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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기 전에 <허삼관 매혈기>라는 고전스러운 제목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증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곧 만나게 된 책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풀렸다.

 

제목은 賣(팔 매), 血(피 혈)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단어였으며, 문자 그대로 허삼관이라는 남자의 매혈을 기록한 문학작품이었다. 즉, 피를 파는 한 인물의 가족사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었다.

 

피를 팔게 되는 소설의 중심인물 허삼관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버리고 다른 살림을 차려서 떠나버렸다. 홀로 남겨진 그를 돌봐주었던 할아버지와 삼촌이 있었지만, 이 사내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채 유년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 때문에 허삼관은 가족을 가지고 싶은 욕구와 함께 따뜻한 가슴을 지닌 어른으로 자라난다.

 

그는 피를 팔았다. 그는 피를 파는 대가로 얻는 돈을 가지고 그의 애정과 능력을 표현했다. 굳이 돈을 버는 것은 피를 팔지 않아도 할 수 있고, 현재의 기준으로 봤을 때 헌혈이라는 것이 큰 재산적 가치가 되지 않지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당시의 중국에서의 피의 가치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한 번 피를 팔면 삼십오 원을 받는데,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그렇게 많이는 못 벌지." (18쪽)

 

피를 팔 수 있는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결혼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여 고을에서 소문난 미인이었던 허옥란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 당시 허옥란은 하소용이란 인물과 연애 중이었으나 허삼관은 건강한 육체 이외에도 또 한 가지 내세울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장인을 설득했다.

 

"아버님께서는 옥란씨 하나뿐이시죠? 만약 옥란씨가 하소용에게 시집을 가버리면 허씨 집안은 대가 끊기는 거 아니겠어요? 저한테 시집오면 저야 원래 허씨니까 태어날 아이들도 모두 허씨 성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아버님 댁 자손도 이어지는 거지요."(44쪽)

 

첫 번째 위기

 

사랑하는 아내와 세 명의 자식을 낳고 단란한 가정 꾸리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한 차례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첫째 아이인 허일락이 옛 애인 하소용의 자식임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자라 대가리'라는 놀림을 감내해야 했다.

 

허삼관은 이 사건으로 자신이 원하던 가정이 무너짐을 느끼고 쓰러지나 싶었다. 허나 그는 강한 남자요. 강한 남편이며, 강한 아버지였다. 비록, 그는 처음에는 일락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것을 누구보다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그였기에 결국 일락이를 친자식처럼 보듬어 안는다.

 

"일락아,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 (205쪽)

 

두 번째 위기

 

그들에게는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그것은 바로 악명 높다던 '문화대혁명'이었다. '문화대혁명'은 그의 아내 허옥란에게 칼날을 세웠다. 문화대혁명의 주역이었던 홍위병들은 아내에게 단돈 이 원에 몸을 파는 기생이라는 죄를 씌우고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했다.

 

그리고 세 아들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어머니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허삼관은 가족 간의 비판투쟁대회를 통해서 자신도 불륜을 저질렀었다면서 자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하고 임분방은 딱 한번 뿐이었다. 너희 엄마하고 하소용도 마찬가지고, 오늘 내가 너희한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엄마하고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걸 너희가 알았으면 해서다. 너희가 만약 엄마를 증오한다면, 나도 마땅히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 엄마랑 똑같은 놈이니까" (237쪽)

 

세 번째 위기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는가 싶더니 또 위기가 찾아온다. 정부 정책에 의해 자식들이 뿔뿔이 농촌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전에 <홍위병>이라는 책을 통해서 농촌으로 강제로 이동했던 어린 학생들의 생활을 접한 적이 있었기에 고된 노역에 지쳐서 등장한 일락이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시 험한 곳으로 내몰아야 하는 가슴 아픈 아버지 허삼관은 피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그에게 전달한다. 

 

"전부 가져가거라. 이건 내가 방금 피를 판돈이니 다 넣어둬라. 이 안에 이락이 몫도 있다. 이 돈을 함부로 낭비하지 말고 아껴 써야 한다. 피곤해서 식욕이 없을 때 맛난 걸 사먹고, 명절 때 담배 두 갑하고 술 한 병쯤 사서 너희 생산대장한테 갖다 줘라. 그래야 적당한 때 널 배치해주지 않겠니?"(246쪽)

 

그 동안 결혼을 위해, 옛 사랑을 위해, 친자식들을 위해 피를 뽑았던 그는 드디어 일락이를 위해서도 그의 힘을 그리고 사랑을 전달한다. 그리고 피를 뽑아 낸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또 그의 아들을 위해서 피를 뽑아야 했다.

 

"이 원으로 어떻게 식사 대접을 하느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락이네 생산대장인데, 식사대접이 시원찮아서 기분이 언짢아지기라도 하면 이락이가 당장 힘들어질 거 아냐. 하루빨리 돌아오는 건 고사하고 거기서도 고생이 심해질게 뻔한데"(247쪽)

 

아내의 푸념 섞인 목소리와 함께 그는 또 한 번 피를 뽑는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수혈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 생산대장이 권하는 술잔을 마다않고 마신다. 피를 며칠 사이에 두 번씩이나 뽑아낸 그가 술을 이겨낼 리 만무했다.

