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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재 만화가
▲ 나병재 만화가 나병재 만화가
ⓒ 박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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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국만화가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만화의 시작이라 일컫는 이도영 화백의 만평이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지 꼭 100년이 지났으니, 한국만화가 어느새 한 세기를 뛰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초라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1만 부 이상 판매되는 만화는 가뭄에 콩나듯 하고, 젊은 작가의 등용문이 되었던 만화 잡지 수도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줄었다. 작가의 수익을 앗아간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나마 만화 유통의 안전판(?) 구실을 하며 한때 2만 개 이상 성업하던 도서 대여점마저 이제 3000개 이하로 줄어 들었다…" (<시사IN> 제92호 6월 20일, 한국만화 100년 중)

문제는 무엇이고, 희망은 또 어디에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전주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나병재(35) 만화가를 찾아갔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습작용 종이, 수북이 쌓여 있는 종이컵, 자욱한 담배연기,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 등. 나병재 만화가의 화실을 찾아가는 도중 떠올랐던 이미지다.

전주시 웨딩의 거리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자를 눌러쓴 그가 미소로 반겼다. <굳세월아 군바리><러브스터디><나두야 간다>의 작품으로 유명(?)한 나병재 만화가는 다음 달까지 마감해야 하는 단행본 작업으로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줬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는 작업 중이던 만화 캐릭터의 모습이 띄워져 있었고, 책상 여기저기에는 손으로 그린 몇몇 만화가 붙어 있었다. 떠올랐던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만화가 화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한잔 하실래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다.

2001년, 영점프 신인만화 공모전 통해 데뷔

올해 나이 서른 다섯. 전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한 나병재 만화가는 중학교 때부터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화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써가는 과정이다. 그에게 만화는 천직이었다. 하지만 만화가의 꿈은 쉽지 않았다. 당장, 전문적으로 만화를 배울 곳이 없었다.

"지금이야 만화학과가 많지만, 제가 대학교에 진학할 당시만 해도 만화학과 자체가 없었어요. 유일하게 공주전문대학교에 만화학과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전문대라는 게 조금 걸렸죠. 형님께서 만화가라는 장래는 조금 길게 보고 우선은 4년제를 마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조언해주셔서 전북대학교에 들어가게 됐어습니다."

전북대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대학 진학 후에도 만화삼매경이었다. 오죽하면 강의 시간에 만화를 그려 교수님들로부터 혼나기까지 했을까. 이곳저곳에 만화를 개제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만화를 꾸준히 그려오던 그는 2001년 9월 <그녀 탑승>이라는 단편만화로 서울문화사 영점프 신인만화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프로만화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아~! 정말 좋았어요. 세상이 다 바뀔 거 같았죠. 그때 상패가 제 보물 1호에요. 그런데,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됐어요. 그 이후를 생각하면…."

여기서 그는 담배하나를 물어 피웠다.

"휴…. 제가 데뷔한 다음해인 2002년이 만화잡지의 끝물이었어요. 냉혹한 현실과 직면하게 된거죠. 일단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없으니까 불안정하고 힘들죠. 그래도, 뭐 난 만화가 좋으니까, 그렸던 거에요."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는 그는 약 2~3년 전,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만화를 계속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 나라가 '돈 돈 돈' 하잖아요. 주위에서 '스탠다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 역시 그렇게 살도록 강요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만화가로서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래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일하면서 열심히 살려고요. 또 열심히 하다보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거든요."

예술가들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게 있어야 '영혼을 울리는 뭔가'(?)가 나온다는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만화를 그려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만화 100년?, 돈에 따라 작품 좌우되는 현실 경계해야"

나병재 만화가
▲ 나병재 만화가 나병재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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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의 희망은 만화시장이 몰락하는 가운데서도 만화를 접할 기회는 시시각각 늘어나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있다. 컴퓨터를 켜면 포털 사이트 초기 화면에 늘 인기 작가의 연재 만화가 뜬다. 강풀 씨나 강도하 씨처럼 페이지뷰가 수천만에 이르는 작가들이 제법 많다…." (<시사IN> 제92호 6월 20일, 한국만화 100년 중)

심각한 사회적 냉대와 만화강국 일본과의 경쟁에 맞서 성장해온 한국 만화는 최근 어려운 현실의 대안으로 온라인 시장이 각광받고 있다. 이른바 '웹툰'이다. 나병재 만화가 역시 종이만화를 고집해오다 웹툰 연재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 경우다. 협소한 시장의 돌파구였던 셈이다.

