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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로 숨진 고(故) 양회성씨
 용산참사로 숨진 고(故) 양회성씨
ⓒ 용산참사범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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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인 1월 20일 서울 용산에서 발생한 참사로 철거민 다섯 사람과 경찰특공대 한 사람이 숨졌다. 너무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이라 차마 죽음이라 부르지 못하고 참사(慘死)라고 부른다.

무리한 진압으로 참사를 일으킨 이명박 정부는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짓밟은 채 숯덩이 시신을 다섯 달이 넘도록 냉동고에 가두고 있으니 패악한 권력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용산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냥 죽은 게 아니라 탐욕의 뉴타운 재개발 삽날에 찍혀 죽었고, 막대한 이윤에 눈 뒤집힌 토건자본의 불쏘시개로 화염에 던져져 죽었고, 권력과 자본의 사냥에 쫓겨 망루에 올라갔다가 참혹하게 죽었다. 먹고 살려고 상경했던 양회성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향년 58세. 끝내 가족들과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이의 가난과 눈물과 희망이 화염에 휩싸여 숯덩이가 됐다.

부잣집 도련님과 일식집 '시다' 중 누굴?

"경찰과 용역깡패들이 물대포를 말할 수 없이 쏴댔는데 얼마나 춥고, 얼마나 무섭고, 또 얼마나 뜨거웠겠어요. 다섯 달이 넘도록 장례도 못 치르고 싸늘한 냉동고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춥겠어요." 용산참사로 남편 양회성씨를 잃은 김영덕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토해냈다.
 "경찰과 용역깡패들이 물대포를 말할 수 없이 쏴댔는데 얼마나 춥고, 얼마나 무섭고, 또 얼마나 뜨거웠겠어요. 다섯 달이 넘도록 장례도 못 치르고 싸늘한 냉동고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춥겠어요." 용산참사로 남편 양회성씨를 잃은 김영덕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토해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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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엔 식구(食口) 줄이는 게 급선무였다. 김영덕(여·54)씨도 가난한 살림에 한 입 덜려고 고향 해남을 떠나 상경했다가 전남 순천(승주) 사람인 남편 양회성(58)씨를 만났다.

아내 김씨 주변엔 결혼해달라고 조르는 두 남성이 있었다. 한 남성은 지방 명문고인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 명문대에 진학한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한 남성은 전라도 벽촌 출신으로 가난과 병고(아버지)에 찌든 집안에다가 6남매(4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일식집 주방보조 이른바 '시다'였다.

사당동에 있던 언니네 집에서 하숙하던 부잣집 도련님은 '동생과 결혼만 시켜주면 발가락에서 머리끝까지 금으로 싸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언니는 동생의 호강을 위해 결혼을 강권했다. 몇 번 한 데이트에서 자신만 받들어주기를 요구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이기심을 목격한 김씨는 학벌과 재물을 앞세운 청혼을 거절했다.

훗날 남편이 된 양씨의 구애는 애처로울 정도였지만 언니는 고생길 훤한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김씨 또한 양씨의 줄기찬 데이트 요청에도 퇴짜 놓다가 백년가약의 단초가 된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역 앞 세브란스 다방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일부러 어긴 김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퇴근하면서 들렀더니 우직한 사내는 사랑하는 여인을 종일토록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사내의 우직함과 성실함에 감동해 닫힌 마음을 조금 열었다.

열여덟에 상경해 보조로 일식집 종업원 생활을 시작한 양씨는 새벽 일찍 일어나 연탄불 가는 일을 시작으로 온갖 잡일을 하는 등 '죽을 둥 살 둥' 일했지만 고약한 주인을 만나 쫓겨난 적도 있었다. 오갈 데 없던 처지의 그는 남산 벤치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쓰레기통을 뒤져 수박껍데기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그렇게 죽을 고생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모은 돈으로 시골 부모님에게 전답을 사주면서 동생들의 공부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의 '시다' 월급이 2만5천 원이었는데 76년경에 200만 원이란 거금을 모아서 시골에 논밭과 집도 사주었어요. 남편은 자신보다는 부모님과 동생을 더 챙겼고, 상대를 배려하고 베풀 줄 아는 착한 사람이었어요. 재산을 본 것도 아니고 사람 성실한 것을 믿고서는 결혼하기로 작정하고 남편 고향을 찾아 갔는데 '먹고 살 만한 집안이다', '마당까지 차가 들어온다!'고 했던 남편의 말은 생판 거짓말이었어요."

