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요샌 일어나자마자 정원, 텃밭, 농원을 한 바퀴 돌며 하루를 시작한다. 밤새 산돼지가 놀다갔는지 아침인사를 나누며 따다 남은 매실 도사리도 줍고, 한창 익어 몸을 풀고 있는 살구 떨어지는 소리도 듣는다. 예서 툭, 제서 툭툭. 선홍색 알몸으로 땅바닥을 그득히 뒤덮고 있는 살구 알들, 보고만 있어도 속심을 채워낸 넉넉함에 가슴 가득 시원한 바람이 일어난다.

 

살구나무는 앵도과의 활엽수로 연분홍색 꽃이 피어 아름다우나 예부터 집안에 귀신을 불러들이는 나무라하여 울타리 밖에 심는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밭둑이나 산언덕 빼기 귀퉁이에서 봄의 전령사로 피어난다. 살구꽃을 보면 사람들은 '벌써 봄인가' 하고 놀라 '의심'이라는 꽃말을 갖게 되었다.

 

행림(杏林)은 살구나무 숲을 말한다. "옛날 중국에 동봉(董奉)이라는 의원은 환자를 고쳐주고 치료비 대신 '살구나무를 심어달라고' 했다. 병이 가벼운 사람은 한 그루, 중환자는 다섯 그루를 심어 마침내 집 뜰에 10만 그루가 넘게 자라나 그 씨를 약재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행림'하면 '의원'을 이르는 말이다.

 

살구 씨를 '행인(杏仁)'이라 부른다. 지금도 실크로드 행상들에게 말린 살구 알맹이는 귀중한 양식과 약재 등 교역품목으로, 아폴로 13호 우주비행사의 심장강화제로, 비타민C를 함유하고 있어 식물성 영양 공급원으로 알려져 있다. 항암제, 기관지 천식, 변비, 폐렴, 기미주근깨, 수분조절 등에도 그 효험이 많다 한다.

 

'살구(殺狗)는 '개도 잡아 죽인다'는 뜻이다. 영양탕을 먹고 체하면 약이 없기 때문에 개고기를 든 후 살구 씨를 후식으로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가 하면, 스님들이 사용하는 목탁의 재료로 대추나무와 살구나무로 만든 것을 그 으뜸으로 치기도 한다. 살구나무 목탁 소리를 들으면 귀신이 줄행랑을 치고, 소리를 자주 듣다 보면 백팔번뇌가 사라지고 번뜩이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다 했으니….

 

오늘(7.7)은 본격적인 첫 여름더위가 시작된다는 소서(小暑)인데 비가 내린다. 비가 긋길 기다려도 내리고 또 내린다. 맨땅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비 맞은 살구들이 보고 싶어 우산을 쓰고 살구를 주워 담는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툭툭 떨어지는 살구알들.

 

살구 한 알을 입안에 털어 넣어본다. 터실터실 갈라진 진분홍 살점 속에 연분홍 살구냄새가 난다. 잘 익은 과육 맛, 참 오랜만에 대하는 천연의 맛과 향기를 맡아본다. '저 얼굴 붉어지는 것 좀 봐!' 얼마나 듣기 좋았던 말인가. 아직도 내 안에 붉은 무엇이 남아있을까. 굵은 빗줄기, 툭 툭 투득. 흘러간 세월 속에 붉은 마음들을 자꾸만 주워 담는다.

 

살구를 담노라니 몇 바구니나 그득 차오른다. 언제인 듯싶게 날씨도 활짝 개어 땡볕이 쨍쨍하다. 이 많은 살구들을 다 어찌할꼬. 살구들을 고물차에 싣고 골골을 돌아 한 바가지씩 안겨주고 돌아오는 길, 시한수를 읊조리다 앞산을 돌아본다. 어느덧 살구 빛 붉은 노을이 화악산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 전문

 

살구가 익어가는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등을 치고 지고 어느 집에나 들어서면 진분홍 살구냄새가 난다. 담 너머 살구나무 우듬지에 연분홍 살구향이 뽀얗게 피어오른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의 산촌일기'에도 함께합니다. 윤희경 기자(011-9158-8658)는 올 4월에 포토에세이 '그리운 것들은 산 밑에 있다.'를 출간한 바 있다. 유명서점, 인터넷에서 판매중이다.


태그:#살구, #행림, #행인, #살구주, #살구액기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