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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오면 개고생이다."

경남 합천의 원경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6월 22일부터 6월 27일까지 5박 6일간 집을 나와 175Km의 국토를 도보 순례하면서 겪은 고생담을 한 마디로 축약한 TV 광고 문구입니다.

장마가 올라오는 6월 하순에 원경고등학교는 마치 일상의 일처럼 체험학습을 시행하였습니다. 3학년들은 지리산으로 가서 종주하고 1학년들은 완도 청소년수련원에 가서 해양체험활동을 하였으며, 2학년 아이들은 합천에서 광주까지 "나를 이기고, 서로 도우며, 은혜를 느끼자"는 주제를 내걸고 국토 순례를 떠났습니다.

합천 원경고등학교의 국토 도보 순례 차량 현수막
 합천 원경고등학교의 국토 도보 순례 차량 현수막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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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합천에서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까지 걸어서 당도하고자 한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는 힘든 길을 걸으며 주저앉고 싶고 포기하고 싶을 때, 자신을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힘을 기르기 위한 '극기'입니다. 나를 이긴다는 것이 모든 것의 처음이니까요. 두 번째는 '협동'입니다. 그 먼 길을 혼자 가라고 하면 어찌 가겠습니까? 함께 가니 갈 수 있는 것이죠. 선생님들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서로 도우며 나아가는 길은 결코 힘들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다음은 '은혜'입니다. 고된 경계를 만나면 은혜를 느낍니다. 내 다리가 은혜롭고, 함께 걸어주는 동지가 은혜롭고, 모자가, 수건이, 나무 그늘이, 물이, 신발이 은혜로운 것입니다. 끝으로 '화합'입니다. 동서의 화합, 남북의 화합, 아니 내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 되는 모든 화합을 합천과 광주라는 상징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장맛비 속에 온통 젖은 원경고 국토순례단
 장맛비 속에 온통 젖은 원경고 국토순례단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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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는 날부터 장맛비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아무리 와도 출발을 미룰 수 없어 모두 비옷을 차려입고 길을 떠났습니다. 장대같은 비는 비옷을 비웃기라도 하듯 옷을 적셨고, 모두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서 합천 금양리 마을회관에서 첫 점심을 먹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다시 출발하여 합천에서 거창 넘어가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비가 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말끔하게 갠 하늘 아래 아이들은 비로소 비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오전에 젖었던 옷이 오후에 말랐습니다.

국토 순례 첫 날 밤은 합천 권빈리 마을회관에서 보냈습니다. 잠자리가 매우 불편하였지만 피곤하여 침낭을 뒤집어쓰고 금방 잠이 들었습니다. 둘째 날은 화창하고 습도가 낮았으며 바람도 적당히 불어 걷기에 참 좋았습니다. 둘째 날에는 합천을 벗어나 거창으로 진입하였고, 거창 춘전리 마을회관까지 30Km를 걸었습니다.

마을 정자에 모여 식사를
 마을 정자에 모여 식사를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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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도 여전히 구름 없는 맑은 하늘을 이고 걸었습니다. 햇살이 점점 뜨거워져서 선크림을 바르고 수건으로 목과 얼굴을 가려서 모두 복면한 것처럼 하고 걸었습니다. 3일째 되는 날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발바닥에 불이 나고, 발목이 시큰거리며, 무릎과 오금이 아프고 고관절이 피로해져서 아이들도 환자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셋째 날에는 거창, 함양을 지나면서 경상남도를 벗어나 처음으로 전라북도로 들어갔으며, 지리산 자락의 인월에서 무거운 다리를 쉬었습니다.

