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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원수 사랑을 실천한 분이에요. 그분이 얼마나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그 어느 누구에게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분은 그냥 말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한 분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18일 오후 이해동 목사(전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는 울먹였다. 긴 말을 이어가지 못했고 중간 중간 쉼표를 찍고, 훌쩍이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달 13일 김 전 대통령이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한 뒤에 수시로 이희호씨를 방문해 병세가 호전됐는지 확인하고 기도했던 이 목사는 끝내 이승과 연을 놓아버린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맥이 탁 풀렸다"고 말했다.

[이해동] "원칙과 철학을 겸비한 정치인"

이해동 전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이해동 전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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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사는 "우리의 욕심이 과했던 것 같다"며 "이 엄혹한 세상에 그분이 살아나셔서 뭔가 조금 더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염치 없는 무례였던 것 같다"고 애닳아했다. 무엇보다 이 목사는 "김 전 대통령님은 신앙이 깊은 분이었다"며 "쉽지 않은 원수 사랑을 손수 실천했던 위대한 어른 한 분이 가셨다는 데 대해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슬퍼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과 첫 인연을 맺게 된 이 목사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이동하던 중에 그분을 처음 만났다"며 "71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미 정치적 거목이 되신 분이었지만 남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인간미가 풍부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3.1 민주구국선언'은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 미사와 기도회에서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 발표한 민주선언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이 정부전복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대량 구속했다.

이해동 목사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된 교계 인사들은 그때부터 김 전 대통령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생겼다"며 "눈물도 많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아주 여린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이 목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원칙과 철학을 겸비한 정치인이었다"며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건 대통령병 환자여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돼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신념이 가득 했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대선에 도전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을 정치적 테크닉이 뛰어난 정치인이 아니라 신념과 철학, 원칙을 밀어붙였던 정치인이었다고 평한 이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이 가진 이성과 원칙 때문에 '현실주의자'들에게는 '이상주의자'라고 욕먹고, 또 '이상주의자'들에게 '현실주의자'라고 비판을 받았다"며 "그것 때문에 고초를 겪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원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도 마구잡이식 투쟁 일변도의 모습은 없었다고 평한 이 목사는 "늘 현실적으로 실천이 가능한 것부터 풀어가는 지혜가 있었던 분"이라며 "대통령은 그가 원하는 목표가 아니었고, 다만 그가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고 평가했다.  

[박영숙] "모진 고문에도 희망으로 극복"

한국여성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박영숙 이사장.
 한국여성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박영숙 이사장.
ⓒ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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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희호씨와 YWCA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박영숙(77) 한국여성재단 이사장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고 울먹였다. 박 이사장은 "우리 사회의 원로로 좀 더 우리 곁에 계셔주기를 바랐지만 결국 이렇게 됐다"며 "너무 뜻밖이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박 이사장은 다른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김 전 대통령의 여성정책, 환경정책, 소외된 이웃을 위한 정책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는 "내가 평민당을 통해 처음 정치를 하게 된 것도, 비례대표 여성 1번 이런 것도 모두 김 전 대통령 내외의 뜻이었다"며 "오랜 세월 모진 고문과 풍파 속에서도 늘 희망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셨던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 집 대문 문패에 두 분 함자가 공동으로 들어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내외의 여성운동적 식견은 그 연배의 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며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선두적인 역할을 해주고, 최초로 비례대표로 여성을 1번으로 주고 하는 것들은 그분들의 실천적 노력으로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오재식]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오재식 아시아교육연구원장
 오재식 아시아교육연구원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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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38년지기 오재식 아시아사회교육원장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

오 원장은 힘이 없는 목소리로 "사람이 너무 많이 왔다갔다 한다길래 문병도 못 갔는데 이렇게 됐다"며 "그저 괜찮아지시기만을 바랐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이어 오 원장은 "동지이자 선배요, 우리 인생에 늘 귀감이 되셨던 든든한 버팀목이었는데 그분이 이렇게 가시고 나니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고 애도했다.

197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1차 망명 당시 일본 동경에서 '유신 반대 첫 성명'을 조직하던 때부터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오 원장은 납치됐던 DJ의 해외구명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이다.

오 원장은 1970년대 대한민국은 살벌한 얼음판에 다름 아니었다고 회상하면서 일본에서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없어 노트를 펴놓고 필담을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당시 한국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제 관계자들로부터 모은 돈 1000달러를 전달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트에 "우리는 반드시 이걸 거다. 우리의 민주화운동을 해외에서 잘 알고 있다. 추호도 걱정하지 말고 활동하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고 적는 등 민주화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고 전하기도 했다.




태그:#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3.1 민주구국선언, #이해동, #박영숙, #오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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