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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비보가 믿어지지 않았다. 이날 오전 직장 야간 근무를 마치고, 머리가 지근거려 침실에서 좀 더 휴식을 취하다가 늦게 퇴근을 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가 집인지라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12시 10분경 집에 도착했다. 집 청소와 빨래를 하다 보니 1시간가량이 지났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평소 자주 찾은 김밥으로 향했다. 김밥 집에 들어서자 가장자리에 있는 텔레비전(MBC)에서는 뉴스 속보를 통해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정말 믿기지 않았다. 김밥 두 줄을 사가지고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각 방송사는 정규 프로그램을 잠시 접고 고 김대중 15대 대통령 서거 소식을 긴급뉴스로 편성해 전했다. 오후 2시 35분경 연세대 세브란스 박창일 의료원장과 고 김 전대통령의 박지원 비서실장이 텔레비전에 나와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보고 믿게 됐다.

 

박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이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8월 18일 오후 1시 43분에 숨이 멈추었다고 했다. 향년 86세였다. 한나라당이 줄곧 말해 왔던 잃어버린 10년의 주인공인 '고 노무현 16대 대통령과 고 김대중 15 대통령'이 3개월 사이를 두고 서거 하게 된 것이다. 진심어린 마음을 모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여기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더듬어 본다. 고인이 기억할 수 없는 나만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71년 전남 고흥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개나리, 진달래가 만개한 어느 봄날 우리 부락 이웃집 담벼락에 대통령선거 포스터가 등장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동심에 젖은 천진난만한 시골농촌 소년이었다. 물론 어린데다가 정치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나이였다. 하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은 기호 1번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 기호 2번 김대중 신민당 후보 등 여러 대선 후보들의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팔자수염을 한 후보도 있었다.

 

바로 71년 대선 후보 포스터 사진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첫 번째 간접 인연이었다. 그를 관심을 갖고 기억하게 된 동기는 동심어린 눈으로 본 포스터 문구였다. 문구 표현이 아주 과격해 보였기 때문이다.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참겠다 갈아치자'였다. 당시 정치를 모르는 어린 마음에 섬뜩하게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선 후, 대선 1년 반이 지난 72년 10월 18일 갑자기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같은 달 27일 유신헌법을 공고해, 11월 21일 비상계엄하에서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을 확정 공포했다. 이때부터 대선 후보를 지낸 고인을 비롯해 야당 탄압이 가속화된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담임선생을 통해 10월 유신을 찬양하고 합리화한 노래를 초등학생들에게 부르게 했다.

 

1~10까지에서 가사를 붙였다. 노래 가사는 이러하다. 1, 일하시는 대통령 2, 이 나라에 지도자 3, 3.1정신 받들어 4, 사랑하는 겨레 위해 5, 5.16 이룩하니 6, 6대주에 빛나고 7, 70년대 번영은 8, 팔도강산에 뻗쳤네 9, 구국의 새역사를 10, 10월유신 정신으로

 

이후 고 김대중 전대통령과의 또 다른 간접 인연은 약 10년 후인 1980년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주변 도외지로 나와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 3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기억 된다. 그 때 그가 광주사태 배후조정자로 지목, 신군부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모습을 흑백텔레비전을 통해 접했다. 어린 시절 대선 포스터 문구와 함께 사형선고 소식은 그를 나에게 강인하고 과격한 사람으로 낙인찍기에 충분했다.

 

서울로 상경해 대학을 다니던 시절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간간히 들려오는 고인과 광주민주항쟁 소식은 폭도, 주동자 등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 보도였다. 이후 군대를 갔다. 1사단에 배치됐다. 당시 군인수첩에는 '대통령를 지낸 사단'이라면서 군인의 긍지를 강조했다. 바로 전두환 전대통령을 가리켰다.

