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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소요>겉그림
 <정원소요>겉그림
ⓒ 디자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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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학자 이동협의 <정원소요>(디자인 하우스 펴냄)는 '천리포수목원(태안)'의 사계절을 담은 책이다.

'소요'라는 느낌에 걸맞게 책의 내용과 사진들은 천리포수목원의 수많은 나무들과 꽃들, 이 나무와 꽃들에게 쏟아지는 아침햇살처럼 평화롭고 잔잔하다.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천리포수목원을 여유롭게 산책하는 느낌이 되어 마음은 한껏 여유로워진다.

그런데 이 잔잔한 여유로움을 한 번씩 뜨거운 감동으로 일렁이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천리포수목원 원장 고 민병갈(1921~2002)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자식처럼 키운 천리포 수목들은 몇 백 년 더 살며, 내가 제2조국으로 삼은 한국에 바친 마지막 선물로 남기를 바랍니다."
-천리포 수목원장 민병갈

미 육군 중위 '칼 밀러'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미군 장교로 우리나라와 첫 인연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25세,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식민지배와 뒤이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상처투성이인 아픔의 이 땅이 그에게는 아마도 '운명적인 사랑'과 같은 존재였나 보다. 부족한 것을 채워 상처를 함께 치유해야 할 그런. 남다른 인연으로 꽃을 피워 우리 가슴속에서 이렇게 함께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전역 이후 한국은행에서 일하며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간다. 그런 1962년 어느 날 휴가차 태안반도 만리포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천리포 바닷가 구석진 땅 6천 평을 사게 된다. 지금의 천리포수목원 본원에 해당하는 2만 평에 이른 것은 1970년.

그는 이렇게 사들인 땅에 작은 규모의 농원을 조성할 계획으로 해풍을 막고자 소나무를 심는다(1970년) 이것이 오늘날 천리포 수목원의 시초가 된다. 농원 조성의 작은 꿈은 이후 '수목원 조성'이라는 원대한 꿈이 되니 말이다.

그는 1979년에 '재단법인 천리포 수목원'을 설립, 수목원 조성의 꿈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해 미국인 칼 밀러는 대한민국에 귀화하여 최초의 귀화 남성인 한국인 민병갈이 된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과 열정을 바쳐'천리포 수목원'을 조성, 수목원을 비영리법인이자 학술연구기관으로 유지하다 2002년에 삶을 마감한다. 저자는 수목원 곳곳에 스며있는 민병갈 원장의 정원에 바쳐진 열정을 수목원의 사계절을 들려주는 틈틈이 들려준다.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천리포수목원의 나무들, 그 나무들의 일부 사진이다. 이 책은 사진으로 풍성하다. 사진만 보는 것으로 특별하게 행복해지는 그런 책이다. 그 사진 일부이다.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천리포수목원의 나무들, 그 나무들의 일부 사진이다. 이 책은 사진으로 풍성하다. 사진만 보는 것으로 특별하게 행복해지는 그런 책이다. 그 사진 일부이다.
ⓒ 이동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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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은 대한민국 최초로 민간이 설립한 수목원이고, 이후 식물원, 수목원 조성이라는 녹색문화사업의 선구와 표본이 되었으며…(중략) 민병갈 원장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민병갈의 정원-천리포수목원은 자신의 성장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서양식 실용'과 제2의 조국인 한국의 자연과 정원에서 느끼고 좋아했던 '소박한 격'을 함께 담고 있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더구나 수려한 서해 천리포의 해안 풍광과 '낭새섬'까지 끼고 있어 민병갈의 정원은 세계 정원사에 있어 유례없는 독특함을 갖고 있습니다.

국립광릉수목원이 1987년에야 문을 열만큼 정원문화의 성숙과 학문 연구가 뒤늦은 대한민국에, 1만 5천여 가지의 다양한 수종과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이제 만 40살의 성숙한 정원을 갖게 된 것은 오롯이 민병갈이 남긴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동과 베품의 마음 덕분입니다.-저자의 말 중에서

천리포수목원의 진정한 가치는 국가나 지자체, 기업 등의 목적과 예산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 전문가들의 설계와 집중적인 공사로 단기간에 조성된 것도 아니라는 것. 한 개인이, 그것도 귀화 한국인이 자신의 전 재산과 평생의 열정, 즉 온 삶을 다했다는 것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천리포 수목원의 목련은 무려 500여 종. 목련 외, 호랑가시, 동백 등의 다양한 개체 확보로 세계 수목학회와 미국 호랑가시협회로부터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증 받았다고 한다. 저자를 통해 만나는 천리포수목원의 '무늬원'과 '무궁화원' 또한 남다르다.

