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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몰아치는 평택역에 도착하니 현수막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안 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여기저기 사방팔방 걸려 있다.

 

"화합의 엔진소리, 시민이 함께 합니다."

"쌍용차 노사 대타협, 평택경제 청신호!"

 

모두 다 희망의 메시지다. 어찌나 튼튼하게 걸어놨는지 비바람에도 끄떡없다. 사람들은 현수막 아래로 빗줄기를 피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현수막은 누구의 편도 아닌 적어도 '중립'을 지키고 있다는 것. 

 

"쌍용자동차 노사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택시를 타고 "쌍용자동차요!"라고 말하자 목이 굵은 택시기사가 고개를 돌려 아래 위로 훑어본다. 노사 타협으로 쌍용차 사태가 마무리된 지 일주일이 다 됐지만 여전히 공장으로 가는 길은 평택 시민들의 눈길을 끈다. 훑어보던 눈길과 달리 택시기사는 조용하다. 분위기가 어색해 먼저 한 마디 툭 던졌다.

 

"현수막도 걸리고, 평택에 오랜만에 희망이 찾아왔나 봐요."

 

희망을 말하는 평택, 죽음을 이야기하는 퇴직자

 

어색할 정도로 대답이 없던 택시기사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입니까? 언제는 뭐 희망이 눈에 보여서 살았나요. 그냥 사는 거지요. (다시 침묵) 직장 잃으면 가장 먼저 하는 게 뭔지 압니까? 젊은 양반 직장 잃어봤어요? '죽음과의 투쟁'입니다. 죽음. 이미 동료들 여럿 목숨 죽었잖아요. 두고 보십시오. 금방 또 곡소리 날겁니다."

 

그는 공장에 도착할 즈음에야 "3개월 전 희망퇴직으로 먼저 쌍용차를 뜬" 사람이라고 밝혔다. 쌍용차에 위기가 닥쳐올 때부터 야간에 대리운전을 하다가 아예 직업을 바꿨다고 했다.

 

그는 "반강제로 직장을 떠난 뒤 처음엔 좀 편히 쉬었는데, 금방 불안, 초조, 우울 등이 찾아왔다"며 "쌍용차 노동자들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남의 일이 아니었고, 지금도 스스로 죽음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며 쌍용차 공장 정문에 도착하니, 검은 비옷을 입은 덩치 좋은 사람들이 길을 막았다. 파업 기간에 공장에 투입됐던 용역업체 직원들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쌍용차는 여전히 '계엄' 상태다. 공장 정문과 양쪽 출입구 모두 용역업체 직원들이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13일부터 자동차 생산이 재개되는 공장은 분주해 보였다. 자재를 실은 대형 트럭이 바쁘게 쌍용차 공장을 오갔다. 하지만 공장점거 농성을 벌였던 노조원들과 외부인들은 공장 출입을 할 수 없다. 노조 간부들은 노조 사무실에도 들어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회사가 "아직 경찰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다.

 

결국 노조는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 사무실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노조는 공장점거 파업을 끝났지만, 다시 회사와 실무 협상을 벌어야 한다. 직장을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을 정하는 '잔인한 작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노조사무실은 '봉쇄'... 파업 동참한 비해고 노동자는 '대기발령'

 

한 노조 간부는 "파업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회사를 떠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며 "회사는 대타협 정신에 입각해서 공정하고 엄격한 인사 평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간부는 "이미 공정한 '룰'은 깨진 것 같다"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벌써 우리 노동자들만 64명 구속됐습니다. 아직도 경찰 조사 받는 사람들도 많고. 이래서 쌍용차가 살 수 있겠습니까? 한쪽을 '빨갱이'로 만들면서 완전히 뭉개고 있는데, 정이 가겠습니까? 상생이란 말이 참 무색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회사가 보복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말인즉, 공장 점거 농성을 벌인 이들 중 비해고 노동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파업이 종료된 지금 이들 71명은 '대기발령' 상태에 있다. 곧 공장이 가동되지만 이들에게는 일과 역할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고 아닌 해고 상태에 있는 K씨와 어렵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불이익이 있을 것이란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왕따시킬지는 몰랐다"며 "언제까지 일을 안 줄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남아서 당당하게 작업복 입고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솔직히 나는 곧 해고자 처지가 될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또다른 대기 발령자 P씨 역시 "이게 무슨 대타협이고 상생인가, 77일간 점거 농성을 했는데 뭘 더 못하겠느냐"며 "우리를 본보기로 노조 협력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 계속 치졸하게 나오면 다시 투쟁의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회사는 "경찰 조사가 진행중이라서 내린 조치일 뿐, 보복 의도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노조는 실무협상에 앞서 이들에 대한 차별이 시정되도록 회사에 요구할 방침이다.

 

오후 5시가 되자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조금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일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노동자들의 얼굴은 힘차 보였다.

 

'살아남은' 강아무개씨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밥그릇 싸움을 벌여서 솔직히 마음이 아프고 세상 사람들에게 창피한 것도 있다"며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 떠난 사람들 다시 돌아와서 웃으며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쌍용차는 강씨의 희망대로 될까? 이번엔 떠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향했다. 이날 저녁 6시 평택시내 한 식당에서 '쌍용자동차 가족대책위원회'가 모였다. 이들은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밖에서 싸웠던 가족들이다.

 

이날 모임에는 총 50여 명의 회원들이 참석했다. 극한 투쟁을 멈추고 일주일 동안 쉬어서 그런지 이들의 얼굴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앞으로 누구의 아들이 남고, 누구의 남편이 공장을 떠날지 모르지만 이들은 서로 웃으며 식사를 했다.

 

하지만 그런 겉과 달리 속은 조금씩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정아 가족대책위원장은 "회원들이 조금씩 불안감과 우울증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남편들도 조금씩 답답함을 나타내고 있다"며 "이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젠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몸과 마음을 쉬며 보냈지만, 이제 조금씩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온다는 이야기다.

 

김아무개씨는 "아이들 학원 끊은 지 오래인데, 동네에서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도 종종 받고 있다"며 "경제적 어려움보다 남편에 이어 아이들도 따돌림 받는 현실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또 이아무개씨는 "그동안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로 살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막막하다"며 "남편이 자다가도 깨어나 한숨을 쉬는데, 정말 '큰일 날 결심'을 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다"며 눈을 붉혔다.

 

한 아내는 구체적인 걱정을 이야기하며 몸을 떨었다.

 

"회사에서 나간 뒤 자살하거나 몸이 아파 사망한 동료 노동자들 처지가 자꾸 생각난다. 잊으려고 머리를 흔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 우리 가족 모두 이젠 꿈을 이루려 사는 게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다."

 

이날 하루 가족대책위 회원들은 오랜만에 웃으며 떠들었다. 하지만 속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합의 엔진소리, 시민이 합께 합니다"라고 적힌 평택역의 현수막은 늦은 밤에도 힘차게 펄럭였다.

 

쌍용차 로고가 박힌 자동차는 13일부터 다시 세상에 나온다.


태그:#쌍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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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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