 

군대를 제대하고 몇 년 후 87년 12월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 김대중 평민당 후보, 김종필 신민주공화당후보 등의 후보 포스터가 나란히 부착됐다. 결론은 노태우 후보의 승리였다. 김대중 후보는 양김 단일 후보의 실패로 인한 쓴잔을 마셨다. 그것도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87년은 노동자(노학연대) 대투쟁이 한창이었다. 당시 경기도 안산공단에 있는 '나도전자'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전라도 사람들이 유별나게 많았다. 대표이사 겸 사장도 나와 동향인 전라도 고흥사람이었다. 나도전자의 '나도'는 전'라도'를 의미한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특히 광주, 나주 등에서 온 전라남도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300여명의 종업원 중 광주에서 올라온 공업고등학교 3학년 실습생도 상당수 있었다. 그 곳에는 노조도 없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노조를 만들려는 계획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장, 과장 등의 감시가 심해 실패했다. 이곳은 많은 종업원들이 전라도 사람들이었기에 김대중 후보를 선호한 듯했다. 물론 빨갱이라면서 반대한 사람도 있었다. 몇몇 종업원들은 노골적으로 이제는 디제이(DJ)가 돼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기도 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인근 안산 공단에는 공장들이 즐비했다. 시퍼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라서 공장 내에서 노골적으로 야당 후보를 두둔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나도전자는 철야 맞교대 근무에다 미니 텔레비전 수상기를 만드는 생산 공정이라서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종업원은 별로 없었다. 서울 신정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출퇴근을 했다. 12월 대선이 얼마 남지 않는 기간인 어느 날(11월 중순경) 주간 근무라서 양복을 입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 서울에서 여자와 데이트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시 퇴근 후 동료와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안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안산역 부근 마을에 내려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김대중 후보의 연설 선전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주변에는 3~4명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김대중 후보 운동원들과 지역주민들이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60대 정도 할머니 할아버지 등 노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김대중 후보 연설 포스터(87년 11월 21일 유세 연설을 알리는 포스터)를 벽에 붙인 것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김 후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빨갱이, 거짓말쟁이 등 김대중 후보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너무 막무가내 다그치는 것 같았다. 화가 나 그들을 돕고 싶었다. 물론 나도 솔직히 김대중 후보를 선호하고 있었던 것도 한몫 작용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김대중 후보 유인물이 붙어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런 발언을 했다. "만약 이것이 포스터가 불법이라면 지역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를 하면 됩니다. 선거운동원들에게 다그치는 것은 어르신네들의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법에 어긋났으면 신고를 했으면 합니다." 노인들은 "너도 똑같은 놈이구나" 등으로 거친 말을 했다. "알아서들 생각하십시오. 나는 길가는 나그네입니다"라면서 동료와 함께 안산역으로 향했다. 당시 이 장면을 직장 동료가 아날로그 카메라에 담았다. 어쨌든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13대 대선후보 시절과 관련된 나의 비화이다.

 

나도전자를 그만두고 한국전기안전공사 입사해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서울지하철공사로 직장을 옮겼고,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 시기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접 대면한 적이 있었다. 89년 3월 16일 서울지하철노동자들이 합의각서 이행, 배일도 전노조위원장 석방, 김명년 사장 퇴진 등을 내걸고 파업을 벌였다. 조합원들은 파업 2~3일째가 되면서 파업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평화민주당(여의도 백화점) 당사와 통일민주당(마포 제일빌딩) 당사로 각각 나눠 그곳에서 농성을 했다. 파업시기 파업을 선동하는 지하철풍물패에서 일했고 여의도 평화민주당 농성장에 합류했다.

 

당시 평화민주당 이길재 대외협력위원장, 양성우(겨울공화국 시인) 전의원 등이 김 총재를 모시고 농성장에 들려 지도부와 조합원들을 찾아 일일이 악수를 했다. 나에게도 악수를 건넸다. 그는 "노태우 정권의 노동자탄압에 항의하겠다"면서 "국회노동위에서 의원들을 통해 이 문제를 집중 거론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농성자들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날 고 김대중 전대통령과 첫 직접 대면이었다.

