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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요정 님프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 님프 신전 물의 요정 님프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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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그 위험한 지역으로 여행을 간다고?

중동, 중동 말로만 듣던 곳이다. 중동하면 우선 떠오르는게 석유다. 파란 하늘아래 척척 늘어진 야자수나무, 대추야자, 건조기후, 가도가도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사막 등, 학교에서 지리시간에 들었던 단편적인 것들이다. 아, 또 있다. 이스라엘과의 싸움, 레바논 내전으로 인한 처참한 모습의 부상자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애처로운 눈망울 등도 떠오른다.

이런 곳엘 가게 내가 되었다. 딸은 여행 떠나기 직전까지도 위험한 곳이니 여행지 바꾸면 어떻겠냐고 했다. 게다가 자료 조사할 때 주의사항도 많았다. 중동 여행시에는 사진 찍을 때도 주의해야 하고 여자가 남자한테 말을 거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걱정이 많은 식구들을 남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배낭을 메고 떠났다. 사전에 인터넷으로 조사는 했지만 세세하게 준비하지 못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과 함께 떠나는 일행한테 의지하는 점도 있었다.

터키항공이 있어서 인천공항에서 이스탄불까지는 갈아타지 않고 직접 날았다. 이스탄불에서 암만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갈아탈 때까지 거의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고등어라 하면 비린내 나서 어떻게 먹을까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신선한 고등어를 튀겨서 채썰은 야채와 함께 빵속에 넣어 레몬즙을 뿌려서 주는데 비리지 않고 고소한게 여간 맛있는게 아니다.  한끼 식사로 그만.
▲ 갈라파고스 다리 근처의 고등어케밥 고등어라 하면 비린내 나서 어떻게 먹을까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신선한 고등어를 튀겨서 채썰은 야채와 함께 빵속에 넣어 레몬즙을 뿌려서 주는데 비리지 않고 고소한게 여간 맛있는게 아니다. 한끼 식사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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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말로만 듣던 갈라타 다리 밑에 가서 고등어케밥도 먹어보고, 그랜드바자르도 가보고, 이집션 바자르도 가보았다. 터키는 중동이라기 보다는 유럽에 가까웠다. 문자도 아랍 문자가 아닌, 터키만의 문자가 있어, 뜻은 몰라도 대충 읽어서 물어보거나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트램도 타보고 히포드롬광장과 블루모스크를 봤다. 성 소피아 성당은 구경할 운이 안닿는지 두 번째 왔는데도 공교롭게 두 번 다 월요일이라 관람을 못했다. 겉모습을 사진 찍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이스탄불에서의 짧은 여행을 알차게(?) 마치고 목적지인 요르단 암만에 도착했다.  물어물어 어렵게 숙소에 도착했다 이미 밤 1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계단은  어두운 데서 봐도 지저분하고 룸에는 지저분한 침대 3개와 다 부서진 장농(?) 한짝이 있고 구질구질한 침구가 있었다.

게다가 엄지손가락 1마디만한 바퀴벌레가 방에서 반긴다. 기절작렬! 숙소에 있는 어떤 것도 내몸에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져간 것(춥거나 혹은 만약에 대비해서 내몸 하나 덮을 정도의 천)을 꺼내서 깔고 덮고, 자는둥 마는둥. 귀곡산장은 저리가라다. 다음날 당장 숙소를 바꿨다. 같은 골목에 마주 보고 있는 클리프 호텔로!

로마시대 유적 중 가장 여성적이고 섬세하다는 제라쉬

 AD129년에 하드리안 황제가 방문한 것을 기념해 이 지역 명사들의 기부로 건립된 거대한 아치형 개선문으로 암만으로부터 들어오는 제라쉬의 남쪽 길 위에 세워졌다
▲ 하드리안 황제의 개선문 AD129년에 하드리안 황제가 방문한 것을 기념해 이 지역 명사들의 기부로 건립된 거대한 아치형 개선문으로 암만으로부터 들어오는 제라쉬의 남쪽 길 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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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대충 해결하고 유적지 제라쉬(Jerash)로 향했다. 첫번째 관광으로 제라쉬를 택했다. 햇볕이 뜨거워 살을 내놓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팔은 요즘 유행하는 팔토시로 감싸고 옷은 긴(발목까지 오는) 원피스에 모자까지 쓰고 길을 나섰다. 현지 여인들이 히잡 쓴 폭은 될 거 같다.