고가도로 아래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하며
 고가도로 아래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하며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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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은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4일째 되는 날이 되면서 더욱 피로해졌지만 절반을 걸었다는 생각에 끝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내리막길을 만난 것 같이 말입니다. 다른 날보다 조금 짧은 거리라서 한결 여유를 가지고 걸을 수 있었고, 쉬는 곳이나 점심을 먹는 곳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27Km를 걸어서 남원에 도착하였고, 원불교 남원교당에서 잠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다섯 째 날은 소설의 구성으로 보자면 절정에 해당되는 날로 남원에서 순창을 거쳐 담양까지 다른 날보다 15Km가 더 긴 45Km를 걷는 날입니다.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하여 10Km를 걸어가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10Km를 미리 걸어가서 확보해버린 것이죠. 그리고 점심을 먹기 전에 20Km를 더 걸어갈 계획으로 순창 고추장 민속 마을까지 힘든 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었습니다.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었습니다.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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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더운 날이라서 정말 고생길이 되었습니다. 가는 길에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팝의 황제가 가는 길이 어찌 그리 허망한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후 1시 무렵에 순창고추장 민속 마을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불볕더위가 계속 되었고 아이들과 교사들은 모두 지쳤지만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순창의 끝에 담양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더워. 시원한 물이 제일 좋았습니다.
 아이고 더워. 시원한 물이 제일 좋았습니다.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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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은 또한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담양으로 들어서면서 또한 전라남도로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은 담양이어서 안도하고, 메타세쿼이아 그늘을 보며 안도하였습니다. 윽, 그러나 그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길도 45Km를 걷는 아이들에겐 나중에는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지겨운 길도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길이 언제 끝나느냐며 투덜대는 아이들도 있어 우리는 모두 웃었습니다. 전국의 사람들이 누구나 오기 싶어 하는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도 처지에 따라선 지겨운 길도 될 수 있음을 또 깨달은 것이지요.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나며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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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앞으로 펼쳐진 메타세쿼이아 길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이들 앞으로 펼쳐진 메타세쿼이아 길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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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세쿼이아 길이 끝나는 곳에 숙소가 있었습니다. 가장 긴 길을 걸어온 아이들에게 선생님들은 삼겹살을 사와서 함께 구워 먹으며 긴 여정을 위로하였습니다.

이제 광주 5·18 묘역까지는 12Km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엔 학부모님들도 여러분 참가하여 함께 걸었습니다. 다시 장마가 올라온다고 하였습니다. 아침부터 흐린 날씨는 습도가 높은 후텁지근한 날이 되어 남은 길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사실 담양에서 광주까지 그 짧은 거리가 힘든 것이 아니라 어제 너무 먼 거리를 걸어와 힘이 다 빠져 있었던 거지요.

175km를 걸어온 발의 역사. 상처가 자랑스럽습니다.
 175km를 걸어온 발의 역사. 상처가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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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침내 끝은 있었습니다. 광주의 아픔, 시대의 아픔, 민중의 아픔을 안고 있는 광주 5·18 민주 묘역에 도착했을 때 그 감격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고, 다시 모두 숙연해져서 민주 영령들에게 깊이 묵념하였습니다.

이로써 장맛비 속에 합천을 출발하여 땡볕 속을 걸어온 5박 6일간의 긴 도보 여정이 끝이 났습니다. 함께 사진을 찍고 이 날을 기념하였습니다. 2학년 박상건 학생은 "이번 국토 순례를 통해 나를 이기는 계기가 되었다"며, "정말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일어났지만 목표가 있어서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광주 5.18 묘역에서 원경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국토 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광주 5.18 묘역에서 원경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국토 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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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이들은 무작정 걷기만 했을 수 있습니다. 주제가 어떻고, 화합이며, 은혜며 하는 말들을 내면화시키기엔 아직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겪은 바를 쉽게 잊지는 않겠지요. 몸의 기억은 머리의 기억보다 더 깊고 오래갈 것입니다. 고된 경험, 힘든 경계, 역경을 이겨내는 순간순간의 체험들은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내면에 쌓일 것을 믿습니다. 아이들의 세포 하나하나에, 잠재의식 속에 기억되었다가 정녕 또다시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극복해내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장맛비와 땡볕이 도리어 참 고마웠습니다.


태그:#국토순례, #합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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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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