"사실 저는 약간 클래식하고 고전적인 면이 있어서 종이만화를 고집했어요. 예전에 종이를 넘기며 만화를 보던 그 맛을 잊을수가 없어서 그랬죠. 하지만 뭐 지금은 웹툰도 그리고 있어요. 왜냐면 중요한 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느냐 거든요. 그 유통경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종이로 그리든 온라인에 연재하든 만화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가 중요한 거죠."

그는 일본에 비해 한국 만화시장이 어렵다는 말에 대해서도 나름의 생각을 밝혔다.

"일본은 매우 특수해요. 시장이 엄청나잖아요. 그에 반해 우리나라 만화시장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시장규모만 놓고 봤을 때 우리나라는 만화 4대 강국이에요. 100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력과 저력이 있다는 거죠."

다만 그는 최근 '돈' 위주로 만화가 그려지는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기획자 입장에서 순간적으로 돈이 될 수 있는 작품만 기획하고, 또 작가들은 그에 따라 만화를 그리고, 뜰 수 있는 소재만 찾는 다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결국은 만화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게 나병재 만화가의 생각이다.

"돈에 따라 작품이 좌우되는 구조가 돈키호테 만화가가 나올 수 없는 현실을 만드는 거죠.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이런저런 다양한 만화가 바탕이 돼 있어야 대박 만화와 재미있는 만화가 나오는 것이거든요. 일본은 그런 만화의 장르적인 다양성이나 이야기의 다양성이 보장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앞서도 얘기 했듯이 단기간에 돈이 될 수 있는 작품 위주로 만들어지는 현실이다 보니...."

그는 조금 더 멀리 내다보고 긴 호흡으로 만화계의 현실을 전망하는 것이야 말로 한국만화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사람 사는 이야기, 희망 메시지 전달하고파"

어쨌든,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나병재 만화가 역시 마찬가지. 어려운 현실의 벽 앞에서 만화가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던 그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는 현재 창작만화 보다는 시장의 규모가 큰 학습만화 쪽으로 잠깐의 외도(?)를 하고 있다.

"저도 20대에는 사각형의 틀에서 벗어난 사이코 같은 작품들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역시 먹고사는 거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학습만화를 그리고 있는데, 어느 정도 안정적인 경제적 조건이 갖춰지면, 그때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창작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그가 그리고 싶은 만화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전작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취업준비생의 이야기를 담은 <나두야 간다>, 행복하지 않은 사랑이야기 <러브스터디>, 자동차를 소재로 한 <CAR-toon> 등. 그는 주변의 일상을 섬세하게 그리면서도 또한 희망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픈 욕심이 있다. 이는 그리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걸 보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그의 만화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만화가로 허영만 작가와 양영순 작가를 꼽았다. 번뜩이는 재치와 함께 타고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이유다. 나병재 만화가 역시 만화를 그림에 있어 '스토리'에 비중을 많이 둔다. 물론, 최근에야 만화 스토리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만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분업화가 이뤄지기도 하지만 그는 이런 구조는 만화를 빨리 만들어내려는 산업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생각하는 만화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만화를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토리에 비중을 더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 만화를 보고 '재미있다'라고 얘기해 주는 것은 '그림'보다는 '이야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 재미있다는 반응이 오면 정말 좋아요. 미칠 거 같아요. 만화가 하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유독 돋보이는 몇몇 만화를 보다보면 정말 그는 만화가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만화 기획사와 출판사가 모두 서울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 지역에서 만화를 그리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 지역만화가로 살아가는 그의 일상을 더듬어 보자.

"지역에서 만화 그리는 일, 만만치 않다"

"저는 오기가 있어요. 내가 여기서 태어났고, 내 가족과 친구들이 여기에 있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서울에 올라가요. 여기서도 할 수 있다는 거를 보여주자. 그런 오기로 지역에 남았죠."

만화 출판사와 기획사가 서울에 몰려있는 까닭에 지역에서 만화를 그리던 작가들도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처지다. 그만큼 일을 따내거나 같이 일을 진행함에 있어 지역보다는 서울에 있는 게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서울과 부천에서 작업을 할 경우에는 정부에서 작업실을 싼 값에 마련해주거나 인터넷 사용료 등을 면제해주는 등 혜택도 뒤따른다. 만화가에게 있어 지역은 전혀 메리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병재 만화가는 지역에서 만화를 그린다. 왜냐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오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에서 만화를 그리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위에서도 하나 둘 서울로 떠나는 사람이 생겼다.

"문제는....우선 지역에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인구가 적다보니 확률적으로 만화를 하는 사람이 안 덜 생기잖아요. 그러면 만화를 하는 입장에서는 같이 얘기할 사람이 없는 거에요. 인터넷이 발달했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오가는 정보나 그런 게 있는 건데, 여기선 만화가들 끼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거죠."