'속았구나!'하고 가슴 쳤지만 마음을 준 뒤였다. 시댁은 장남인 남편만 보고 사는 매우 궁색한 처지였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난을 일으켜보리라 다짐한 아내 김씨는 보증금 20만 원, 월세 2만5천 원짜리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양씨네 큰아들이 서울 돈 다 굵어 모은다네!

용산참사로 숨진 다섯 명의 희생자들. 패악한 권력은 숨진 지 5개월이 넘도록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유족들을 피눈물 흘리게 하고 있다.
 용산참사로 숨진 다섯 명의 희생자들. 패악한 권력은 숨진 지 5개월이 넘도록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유족들을 피눈물 흘리게 하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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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당시 여의도 일식집 일류 요리사로 일하던 남편의 월급은 45만 원이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18만 원 정도였으니 매우 큰돈이었다. 낮이면 그의 빼어난 일식요리 솜씨를 맛보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였고, 밤이면 국회의원 등 고급 손님들이 모여들면서 주인은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5년 동안 돈을 모아 전세로 옮겼다. 그런데 순풍에 돛단 것 같던 인생 항로에 먹구름이 끼었다.

남자 주인과 동업하던 여자 '세컨드'가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돈을 굴려주겠다'고 꾀던 세컨드는 2부 이자를 4부로 배나 올려주었고, 이자 불려주는 맛에 빠져서 거금 600만 원을 맡겼다. 그만 아뿔사! 어제까지 장사 잘하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일식집을 팔아 줄행랑을 친 것이다. 받지 못한 월급까지 합치면 800만 원 가량 떼였단다.

게다가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일식집들이 개점휴업 상태가 되면서 남편은 1년간 놀았다. 친정집 오빠가 자신의 집에 와 살라고 형편을 봐주어서 전셋돈을 빼내 여의도에 일식집을 차렸다. 그때가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이었는데 주식 바람에 돈이 날리면서 하루 매상이 100~200만 원 가량이었으니 '장사하는 재미와 돈 모으는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허리가 휘도록 쌔가 빠지게 일해도 힘든 줄 몰랐다!'

자리 잡을 만한 상황에 집주인이 상가를 내놓았다. 아내 김씨는 남편을 달래서 은행 융자를 끼고 옆 건물의 23평짜리 상가를 샀다. 맨손으로 상경한 전라도 촌놈이 서울 중심 한복판에 상가를 산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양씨네 큰아들이 서울 돈 다 굵어 모은다네!', '여의도 땅 다 사 모은다네!' 부러움 섞인 소문을 퍼트렸다. 형편이 풀리면서 오빠 집에 얹혀살던 살림도 전세로 옮겼다. 일이 잘 풀리니 융자 갚는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인생 상승기에 또 다시 한 번 역풍이 닥쳤다. 상가 구입한 지 1년 뒤에 IMF가 터진 것이다. 월 100만 원이던 이자가 200만 원으로 배로 튀었고, 인건비는 상승했고, 야구(투수) 하던 고등학생 둘째 아들의 뒷바라지로 월 200만 원이 들어갔다. 매상은 줄었지만 지출 구멍은 휑하니 뚫렸고 이를 메우려고 카드깡과 현금서비스를 받았다.

