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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일본작가 온다 리쿠의 소설책 한 권을 읽었다. 그 책 안에는 그 출판사에서 출판한 온다리쿠의 책을 홍보하는 삽지가 있었다. 온다리쿠의 작품을 컬렉션 형태로 소개해놓은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 생각없이 버렸을텐데 한쪽 면에 온다리쿠의 사진이 있어 버리지 않고 책갈피로 썼다.

 

내친 김에 삽지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온다리쿠의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읽은 것도 있었고 읽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중 눈길을 끄는 한 작품이 있었다. <도서관의 바다>. 그리고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은 이렇게 씌여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고 아무 움직임도 없어 보이던 파도가 어느새 차츰차츰 다가와 어느덧 정강이를 적시고 내 몸을 삼키는 듯한 공포가 느껴진다' -<오마이뉴스>-

 

어라?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서평이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언젠가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에 서평도 쓴 기억이 난다.

 

'나말고 또 누가 오마이뉴스에 서평을 썼지? 내가 쓴 건 아닌데... 누가 썼는지 몰라도 꽤 멋지게 썼네... 누가 썼지? 아니 잠깐, 다른 서평이 있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 <도서관의 바다>에 관한 서평은 나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것은 아니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갸우뚱했다. 즉시 오마이뉴스에 들어가 조회해보았다.

 

 

내가 쓴 서평을 기억못하다니... '충격'

 

검색 결과, 놀랍게도 내가 쓴 것이었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정확히 2008년 3월 16일에 쓴 서평(관련기사 : 미스터리 소설보다 신문보는 게 더 무섭다)이었다.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쓴 서평을 어떻게 내가 몰라볼 수 있을까. 검색하는 순간까지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기사를 검색하자 보기좋게 내 기사의 중간 부분에 그 구절이 나왔다. 내가 쓴 기사를 기억못한다는 게 나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불과 1년하고 조금 남짓했을 뿐인데 어떻게 기억을 못할 수 있을까? 내 머리가 그 정도로 망가졌단 말인가? 하지만 온다리쿠가 작품마다 누누이 주장하듯 인간의 기억이란 믿을 게 못된다. 불완전하다.

 

출처의 원본이 내 기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 직후에는 출판사의 홍보삽지에 뽑혔다(?)는 사실에 찰나, 흐뭇했다. 그만큼 출판사측에서 눈여겨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후 차츰 서평을 쓰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 언제 어느 책의 어느 구절이 대표선수(?)로 쏙 뽑혀져나가 그 책의 이미지를 결정짓게 될까를 생각하면 마치 공중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약간의 불만도 가세했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중요한 한 구절이긴 했지만 그것은 작품 전체로 봤을때 앞뒤가 이어져야 이해가 가능한 구절이었다.

 

이전부터 이러한 서평의 신빙성 여부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특히 책의 뒷표지나 책띠에 나열되어 있는 서평, 특히 'Y**독자' '**존 독자' 이런 애매한 출처를 달고나오는 한 줄을 보면 속이 거북해졌다.

 

책띠의 주례서평, 어떻게 봐야 할까?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 팸플릿이나 신문광고에 줄줄이 달려 있는 주례서평, 그것도 단순히 아이디와 매체 이름만 달랑 게재된 그 존재의 신빙성에 대해 무한한 의심을 품고 있는 터였다. 따라서 이러한 글이 줄줄이 달린 책이나 영화일수록 별로 미덥지않다. 왠지 자꾸 '변명'을 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앞뒤 문맥을 전혀 이해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주최측의 마음에 드는 쏙 드는 한 구절만 발췌해 싣는 홍보문구는 위험하기까지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이후 최고의 소설' ID sojmer님

'이 책은 몇 번을 읽어봐도 놀랍다' 알라* 독자

'몇세기에 걸쳐 나올까말까한 영화.... ' 야후 dkrnwl님

'내 생애 이런 작품은 다시 없었다' '블로그slkfjwo'

 

이런 구절 다음에 '그러나...'라든지 '하지만...' '그런 건 둘째 치더라도...'라는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는 장담을 누가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라는 매체와 익명성이라는 특성이 만나 정체불명의 감상평을 수두룩하게 낳고 있다. 서평도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이런 무분별한 글들에 점차 눈도 무디어가는 실정이다.

 

어쨌든 평소 곱게 보아오지 않던 홍보 방식에 내 자신이 당사자가 되고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물론 주례서평은 아니다. 그 서평을 쓸 당시, 1년반 후에 출판사의 삽지에 실릴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도서관의 바다>라는 책을 읽었다는 것과 어떤 내용으로 썼는지 정도만 대략 기억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문장을 썼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책 내용도 가물가물한 실정 아닌가.

 

고통스러워도 서평쓰는 이유

 

내가 쓰는 기사와 서평은 상당히 주관적인 것일 뿐, 아마 앞으로 기억을 못할 수도 있고 나중에 읽어보았을 때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책띠나 책뒷표지에 깨알같이 씌여 있는 한 줄 감상문과 별다섯 개의 표식을 볼 때는 '과거완료형'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영향은 받지 말아야 한다. 괜히 그것 보고 샀다가 본전 생각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게 가장 편하다. <도서관의 바다> 한 줄 감상문을 보고 내가 느꼈던 것처럼.

 

그나저나 다시한번 <도서관의 바다>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번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 것인가. 서평을 쓴다는 건 이래서 부담스럽긴 하다. 쓸 때는 고통스러워도 어쨌든 이정표는 하나는 세워둔 셈 아닌가. 다른 '현재진형행'을 찾기 위해 한번 보았던 책을 또 한번 들춰보는 것도 아는 사람만 아는 책읽기의 매력이라 할 것이다.


태그:#서평, #도서관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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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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