여행의 시작이다. 씩씩하게 짐을 꾸려서 출발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더운 나라이니 마실 물 충분하게 그리고 점심으로 먹을 빵 몇 개와 체리를 씻어서 챙겼다. 숙소에서 나와서 1.8디나르(요르단 화폐단위=디나르라고 한다. 미국 1$=요르단 돈으로 0.7디나르. 달러보다 화폐가치가 높은 몇 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다) 주고 택시타고 트롬바브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0.6디나르 주고 제라쉬까지 갔다.

사진으로 많이 본 돌덩이(?) 유적같은 것이 앞에 보이긴 하는데, 입구가 제대로 표시가 안돼 있어 버스에서 내려서 진행방향쪽으로 올라가는데 입구가 영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진행방향이 아니라 왼쪽으로 틀어서 좀 가란다. 허름한 기념품가게가 나오고 매표소가 있었다.

입장료 8YD. 밖에서 볼 때는 돌기둥과 문 정도만 보고는 별 게 있을까 싶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돌덩이들만 서있는 거 같았다. 들어갔더니 유적지가 굉장히 넓었다. 로마인들은 스케일도 크지. 어디서 이런 큰 돌덩이들을 날라다가 신전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했을까?

 제라쉬의 주요 식품 시장이었다고 한다.
▲ 아고라 제라쉬의 주요 식품 시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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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이라 해서 덥고 사막만 있는 줄 알았던 중동지역에 문외한이던 나는 이런 위대한 문화유산이 있는 줄 몰랐다. 일단 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다.

제라쉬(Jerash)는 요르단 수도인 암만에서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 있다. 해발 600m에 위치한 유적 도시다. BC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에게 점령되면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동방거점도시가 되었다. 제라쉬의 번영은 3세기에 절정에 달했으나 그 후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비잔틴시대는 많은 신전들이 교회로 바뀌었고, 다른 유적에서 나온 돌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614년에 페르시아가 침략해 오면서 많은 교회와 유적지들이 파손되었고, 747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나머지 유적의 상당 수도 파괴되었다.

약 600m에 걸쳐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로, 주변에 도시의 주요 건물과 상점들, 주택들이 늘어 서 있었다고 한다. 포장된 돌 들 아래로는 배수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 열주대로 약 600m에 걸쳐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로, 주변에 도시의 주요 건물과 상점들, 주택들이 늘어 서 있었다고 한다. 포장된 돌 들 아래로는 배수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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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쉬에는 기둥이 많이 남아 있어 한때 기둥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했다.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많은 신전과 원형 극장이 남아 있었고 히포드롬이라는 원형경기장도 있었다. 기초 구조와 일부 관중석만 남아 있다. 현재도 로마시대의 복장을 한 군인과 검투사가 참여하여 전차경주를 재연하고 있다고 한다.

이 히포드롬은 로마시대에 스타디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245m, 넓이 52m에 약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경기장이란다. 그럼에도 로마제국에서는 가장 작은 히포드롬이라니 로마제국의 건축술이나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겠다.

로마시대의 스타디움.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경기장. 하지만 로마제국의 가장 작은 히포드롬이란다
▲ 히포드롬 로마시대의 스타디움.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경기장. 하지만 로마제국의 가장 작은 히포드롬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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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가자 우람한 돌기둥들이 두 줄로 서 있어 보는 사람을 기죽게 했다. 열주대로란다.  열주대로는 약 600여m에 걸쳐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로 주변에 도시의 주요 건물들과 상점들, 주택들이 늘어 서 있었다. 포장된 돌들 아래로는 배수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물의 신인 님프에게 바쳐졌다는 님프의 분수탑 또는 님프 신전이 나타난다.

