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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가 진행 중인 용산 4구역 현장. 지난 4월에 찍은 모습이다.
 철거가 진행 중인 용산 4구역 현장. 지난 4월에 찍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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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 12일 오후, 용산 남일당 건물 앞 농성천막에서 철거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비가 내린 12일 오후, 용산 남일당 건물 앞 농성천막에서 철거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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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는 모두 스물세 가구로 이루어져 있다. 세입자이지만 철거 전까지만 해도 한 가게의 사장님·사모님이었던 이들은 짧게는 4~5년, 길게는 40년 가까이 여기서 장사를 하며 아이를 낳고 길렀다.

이곳에 '재개발' 말이 나돈 건 재작년부터였다. 그러나 대부분 철거민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가끔씩 지나가는 유언비어일 거라고 생각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본격적으로 재개발조합이 들어설 때도 이렇게 빨리 철거가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용역업체 직원들이 가게 앞에 나타나 손님들에게 시비를 걸고 문 앞에 오물을 붓자 철거민들은 모여서 대책을 의논했고, 이럴 때 도와줄 만한 단체를 찾다가 전철연도 알았고 투쟁 조끼도 입게 됐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우릴 이해 못한다"

남일당 농성장에서 만난 석아무개씨도 용산에서 산 지 30년 넘은 터줏대감이다. 신발장사를 했는데, 한창 잘 나갈 때는 15평짜리 가게에 종업원도 둘 정도였다. 지금은 사라진 시외버스터미널과 중앙시장 덕분에 유동인구가 많았다. 그러다가 '메이커'가 많이 나오고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8년 전에 실내포장마차로 업종을 바꿨다.

남편 혼자 신발가게를 하다가 '먹는 장사'를 하면서 부부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휴일 없이 일하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는 "장사하는 사람이 다 그렇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석씨는 "말하면 속만 터진다"면서 포장마차 이야기도, 지금의 심정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얘기해봤자 다른 사람들은 왜 이런 싸움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이름도 내보내지 말라고 말했다.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는 것이다.

"대출을 받아서라도 돈을 모아서 세입자가 아닌 건물주가 됐으면 어땠을까"라고 물었을 때도 그는 "아이구, 정말 뭘 몰라"라면서 "그건 '엄마 아부지 6.25 때 라면 먹으면 되지 왜 굶었어?' 묻는 것과 똑같어,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석씨는 30년 넘게 용산에서 돈을 벌어 아이들을 대학에 보냈고, 아들도 장가를 보냈다. 그는 용산의 역사를 아이들의 성장에 맞춰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용산에서 장사를 했냐"는 질문에 "75년에 우리 딸 낳기 전부터니까 삼십몇년 했지"라고 말했고, "4구역 상권의 중심인 국제빌딩이 언제 세워졌냐"는 질문에는 "우리 애가 어렸을 때니까 80년대 초쯤 됐다"고 답했다.

석씨도 그렇지만, 세입자대책위에서 앞장서서 싸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농성장 식사 준비와 설거지도 이들이 돌아가면서 한다. 석씨는 "만날 두들겨 맞는데 싸우는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하다"면서 "남자들은 다른 일 해야 하잖아, 남편도 같이 하려고 하는데 내가 말렸다"고 말했다.

용산 남일당 1층은 희생자들을 위한 분향소와 철거민대책위의 방으로 이뤄져있다. 철거민들은 이 방에서 회의도 하고 밥도 하고 잠도 잔다. 12일 오후, 용산4구역 철거민이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있다.
 용산 남일당 1층은 희생자들을 위한 분향소와 철거민대책위의 방으로 이뤄져있다. 철거민들은 이 방에서 회의도 하고 밥도 하고 잠도 잔다. 12일 오후, 용산4구역 철거민이 점심 설거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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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4구역철거민대책위원장 유송옥씨도 여자다. 이충연 전 위원장이 구속된 뒤 새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유 위원장은 "나서서 하는 거 안 좋아하는데, 젊기 때문에 위원장에 뽑힌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도 구속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섭기는 하지만, 열심히 싸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유송옥 위원장은 "피곤한데도 5분, 10분마다 잠이 깨고, 가끔 집에 들어가도 언제 전화가 올까 싶어서 잠이 깊게 못 든다"고 말했다. 2~3일에 한번씩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가도 가족들이 이해를 해주지만, 야구를 하는 고1짜리 아들을 뒷바라지하지 못하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다.

유 위원장은 10년째 용산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4구역에서 편의점을 연 지는 5년 됐다. 국제빌딩 직장인과 주택가 주민들이 주된 손님이었다. 당시 인근에 이미 슈퍼마켓과 편의점이 다섯 군데 있었고, 단골을 잡는 데 3년이 걸렸다. 이 3년 동안은 아르바이트 직원 없이 '아기아빠'랑 둘이 12시간씩 교대로 일했고 주말에는 딸이 낮에 가게를 보기도 했다.

