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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빌딩과 아파트로 들어찬 서울의 한쪽, 젊음의 인디문화가 꽃피는 곳, 나의 학창생활은 그곳과 함께했다. 4년, 아니 5년 동안 생활했던 공간이다. 기껏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그 긴 시절을 교과서와 참고서에 매달렸지만, 솔직히 별로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이 없다.  역시 민주사회의 시민이 되기 위한 자유와 이성을 키우는 학습의 공간은 대학시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대학시절을 보낸 때는 90년대 중후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쇠락한(?) 운동권은 곳곳의 대학에서 집권에 실패했고, 급기야는 한총련을 탈퇴하는 학교들도 늘어갔다. 최루탄냄새를 간간이 맡을 수 있는 것은 군대가기 전 김영삼 정권 때에 손에 꼽을 만하고 그 외에는 학우들의 저조한 참여로 대회조차 무산되기 일쑤였다.

 

정치적으로는 '좋은 시절'이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남과 북이 손을 잡은, 민주화 운동의 명목이 사라져버린 때에 느닷없는 학생회의 강경한 구호는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의 시대엔 오히려 생뚱맞을 지경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꿈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원대한 비전을 펼치던 때였다. 군대를 거치고 아이엠에프가 국가에 떨어지면서 복학을 했고 나의 꿈과 희망을 현실에 차곡차곡 접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은 여전히 나의 추억과 꿈과 희망이 자라던 내 과거의 '자랑'이 되던 곳이다.

 

나는 홍익대학교 건축과를 다녔다. 미술로 유명한 학교는 비록 공대에 속하긴 하지만 '예술성'이 강조되는 건축설계분야 역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학교 주변에는 내가 다니던 시절에 많은 '작업실'이 있었다. 요즘 '개그콘서트'의 '분장실의 강선생님' 의 분위기 같은, 엄밀히 따지면 선생님까지는 없고 선후배들로 구성된 집단 주거, 학습 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소규모 선후배 관계로 이어져 '작업'을 하는 공간이었다. 30여년 된 작업실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도 있었다.

 

일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은 우리말 '작업실'을 놔두고 '아틀리에 atelier'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기엔 좀 어둡고 눅눅하며 깨끗하지 못한 환경을 지닌 곳이었다. 여학생비율이 일정정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졸업 후의 도제방식의 설계사무실 환경을 미리 익히기라도 하듯, 선배에서 후배에게 기술이 전수되는 시스템은 지금의 세태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수도 있다.

 

어둡고 눅눅한 지하의 방에다 작업을 위한 제도판들을 배치해 놓은 것이 인테리어의 핵심이었고 벽에는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작품을 흉내내보는 자신의 스케치와 도면들이 붙어서 '작업실'임을 증명했다. 월단위로 나오는 설계 과제를 위해 매주 한번씩, 그리고 마감에 이르러서는 며칠밤정도는 잠을 안자거나 줄이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필수였다.

 

체력이 중요했으나 운동은 게을리 하고 잠을 자지 않으니 비쩍비쩍 마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설계 작품의 질보다 밤샘일수로 경쟁하기도 했고 과제에 집중하는 날보다 술로 날을 새는 날이 더 많았다.

 

가난한 학창시절을 식구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붙어 지내는 작업실 사람들은 소속감과 연대를 굳건히 하고 사회진출이후에도 서로의 안부와 경조사를 살뜰히 챙기는 사이로 이어진다. 그 황금기의 추억이 그들의 연대를 이어주는 것이다.

 

작업실 생활은 비단 '작업'만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취미와 여행, 연애가 모두 공유되며 이는 사생활침해를 생각하는 '개인'이라면 분명히 거부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티격태격 일도 많고 서로에 대한 애증이 싹트기도 한다. 감정과 자본의 '나눔'에 대한 훈련소 같은 곳이랄까.

 

나에게 <습지생태 보고서>는 '추억'이다. 만화를 하는 자취학생 대여섯이 모여 지하의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나의 과거와 겹친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젊음에도 불구하고 행동반경이 넓지 못한 신세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어두움을 작가의 시선으로 그린다.

 

젊은 미혼 남성 여럿이 장기간 합숙을 하는 비정상적인 생태에 대한 추억담. 은유와 블랙유머, 재기 넘치는 상상력이 특유의 선 굵은 그림과 어우러져 감동과 즐거움을 준다. 젊음은 그래도 아름다웠다는.

덧붙이는 글 | 습지생태보고서/ 최규석/ 거북이북스/ 9800원


습지생태보고서

최규석 글 그림, 거북이북스(2005)


태그:#만화가, #작업실, #자취방, #습지생태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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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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