 AD 90년에 만들어졌으며 제라쉬에 있는 2개의 원형 극장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32개 열에 3,0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 원형 극장의 중앙 무대는 화려하게 장식된 조각들이 돋보이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중앙의 스피커 장치로 좌석 맨 뒤까지 선명하게 소리가 울려 퍼지는 훌륭한 극장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 남쪽극장 AD 90년에 만들어졌으며 제라쉬에 있는 2개의 원형 극장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32개 열에 3,0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 원형 극장의 중앙 무대는 화려하게 장식된 조각들이 돋보이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중앙의 스피커 장치로 좌석 맨 뒤까지 선명하게 소리가 울려 퍼지는 훌륭한 극장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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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극장은 남쪽극장, 북쪽극장 두 군데가 있었다. 그 중에 남쪽극장은 약 3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지금도 가끔 관객들이 햇빛에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7월말부터 2주간에 걸쳐 제라쉬 축제 기간에 백 파이프 연주를 비롯해 다양한 콘서트와 음악 공연들이 펼쳐진다고 한다.

 제라쉬의 출입문 역할을 했던 남문은 AD 130년에 건설됐다. 건축적으로 아칸사스 잎이 조각된 코린트식 기둥이 볼 만하다. 현재의 남문은 비잔틴 양식으로 복원된 것으로 남문을 중심으로 3,456m에 달하는 성벽이 만들어졌다.
▲ 출입문 제라쉬의 출입문 역할을 했던 남문은 AD 130년에 건설됐다. 건축적으로 아칸사스 잎이 조각된 코린트식 기둥이 볼 만하다. 현재의 남문은 비잔틴 양식으로 복원된 것으로 남문을 중심으로 3,456m에 달하는 성벽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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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엔 희랍비극도 여기에서 공연이 되었을까? 검투사들의 싸움도 여기서 이루어졌을까? 극장을 둘러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중앙 무대에 서봤다. 마치 로마시대의 배우가 된 것처럼. 관객들의 박수소리와 환호가 들리는듯 했다. 어디에서 들어도 원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거리이고 소리가 모아져서 배우의 소리가 잘 들리기도 하고 잘 보일 것 같았다.

2층 극장 출입구 그늘에 앉아 있는데 땡볕은 40도쯤 되어 모든 것을 태울 듯이 달려들지만 그늘은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천국이었다. 그늘 하나가 천국과 지옥을 갈라놓은 셈이라고나 할까?

 그리스에서 아고라라고 부르는 광장의 역할을 하는 포럼(forum)이다. 원래는 타원형으로 기둥이 둘러 있고 가운데에는 시장이었다고 한다.
▲ 포럼(타원형극장) 그리스에서 아고라라고 부르는 광장의 역할을 하는 포럼(forum)이다. 원래는 타원형으로 기둥이 둘러 있고 가운데에는 시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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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더워서 계속 걸을 수가 없다. 조금 보고 그늘 있으면 쉬면서 물을 마신다. 쉬다 걷다 하기를 반복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가장 높은 곳에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 제라쉬의 수호신인 아르테미스를 숭배하기 위해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시기인 AD 2세기에 세워진 장대한 로마 신전이다.

 프로피라에움을 올라가면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아르테미스 신전이 나온다.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의 딸이면서 아폴로의 여동생으로 사냥과 풍요의 여신이다. 신전은 AD 150~170년에 건설됐으며 중앙 성소에는 12개의 석주 중에 11개가 지금도 남아있다. 하지만 대리석이 깔린 신전 바닥이나 조각들은 세월의 흔적 속에 사라져 버렸다. 신전은 본래 4방으로 석주가 연결된 길이 있었으며 남쪽과 북쪽은 아치형 출입구가 있었다.
▲ 아르테미스 신전 기둥 프로피라에움을 올라가면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아르테미스 신전이 나온다.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의 딸이면서 아폴로의 여동생으로 사냥과 풍요의 여신이다. 신전은 AD 150~170년에 건설됐으며 중앙 성소에는 12개의 석주 중에 11개가 지금도 남아있다. 하지만 대리석이 깔린 신전 바닥이나 조각들은 세월의 흔적 속에 사라져 버렸다. 신전은 본래 4방으로 석주가 연결된 길이 있었으며 남쪽과 북쪽은 아치형 출입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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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건축술과 측량술이 발달했다더니 정말 대단하구나. 매일 아기자기하고 크지 않은 문화재들만 보고 살아온 나로서는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건 다음에 보는 문화재(발벡)나 자연(와디럼) 앞의 서곡에 불과했다.

덧붙이는 글 | 2009년 7월 20일부터 8월 8일까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7-8회 정도에 걸쳐서 실어볼까 합니다.



태그:#중동, #터키, #요르단, #제라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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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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