돌아서고 떠나가고... 찢겨나가는 용산 사람들

싸움이 길어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긴다. 남 생각할 여유 없이 각자의 처지가 절박한 생존권 싸움이면 더 그렇다. 그러나 아직까지 용산 철거민들 사이에서 큰 분쟁은 없다고 한다. 농성장 생활이나 일상적인 활동을 놓고 사소한 말다툼이 있는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30년 넘게 유지됐던 용산4구역 공동체는 이미 깨져 있었다. 같이 그날그날의 장사를 걱정하고 쉬는 날에 같이 놀러가기도 했던 이웃들은 '동지'가 되기도 했지만, 다른 방식의 싸움을 택하면서 나뉘기도 하고 일부는 아예 적으로 갈라졌다.

철거민 중 일부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법적 대응을 택했다. 이들이 민주노동당에 소송 방법을 문의하면서 당원으로 가입해 '민주노동당 용산세입자대책위'를 만들었기 때문에, 전철연 소속 철거민들은 이들을 '민노당 철거민'이라고 불렀다. '전철연 철거민'과 '민노당 철거민'은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왕래는 하지 않는다. 유 위원장은 "그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싸우는 거고, 우리는 별로 상관 않는다"고 했다.

또다른 철거민은 재개발조합 위원이나 용역업체 직원이 됐다. 석씨는 "30년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인데 이제 죽을 둥 살 둥 때리고 욕한다"고 말했다. 재개발조합의 부조합장, 감사는 모두 유 위원장네 편의점 단골손님이었다. 용산참사 희생자인 고 이상림씨가 나가던 교회 장로가 재개발조합장이어서, 그 때문에 부인 전재숙씨는 참사 이후 교회에 나가질 못했다.

유 위원장은 "언젠가는 이웃가게 주인이 건물을 철거하는 용역들에게 항의를 안 해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얼마 뒤에 용역업체 직원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유 위원장은 "그 사람들하고는 이야기 나눌 일이 없고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면서 "그래도 마주치면 마음은 복잡하다. 자기도 나름대로 생활하려다 보니까 그런 것인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같이 싸우다가 먼저 떠나는 철거민들도 생긴다. 장례도 못 치른 6개월, 그동안 정부는 물론 경찰도, 용산구청도, 서울시청도, 재개발조합도 공식적 대화와 협상을 제안하지 않았다. 철거민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세 가구가 대책위를 나갔다. 유 위원장은 "보상금을 받기로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미안해서 못 물어봤다고 했다.

유송옥 용산4구역철거민대책위원장.
 유송옥 용산4구역철거민대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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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는 사람 욕할 것 없다"

지난달 18일 참사 150일을 맞아 용산범국민대책위가 발표한 대정부요구안에는 '용산참사 특검법안 수용과 정부의 사과', '유가족들에 대한 배상', '구속자 석방' 등 참사와 직접 관련된 것도 있지만, '4구역 철거민세입자 대책 수립' 등과 같이 재개발 정책에 대한 것도 있다. 최소한 세입자들에 대한 임시상가 혹은 임대주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상대적으로 단기적인 요구안이라면, 후자는 그보다 장기적인 요구안이다. 용산참사에 대한 진실규명이 이뤄져 장례가 치러져도 용산 철거민들의 투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전철연 투쟁 중에는 수년간의 싸움 끝에 한두 가구만 남아서 임대주거단지나 상가를 얻어낸 성공 사례도 종종 있다. 용산의 싸움도 길고 지리할 것으로 보인다.

용산4구역 철거민들은 언제까지 싸울 수 있을까. '기나긴 용산참사 6개월'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유 위원장은 "길게 가면 3년이나 5년도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먼저 가는 사람 욕할 것도 없고 이해가 된다, 한번 마음이 떠나면 이 싸움 못한다"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것 아니겠느냐"고 담담하게 답했다.

30년 터줏대감 석씨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원래 혈압이 높았던 데다가 긴 농성 때문에 온몸이 쑤시고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용역업체 직원이나 경찰과 싸우느라 팔, 어깨 등을 다치는 일도 다반사다.

그는 "자식들은 말리는데, 내가 억울해서 못 그만둔다"면서 "우리한테 나온 보상금(가게마다 보상금이 다르다며 정확한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으론 어디 가서 가게 단 한 평 얻을 수가 없다, 평생 여기서 살았는데 어딜 가겠냐"고 말했다.

지난 6월 24일 고 이상림씨가 운영하던 레아호프(지금은 레아미디어센터로 운영되고 있다)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낸 '건강검진대상자 확인서'가 배달됐다. 고 이상림씨는 장례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사망신고도 못했다. 서류상으로 그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스물세 가구 용산 철거민들의 농성은 그렇게 6개월을 맞이하고 있다.

고 이상림씨에게 배달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 대상자 확인서'.
 고 이상림씨에게 배달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 대상자 확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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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용산참사, #철거민, #용산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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