2001년 <그녀탑승>으로 데뷔한 나병재 만화가는 현재 9년째 전주에서'만' 만화를 그려오고 있지만 그 역시 서울로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아우~ 올라가고 싶은 마음 많았죠. 정부에서 만화산업에 투자와 지원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지역에서는 그런 지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저도 신청서만 내면 작업실 지원 같은 거 받아서 올라갈 수 있지만, 그래도 굳이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요. 난 여기가 좋은데, 그걸 버리고 올라가기 그렇다고요. 아니, 서울 올라가면 제가 좋아하는 전주 막걸리 못 마시는 거잖아요~ 하하~"

다만, 나병재 만화가는 저마다 사정이 있고, 또 큰물에서 큰 꿈을 꾸며 사는 것은 개개인의 차이라며, 서울로 올라가는 것을 무조건으로 비판할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본인 역시 때때로 욕심이 생기지만, 자제하는 마음으로 그 욕심을 다스린다고 한다.

슬럼프, 권투로 극복한 사연

권투를 통해 만화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울 수 있었다는 나병재 만화가(왼쪽)
 권투를 통해 만화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울 수 있었다는 나병재 만화가(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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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4년 전, 한국 만화시장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나병재 만화가는 만화를 계속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벽에 부딪혔다. 그는 술로 답을 찾으려 했다. 매일 마셨고, 매일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몇 달…. 그의 표현을 빌려, 그는 점점 '폐인'이 돼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시기에 만화를 연재하던 한 잡지에서 '중단'을 선고 받았다. 직업에 대한 불안감이 현실화돼 그를 휘감았다. 기댈 곳은 술뿐이었다. 그렇게 3달.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무너졌다.

"나는 만화를 좋아하는데, 왜 만화가 나를 힘들게 할까. 술로 해결했죠. 일어나면 술 먹고, 술기운에 다시 자고, 그렇게 3달 폐인생활을 하고 아니, 이건 아니다 싶은 거예요. 바꿔보고 싶었어요. 나약함과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죠. 제일 힘든 운동이 권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체육관을 찾아 1주일에 6일씩 미친 듯이 운동을 했습니다."

자신은 만화에 '올인'했지만 돌아오는 게 없었던 까닭에 그는 상실감과 허망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운동이었다. 그가 선택한 권투를 통해 그는 잡념을 버리고, 몸을 다시 만들었다. 정신도 회복됐다.

"침울하게 빠져있던 마음을 회복한 게 가장 큰 성과에요. 확실히 결론도 내렸죠. 비록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도 일단 만화를 그리자. 내가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자. 럭셔리한 삶은 다음 생애에 누리고, 이번 생애에는 그냥 전주에서 만화 그리면서 살자. 이게 제가 내린 결론이었어요."

만화를 꿈꾸며 지역에 살다

만화가 나병재는 누구?
2001년 서울문화사 영점프 신인만화상 수상
2002년 굳세월아 군바리 단행본 출간
2004년 경향신문 '러브스터디' 연재
2005년 스포츠 칸 '나두야 간다' 연재
2006년 코믹뱅 'CAR-toon' 연재
2007년 씨네21 '팝툰' 연재
2007년 부천만화정보센터 '스토리 풀' 우수상 수상
2008년 동아, LG, 국제 디지털 카툰 공모전 대상 수상
나병재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skqudwo)
마음을 다잡은 그는 지역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살아가기로 했다. 운명에 맞서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는 그에겐 1순위기 때문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가까이에 있는 만화가랑 작업 하는 게 편하잖아요. 여기 있으면서 서울에 있는 기획사나 출판사랑 손잡고 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래도 못할 건 없어요. 전주서 서울까지 3~4시간이면 가잖아요. 물론 일은 많이 못 따지만 발품을 팔면 안 될 것도 없는 거죠."

나병재 만화가는 현재 대중적으로 '대박'을 친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각종 잡지와 신문에 만화를 연재해 오고 있는 '실력파'다. 지난해에는 '동아, L·G, 국제디지털카툰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만화를 그렸을 때 희열감 같은 게 있어요. 이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굳이 돈에 연연하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거, 바로 만화 그리는 일을 계속 해 나갈 생각이랍니다."

평소 엉뚱한 생각을 통해 기발한 만화의 아이디어를 생산해 낸다는 그는 요즘 부쩍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상상력이 줄어드는 거 같다며 고민을 내비쳤다. 그렇게 고민이 생길 때면 언제나 찾는 다는 전주 막걸리. 지역에 그와 같은 만화가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만화처럼만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만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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