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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에서 유일하게 한옥민박체험을 하고 있는 이산면 두월리의 괴헌고택은 도로변에 위치하면서도 조용한 곳으로 집보다 더 큰 잔디가 깔린 마당과 현재는 윗사랑으로 쓰이고 있는 사당과 입구 왼쪽에 마련된 초가 행랑채, 입구 우측의 현대실 화장실과 세면장 등등 민박을 하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고택이다.

                

늦은 시간 도착한 우리들은 남자들은 사당을 개조한 윗사랑에 여자들은 4~5년 전에 지어진 초가 행랑채에서 잠을 잤다. 사실 나는 왜 사당을 개조하여 손님을 받고 있는지? 한옥민박이라고 하면서 왜 사랑채에 손님을 재우지 않고, 사당과 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초가 행랑채에 손님을 재우는지 의문을 가지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을 부르는 새소리에 눈을 뜬다. 7시다. 일어난 김에 집안을 산책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집 한 채가 들어서도 될 만한 넓은 바깥마당에는 안채로 향하는 길과 사당으로 통하는 두 길이 손질 잘 된 푹신한 잔디 위에 징검다리처럼 박석(礡石)을 놓아 연결시키고 있었다.

 

건물은 뒤쪽이 약간 경사진 대지에 가지런히 서 있다. 1804년(순조4)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부정자(承政院副正字),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낸 괴헌(槐軒) 김영(金瑩)이 1779년(정조3) 부친인 덕산공(德山公) 김경집(金慶集)으로부터 물려받은 살림집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왼쪽이 마구간이다. 오른편은 화장실과 목욕탕으로 개조된 사랑채, 사랑채에서 안채로 직행하는 통로에 바깥마당처럼 징검다리 박석이 안마당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 배치는 대갓집 전형을 그대로 따랐고, 안방 앞마루는 툇간이 아니라 대청인데 대청의 전체 규모는 6칸이다.

 

이 집에는 용도에 따라 창고 방, 고방, 광 등의 수납공간이 설치되었고, 안방의 피난 다락과 사랑방 다락 뒷벽에 은신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랑방 뒷벽 밖에 장독대를 만든 일도 특색의 하나다.

 

현재 윗사랑으로 쓰이는 사당은 안채의 오른편 위쪽에 따로 일곽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돌계단은 올라가다 두 갈래로 갈리는데, 그대로 올라가면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고, 옆길로 빠지면 옆의 덕산 고택과 연결되어있다. 

 

산책을 하다가 괴헌의 아버지 집인 덕산고택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집이라 무심결에 들어간 것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덕산(德山) 김경집(金慶集)이 1756년(영조32)지은 것으로, 애초의 당호는 덕산정(德山亭)이었다고 한다. .

                       

행랑채가 나중에 세워진 것인지, 대문을 통과하기 전에 보이는 본체 건물은 사선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바깥마당이 괴헌 고택의 절반도 안 되었고 잔디도 깔려 있진 않았지만, 중문간채의 문도 활짝 열어놓아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연결하여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인 전형적인 ㅁ자형 평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만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우진각 지붕이다.

 

덕산고택은 좌측 사랑채와 마루를 설치한 곳간에 벽장과 안채로 통하는 은밀한 통로를 두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내외간의 통행을 편리하게 한 이러한 연결 동선 등이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민가건축으로서는 드물게 서당까지 잘 갖추고 있는데, 덕산은 자신의 집 왼편에 아들의 살림집을 축조하면서 뒤쪽으로는 서당을 건립하여 인근의 후학들에게 배움의 터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역시 선비의 고장다운 면모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산책 도중 덕산고택의 주인 아주머님을 만나 차를 한잔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란히 마주한 덕산고택과 괴헌고택은 장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원래는 10촌이 넘는 촌수를 가지고 있었지만, 덕산고택에 대를 이을 양자를 괴헌고택 지하에서 받아 현재는 당숙질간으로 아주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봉화의 닭실마을에서 시집 왔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후에 닭실마을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세수를 하고 아침 식사로 어제 남은 떡과 주스, 물, 녹차를 마셨다. 9시가 다 되어 집을 나오려고 하자, 주인부부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는 사랑채로 우리 일행을 부른다.

 

상호 인사를 하고 나서 차를 마시면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타향에서 50년 넘게 살다가 7년 전 귀향했다는 주인부부는 점잖았다.  

 

"사실 한옥 민박을 원하시는 분들은 주로 한옥의 사랑채에 묵길 원하고, 저녁과 아침 식사를 주인과 함께하면서 전통 음식과 술, 차를 한잔 즐기며 여유롭게 보내길 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실은 대부분 노인 부부가 집을 지키고 있는 수준이라 숙박 이상을 체험하는 것이 힘들다" 라며 "조만간 영주댐이 생겨 수몰되는 10여 곳의 문화재와 고옥을 한 곳에 모아 전통마을 만들면, 그 곳에서 숙박과 공동으로 전통음식체험이 가능한 공간이 마련될 것 같다" 며 "나중에 한번 더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말을 맺었다.

 

내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왜 사당에 아무것도 없고, 숙박을 시키냐?"라고 물어보니 "사실 윗사랑이 사당으로 쓰인 것은 건축초기 2~3년 정도로, 위패를 자주 도둑맞아 어쩔 수 없이 본채의 사랑에 모시고 있어, 줄곧 윗사랑으로 쓰고 있는 관계로 손님을 모신 것이고, 그 곳에 이 집에서 가장 터가 좋은 곳이라 남자분들이 주무시면 최고라고 하니 걱정은 말라"라고 말했다.

           

"여성분들이 주무신 행랑채는 지어진 지는 4~5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초가로 운치가 있고, 원래 있던 자리에 복원을 한 것이라 의미도 있어 2~3분이 오시면 선호하는 곳이다. 섭섭하면 나중에 윗사랑에 주무셔도 좋다. 하지만 여성들이 윗사랑에 주무시면 기가 세어진다고 하여 말리는 분들도 있다"라고 말했다.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나가려는데 주인부부가 대문까지 나와서 배웅을 한다. 손님을 위해 한복까지 차려입고, 배웅을 나오는 모습이 여느 한옥민박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괴헌고택에서 나온 일행은 인근 이산면 두월리에 있는 된장마을 무수촌으로 향했다. 다들 오래된 서울살이로 이제는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사서 먹어야 하는 관계로 아주 맛있는 된장을 찾기 위해 된장공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사실 된장마을 무수촌에서 나오는 된장, 간장 등은 그 동안 내가 맛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고 깔끔한 맛을 자랑할 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직 건강하신 자친(慈親)께서 나중에 직접 된장이나 간장을 담글 수 없게 되면 나도 사먹을 곳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그:#영주시 , #괴헌고택, #덕산고택, #무수촌된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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