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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좋았다. 어린 시절, 내가 흥미로워 하는 것들을 너무 아름답게 표현한 시의 어구를 노래하곤 했다. 시와 노래는 나를 어찌 표현할 줄 모르던 때에 부르던 노래였다. 학교를 다니고 시가 '분석' 되면서 시랑 멀어졌다. 시인의 마음이 그렇게 편협하게 해석 되는 데에 대한 반감이었을까. 나는 꾸준히 4개의 보기 중에 하나만을 고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시집을 왜 읽을까. 시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고모가 나에게 시집을 생일선물로 주었을 때 나는 고맙다고 가만히 받아다가 책장 구석에 깊숙이 묻어 두었다. 이후로 이사하면서 한번 만져 보았을 뿐 켜켜이 쌓인 먼지는 책장을 정리하는 대청소날이나 들려 치워지곤 했다.

 

이름도 모르던 새들의 지저귐이 어느덧 노랑머리할미새, 뻐꾸기, 쏙독새, 곤줄박이, 물까지 하며 멀리 보이는 그네들의 노랑, 파랑 색과 실루엣으로 제법 구분하여 부르게 되고, 마트에서 포장지에 써있는 줄만 알았던 나물들의 푸르고 싱싱한 본 모습을 보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그때 쯤, 시가 읽고 싶어졌다. 그들의 마음이 어떤 건지 와 닿는 듯 한 느낌이었고, 나도 내 감정과 주변의 작은 일렁임을 언어로 그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를 읽고, 써 보았다.

 

책을 구입한 것, 나의 호기심이자 작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시들이 가득한 작고 가벼운 시집은 우리 대중과는 멀어져 있는 그들의 세계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나에게 있는 '마음'과 '일'을 그린다.

 

답답하고 어둡기만 한 오늘의 이 땅에서 과거에 쓰여졌을 시는 오늘과 대비되며 은근한 쾌감을 불러온다. 이런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나.

 

 

 적막/ 박남준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샇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 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 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내가 기인하는 모체, 부모님. '피붙이'라 불리는 형제 자매. 옆집 이웃보다 더 멀기도 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그리움의 원인이기도 한 가족.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나과 내 가족의 관계만큼이나 설명하기 힘든 것이 또 있을까.

 

 서창, 해장국집/ 전성호

 

비 오다 그친 날, 슬레이트 집을 지나다가

얼굴에 검버섯 핀 아버지의 냄새를 맡는다

 

양철 바께쓰에 조개탄을 담아 양손에 쥐고 오르던 길

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언 손으로 얼굴 감싸쥐어도

겨울 새벽은 쉬 밝아오지 않고,

막 피워낸 난로 속 불꽃은 왜 그리 눈을 맵게 하던지

닫힌 문 작은 구멍마다 차가운 열쇠를 들이밀면

낡은 내복 속 등줄기 따라 식은 땀 뜨겁게 흘러내렸다

 

한달치 봉급을 들고 아들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마른 정강이를 이끌고 해장국집으로 갔다

푹 들어간 눈 속으로 탕 한 그릇씩 퍼담던 오후

길 끝 당산나무에 하늘 높이 가슴치는 매미 울음소리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껴안을수록 멀어지는 세상

 

우산도 없이 젖은 머리칼을 털며

서창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습기 찬 구름 한덩이 닫힌 창 밖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검버섯 핀 손등 위로 까맣게 아버지 홀로 걸어가신다

 

살다 허기지면 찾아가는 그 집

금빛 바늘처럼 날렵한 울음 사이로

까마귀 한 마리 잎을 흔들며 날아간다

 

'사람과 대화를 꿈꾸는 독자'를 위한 시집이라는 엮은 이의 말이 없더라도 시를 읽으면 '사람'을 느끼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농촌이 나이 들고 소외받고 있고, 도시에 쌓이는 빈부의 격차가 날로 커져 계급화 되고 있으며,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물'을 파헤치고 '공구리'를 처 바르고 있다. 노동자는 '인권'이 아니라 '부품'으로 취급받기 일쑤고, 그들의 이야기를 해볼라치면 그들과 동지가 되어야 할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거나 심지어 욕을 한다.

 

'고독'을 통해서 마음의 '고향'을 그리는 시를 통해서 마음을 위로받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한다는 것이 엮은이의 소박한 기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가 아닌 네가 울 때 나도 울고 네가 웃을 때 나도 웃을 수 있는 '연결'을 꿈꾸는 시집이다. 2000년도부터 발간된 창비시선 201부터 299까지의 관련 시들을 모아 엮었다.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박형준 외 엮음, 창비(2009)


태그:#창비시선, #시집, #사람을노래하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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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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