빚에 몸서리치던 남편이 가게를 팔아 빚을 청산하자고 졸랐다. 김씨는 '어떻게 해서 마련한 가게인데…'라며 극구 반대했지만 부부싸움이 잦아지면서 가게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가를 팔아 치운 지 4개월이 지나자 부동산이 급상승하면서 수억 원이 올랐다. 속이 뒤집어졌다. 뿐만 아니다. 전세 1700만 원에 살던 동부이촌동 전세아파트는 700만 원만 대출받으면 살 수 있었는데 은행 빚에 질린 남편이 극구 반대했다. 2000만 원 대를 호가하던 아파트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8000만 원 대로 급상승했다.

속이 또 뒤집어졌다. 서울의 꿈을 향해 헉헉대며 오르막길을 달렸지만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여의도를 떠나 봉천동에다 일식집을 차렸지만 돈 벌기는 고사하고 4년 동안 2억 원을 까먹으면서 바닥을 쳤다. 손 털고 취직하려 했지만 쉰셋의 요리사를 쓸 일식집은 없었다.

살려고 오른 망루... 차디찬 냉동고에 갇힌 숯덩이 주검

참사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은 권력의 패악에 몸서리치며 피눈물과 한을 삼키고 있다.
 참사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은 권력의 패악에 몸서리치며 피눈물과 한을 삼키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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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도움과 고향집·전답에 대한 택지개발 보상금으로 2004년 용산에서 복집을 차렸다. 이번에 실패하면 재기불능이었다. 봉천동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시장조사를 꼼꼼히 하는 등 준비를 거쳐 장사를 시작한 결과 첫해 장사는 괜찮았다. 그런데 먹구름이 또 드리워졌다. 용산4구역 재개발에 의해 2006년부터 사무실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손님이 줄었다. 월급을 줄이려고 종업원들을 내보내고 두 내외 중심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양씨는 두 아들과 함께 일식집을 경영하는 게 여생의 소원이었다. 오순도순 장사하면서 부자지정을 나누고, 알뜰살뜰 운영하며 종업원 월급도 아낀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게 일류 요리사로 키울 작정으로 여행사 다니던 큰아들(31)과 야구선수 출신의 둘째아들(28)을 불러들였다. 그런데 마지막 소원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개발에 따른 보상금은 투자한 2억 원에 턱없이 부족했고, 용역깡패들은 가게를 부수고 행패를 부렸으며, 경찰은 뒷배를 봐주는 지옥 같은 형국이었다.

"'여기서 받은 보상금으론 구멍가게도 못 얻고 빚은 빚대로 남는다. 낼모레면 나이가 환갑인데 여기서 거지가 되어 쫓겨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렇게 한숨 쉬던 남편이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 활동을 시작했어요. 남편은 어디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싸우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으로 그저 두루두루 좋은 게 좋다는 성격인데, 무슨 싸움하러 올라갔겠어요. 처자식들과 먹고 살기 위해 망루에 올라간 것이지요."

구정(1월 26일)을 앞둔 1월 18일, 망루에 오르기 전날 두 아들을 불러 앉혔다. 과묵한 성격의 양씨는 평소와 달리 눈물을 흘렸다. 소주를 마신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예감한 탓이었을까? 비장한 당부는 결국 유언이 되었다.

'아버지가 내일 집을 떠나면 돌아오는데 한 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없을 때는 장남인 네가 가장이다. 늦지 말고 일찍 집에 들어오고 어머니 잘 보살펴라. 그리고 할머니(89세, 큰아들의 사망소식 모름)를 자주 찾아뵈어라.'

투박한 전라도 말씨로 구곡간장의 인생사를 덤덤하게 털어놓던 김씨는 남편의 참혹한 죽음에 이르러서는 참던 눈물을 터트렸다.

"(1월) 19~20일 이틀 동안 경찰과 용역깡패들이 물대포를 말할 수 없이 쏴댔는데 얼마나 추웠겠어요. 얼마나 춥고,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뜨거웠겠어요. 5개월 넘도록 장례도 못 치르고 싸늘한 냉동고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춥겠어요. 남편이 불쌍해요. 가슴이 아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라도닷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용산참사, #양회성, #장례, #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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