 

그는 7대 박정희 후보(71년)와 13대 노태우 후보 및 2김 후보(87년)와 14대 김영삼 후보 및 정주영 후보(92년)와 겨뤄 여당 대선 후보에게 연거푸 참패를 했다.

 

14대 김영삼 후보에게 패한 후, 정계은퇴를 하면서 밝힌 '부덕의 소치'라는 말이 세상에 회자가 되기도 했다. 이후 그를 간접 경험하게 된 것은 1년 후, 93년 12월 '김영사'에서 출판한 <김대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였다. 대선에 패배한 후, 93년 1월부터 6개월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온 이후, 정계은퇴를 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의 소신을 피력한 부드러운 이미지의 책이었다. 지금까지 고인의 40여권의 저서 중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고 쓴 자연스러운 책이라고 할까.

 

이 책은 정계은퇴를 한 그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보고, 지금까지 배우고 터득해온 것을 국민들에게 들려줌으로써 발전하고 진보할 수 있다는 충정에서, 그리고 국민들이 인류 최대의 격변기를 지혜롭게 대처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글을 쓰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이 책을 읽으면 그의 삶과 철학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은 이전의 그가 밝힌 여러 종류의 이론이나 연설문 같은 핫한 글이 아니라 쿨한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96년 고 김 전대통령을 두 번째로 직접 만나본 계기가 있었다. '방송시청자운동 활성화 연구 방안' 대학원 석사논문 관련 자료를 모으기 위해 프레스센터 자료실에 자주 들렸다. 당시 석사 3학기였기 때문에 직장과 학교와 연구 자료를 찾는 데 몰두했다. 아주 바쁜 시절이었다. 96년 2월 2일 프레스센터 19층에서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이날 오후 언론 관련 행사(토론회와 만찬)가 있었는데 그가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자격으로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15대 대선을 1년 반 정도 남겨둘 때였다. 그곳 행사에 들렸다가 줄을 서 악수를 하고 나온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얼떨결에 악수를 하게 된 것이다. 배웅을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는데, 당시 모 비서와 정동영 현무소속의원(당시 직책음 잘 모름)이 함께 했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동영 의원은 옆에 있던 최문순(현 민주당의원) MBC기자를 소개해 준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 장면을 평소 가지고 다녔던 아날로그 카메라에 담았다. 두 번째 고 김대중 전대통령을 직접 보았고 악수까지한 셈이었다.

 

이후 97년 12월 IMF시절 15대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줄곧 TV에서만 그를 지켜봤다. 하지만 퇴임 이후 세 번째 그와 악수를 했다. 바로 2008년 6월 10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이다. 6.15공동선언 남측언론본부 주최 '6·15 공동선언 발표 8주년 기념' 특별강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언론본부 집행위원 자격으로 참석해 취재를 했다. 이날 그는 "후보 시절 이명박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공감했다"면서 "이 대통령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날 강연이 끝나고 김대중도서관 강당 중간 통로를 통해 나온 고 김대중 전대통령과 악수를 했고, 세 번째 만남이었다. 지난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광화문 영결식장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통곡을 하는 모습이 생생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지난 6월 말 생전에 그와 한 권의 책으로 인연을 맺게 됐다. '퍼플레인' 출판사에서 펴낸 <노무현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책에 그는 지난 6월 11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사 원고를 허락해 실었다. 고인 외에도 박노해 시인, 조기숙(이화여대 교수) 참여정부 홍보수석, 이용섭 의원, 명진 스님 등 33인의 저자 중 나도 포함됐다.

 

바로 이 책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연이 됐다. 고인은 생전에도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 자신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인연이라는 사실이다. 19일 오후 서울 시청 서울광장 분향소에 '고 김대중 전대통령 국장'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그 앞에서 엄숙히 조문을 했다. 고인과의 인연을 맺었던 기억들이 주마간산처럼 스쳐갔다. 좌절과 인내, 인동초의 삶을 살다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다시금 빌어본다. 오는 8월 23일 일요일 여의도 국회 광장에서 치러질 고인의 국장 영결식에 조용히 참석해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려 한다.


태그:#고 김대중 전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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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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