 

술을 세 잔째 털어 넣은 다음부터는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먹은 술이 거꾸로 넘어올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문가로 뛰어가 웩웩거리며 토를 했다. 허리에 경련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몸을 일으켜 세울 수조차 없어 그대로 쪼그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일어나 입을 닦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262쪽)

 

아……. 부성애란 이런 것이던가? 자식을 위해 제 한 몸 돌보지 않았던 허삼관의 행동을 보면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기 싫다고 하던 장남 일락이를 억지로 보냈던 것이 결국 화를 불러왔던 것이다.

 

마지막 위기

 

이락이는 곧 죽을 모습을 한 일락이를 들쳐 메고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큰 병원에 가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아버지 허삼관은 이웃집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면서 치료할 돈을 구걸했고, 그토록 싫어하던 하소용의 집에까지 찾아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또 다시 피를 뽑으러 나선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두 번씩이나 피를 뽑았던 그에게 또 다시 피를 뽑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다른 지방의 병원을 찾아가라고 일러준다. 가까운 시기에 두 번의 피를 뽑았던 그의 몸 상태는 형편없었지만 그에게는 몸을 돌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허삼관은 여러 곳에서 피를 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에겐 자신의 안위보다 자기 자식의 안위가 더 소중했다. 그는 한번 피가 뽑힐 때마다 죽음과 가까워짐을 경험했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피를 뽑아냈다. 그러는 그를 보면서 한 노인은 그를 걱정했지만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야 내일 모레면 쉰이니 세상 사는 재미 다 누려봤죠. 이제 죽더라도 후회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라 사는 맛도 모르고 장가도 못 들어봤으니 사람 노릇 했다고 할 수 있나요. 그러니 지금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지……. (291쪽)

 

그는 연거푸 세 번의 피를 뽑아냈다. 하지만 세 번째의 피를 뽑았을 때 그는 의식을 잃었고 그가 뱉어냈던 피와 더불어 훨씬 많은 피를 수혈 받아야 했다. 더 이상 그에게는 피를 뽑아낼 능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해 줄 수 있었던 힘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보충 받은 피와 남아있는 돈을 어떻게든 아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한 뱃전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희망…….

 

사실 그는 어떻게든 돈을 아끼기 위해서 노를 젓는다는 거짓말을 하고 배를 탔다. 그러나 노를 만져보지도 못했던 허삼관의 거짓은 곧 들통 났다. 그러나 배의 주인이었던 래희와 래순은 두 형제는 그를 내쫒지 않는다. 그리고 큰돈이 된다는 허삼관의 꾐에 넘어가 셋이서 피를 뽑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에 피를 뽑아낸 그들은 자연스레 친해졌고 허삼관의 과거사를 알게 된다.

 

그들은 허삼관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피를 허삼관에게 내어주면서 그를 도와준다. 그들 역시 남을 도울 줄 아는 가슴 따듯한 사내였던 것이다. 허삼관의 정성에 아마도 하늘이 감복했기 때문에 래희와 래순과 같은 청년들을 만나게 해준 것이리라.

 

"방금 우리 피가 아저씨 피보다 진하다고 하셨죠? 우리 피 한 사발이면 아저씨 피 두 사발이라구요. 우리 세 사람 피는 모두 동그라미 형이니까.치리바오에 도착하면 아저씨가 우리들 피를 사세요. 우리한테 한 사발 사서 병원에 두 사발로 팔면 되잖아요?" (312쪽)

 

결국 그는 이웃들의 도움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청년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노년으로 급작스럽게 넘어간다. 노년의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피를 뽑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갑자기 피를 뽑은 후에 매번 먹었던 돼지간볶음과 황주가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것을 먹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으나 늙은이의 피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쓴 소리를 듣는다. 이제 그의 피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그와 동시에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그에게 있어서는 피라는 것이 사랑이었고 힘을 베풀 수 있는 매개물이었는데,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애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의 뒤에는 성공한 세 아들이 듬직하게 버티고 있었으며, 사랑하는 아내가 그의 편이 되어주었다. 그는 젊은 날 바쳤던 사랑에 대한 보답을 확실히 받는 일만 남아있었고, 그의 가족은 그것을 누릴 힘이 있었다.

 

이렇게 이 책은 모든 위기와 갈등이 해결되고 평화가 찾아오면서 끝났다. 바로 전에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과는 달리 이 책은 착한 사람이 반드시 결실을 얻는다는 권선징악의 구조로 되어있었고, 나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 전개가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뿌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결말이야말로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동양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 곳곳에 숨겨져 있는 해학적인 표현 역시 동양의 맛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만 고전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용도 고전스러웠으며, 나는 그 맛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허삼관! 이 개자식아, 너 어디로 도망친 거야. 난 아파 죽겠는데, 넌 어디로 도망간 거냐구……. 이 칼 맞아 뒈질 쌍놈의 자식 같으니라구. 빨리 와서 내가 힘쓰는 것 도우란 말이야. 더는 못 참겠어. 허삼관, 너 빨리 안와? 의사 선생님, 애가 나왔나요?"

 

"두 번째 출산인데도 이 난리군." (51쪽)

 

"그러니까 애들 이름이 일락, 이락, 삼락이지. 내자 분만실에서 고통을 한 번, 두 번, 세 번 당할 때 당신은 밖에서 한 번, 두 번, 세 번 즐거웠다 이거 아냐?" (52쪽)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푸른숲(2007)


태그:#허삼관 매혈기, #위화, #푸른숲, #단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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