산수유축제, 벚꽃축제, 매화축제, 튜울립축제, 장미축제, 유채꽃축제…해마다 봄이면 우리 땅에서 열리는 꽃 축제들이다. 여름에는 연꽃축제, 가을이면 국화축제, 꽃무릇축제도 열리는 등, 꽃이 피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다양한 꽃 축제들이 열린다.

그런데 우리 꽃 무궁화를 주제로 한 무궁화 축제는 왜 없는 걸까? 관공서의 정원이나 공원 한 모퉁이, 가로수 한 부분, 학교의 화단 등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나라꽃 무궁화는 국가기관의 깃발이나 훈장, 상장 등을 통해서 만나는 형식과 박제의 그런 꽃?

천리포수목원의 무궁화는 무려 250여 종이란다. 나라꽃임에도 푸대접을 받는 무궁화의 안타까운 현실을 벽안의 귀화 한국인 민병갈 원장이 이 땅의 그 누구보다 먼저 깨닫고 이를 타개하고자 조성한 결과다.

그는 무궁화원을 조성하고자 1997년에 갓 박사학위를 취득한 무궁화 전공 신입사원을 뽑는다. 나라꽃 무궁화의 품종을 보전하고 관리, 육성할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신입사원과 함께 그가 흙을 새로 얹어 부지를 마련하여 무궁화원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당시 민병갈은 이미 병을 얻어 거동이 불편한 몸인데도 무궁화원을 가꾼다는 소명과 성취감에 뿌듯함을 얼굴에서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아직 텅 빈 땅이지만 제2조국의 나라꽃 무궁화가 끊이지 않고 가득한 동산을 그리며 행복했으리라.

책속 사진 일부
 책속 사진 일부
ⓒ 이동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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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나무들과 달리 캐나다박태기나무는 봄에 붉은 빛의 새잎을 내고 거꾸로 가을에 연두빛으로 물들다 떨어진다.-책속에서
 보통의 나무들과 달리 캐나다박태기나무는 봄에 붉은 빛의 새잎을 내고 거꾸로 가을에 연두빛으로 물들다 떨어진다.-책속에서
ⓒ 이동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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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는 지역인 천리포 본원은 약 2만평으로 수목원이나 식물원으로는 넓은 지역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같은 종류의 식물을 집단으로 군식하여 대형 화단을 만드는 일 같은 것은 없습니다. 대부분 틈틈이, 또는 홀로 피어 있지요. 도리어 그것이 새로 핀 꽃들을 더 도드라지게 하고 빛나 보이게 합니다.…(중략) 정원에서의 한나절의 느낌과 하루의 느낌,1년의 느낌, 그리고 해를 거듭하는 시간의 느낌들은 매번 다르고 또 새롭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101번밖에 다니지 않았다는 생각만 들 뿐입니다.-책속에서

6년 동안 계절을 가리지 않고 천리포수목원을 101번이나 찾았다는 저자는 천리포수목원의 경이로운 사계절을 눈부신 사진들과 함께 들려준다. 때문에 사계절의 새벽과 한낮, 해질녘, 그리고 한밤중에 저자와 함께 천리포 수목원을 산책하는 기분에 종종 휩싸인다.

일반인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은 천리포수목원의 비밀스런 곳들도 많이 알려준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만이 톡톡하게 얻을 수 있는 덤이다.

민병갈 원장의 천리포수목원에 바쳐진 삶과 열정은 몇 년 전 매스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천리포 수목원을 알고 있거나 다녀왔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수목원을 다녀왔다는 사람 중에는 '시시하고 볼 것이 없었다.'는 사람(내가 알고 있는)도 있다.

나 역시 2006년에 간월도를 다녀오는 길에 천리포 수목원엘 들른 적이 있다. 그런데도 수목원의 나무나 꽃들이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은 수목원을 나들이나 여행의 한 부분으로만 여겨 식물에 대해 더 알것 없이 눈에 보이는 꽃들 위주로 구경하고 말았기 때문인 것 같다(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한다).

조경학자인 저자는 천리포수목원의 곳곳에 식재된 나무의 특성과 함께 어느 계절 언제쯤 이 나무들과 꽃을 만나야 하는지, 어떤 계절 어느 즈음에는 어떤 나무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등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과 아울러 수목원을 제대로 만나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그런데 당장 수목원에 가지 못하더라도 풍성한 사진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런 책이다.

"올 여름 천리포수목원에서 하룻밤 머물며 수목원의 이른 새벽의 나무들과 풀꽃을 만나는 것은 어떨까요? 눈부신 아침햇살 속을 산책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원 소요 - 천리포수목원의 사계

이동협 지음, 디자인하우스(2009)


태그:#천리포 수목원, #민병갈, #낭새섬, #미국인 칼 밀러, #최초 귀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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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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