼈다귀를 묻거나 다라니에 담긴 빨래를 끄집어 낸 뒤 바닥에 내치질 않나, 학대 받는 옆집 개를 입양하려 하면서 자신이 찬밥이 될 위기에 처하자 가출로 항의하질 않나….

햇살이를 데리고 간 날도 그랬습니다. 얼마나 심통 났는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더군요. 오랫 동안 친숙한 관계였던 제가 머리를 쓰다 듬으려 하자 안면을 몰수한 표정으로 물려고 했습니다. 그리곤 단단히 심통난 표정으로 웅크린 채 '크르릉 크르릉' 소리를 내더군요. 왜 그런지 물었더니 심통을 삭이느라 용쓰는 소리라고 하더군요.

햇살이를 데려 오기 전에 어머닌 진순이에게 "아가가 서울에서 내려오는데 지난번 깜실이를 문 것처럼 아가를 또 물면 할 수 없이 너를 묶을 수밖에 없다"고 수차례 경고를 했답니다. 첫 주인에게 학대 받던 슈나이저 종인 '깜실이'를 입양한 어머니가 정성껏 치료를 해주었는데 그 꼴을 못 본 진순이가 홧김에 물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깜실이'는 동생 가족에게 분양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하룻강아지 같은 어린놈이 나타나 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려 하자 참지도 못하고 풀지도 못하다 보니 '크르릉 크르릉' 거렸던 것입니다. 눈치 코치 빠른 진순이는 두 번째 사건을 일으켰다간 가중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억지로 참으며 햇살이를 두고보고 있답니다.

충직한 진순아!
어린 햇살이가 귀여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란다!
하지만 반려의 세월만큼 깊어진 정까지 어찌 차지할 수 있겠니!
어머니는 진순이를 세상에 둘도 없는 동반자로 여기고 있는데 그건 진실이야!
그러니 속좁은 심통을 거두고 햇살이를 너그러이 받아주고 평화롭게 노후를 보내렴!

개와 오래 살면서 개박사가 된 어머니는 간염예방접종 등의 주사를 사다 직접 놓습니다. 장염만 걸리지 않으면 개도 장수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진순이가 설사를 하면 돼지 뼈를 우려낸 국물을 먹이는 등 지극정성으로 치료합니다. 그 어머니께 햇살이와의 갈등 관계를 고백하면서 어떻게 하면 개를 잘 키울 수 있는지 여쭈었더니 이런 짤막한 가르침을 주시더군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편하게 해주면 된다!"

어린 햇살이에게 사랑을 빼앗긴 진순이, 어머니의 경고 때문에 두고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 햇살이에게 사랑을 빼앗긴 진순이, 어머니의 경고 때문에 두고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 조호진

관련사진보기



태그:#애완견, #분양견, #생리, #어머니, #자식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