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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기를 앞둔 밀밭이 황금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수확기를 앞둔 밀밭이 황금물결로 출렁이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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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5일) 아침 르포 형식으로 된 정만진 기자의 '우리 밀 지키는 사람들 1' 기사에 내 눈이 멎어 있었다. 대구에서 '우리 밀 할매 손칼국시' 집을 운영하며 우리밀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는 김월자씨 이야기였다. 우리 밀을 지킨다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건지 실감하는 내용이었다.

'우리 밀'! 왠지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어 마치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 온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 밀의 작농과 그에 따른 단편적인 추억을 톺아보고자 한다.

기사 내용에서처럼 지금 우리나라 땅에 우리가 직접 밀 씨를 뿌려 밀농사를 짓는 농가는 흔치 않은 것 같다. '흔치 않다'는 말은 완곡한 표현일 뿐 방방곡곡을 뒤져 살펴보기 전에는 만나기 힘든 실정이다.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에는 여름 양식을 위하여 시골의 거의 모든 농가가 밀농사를 지었었다. 농사를 짓는 데에는 그 농사를 처리해야 할 농기구가 필요하다. 사회가 현대화 되면서 농기구의 발달도 그에 걸맞게 향상되어 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맥(麥)류 농사의 경우, 보리농사든 밀농사든 일차적으로 가장 기계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 탈곡이다. 기계화 되어있지 않던 60년대 이전 재래식 농기구로는 현대 농사를 소화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옛날에는 '자리개질'이라 하여 절구통 등을 뉘어 고정시켜 놓고 한 아름씩 묶은 보릿단 밀단을 지게꼬리 등의 단단한 끈으로 얽어 팔뚝에 감아들고 절구통 한가운데에 태기를 쳐 낟알을 뽑아내는 것이다.

여름날 육신을 크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므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땀에 젖게 마련이고 덧붙여 보리나 밀의 까락이 파고들어 살갗을 괴롭힌다. 중의 적삼은 땀으로 몸에 감겨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가 일쑤다.

현대인들이 이 과정을 겪으며 그 같은 농삿일에 매달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필연적 욕구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안겨주는 듯. 그런 이유로 농업 국가였던 농촌에 농기계는 자연스레 보급되었고 마을마다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푸르륵거렸다.

탈곡된 밀은 특별한 용도를 제외하고는 빻아서 가루를 내어 보관하게 된다. 이를 처리할 방앗간도 마을마다 있다시피 했다. 이렇게 태어난 밀가루는 반죽되어 '종잇장같이 밀어서 실낱같이 썰어서'라는 속담을 낳고 국수를 만든다.

한 여름, 과실나무 그늘이 있는 마당가에 멍석이나 들마루를 펼쳐놓고 이웃과 가족들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며 후루룩 후루룩 국수를 먹는다. 아무 부담 없는 음식이었다. 이제 그런 풍경은 먼 옛날 추억으로만 남았다.

80년대 초중반 수매중단, 탈곡기는 무용지물, 방앗간은 사라져

여기에 지난 80년대 초중반 수매중단이 되고부터 밀농사는 사양길을 걷다가 마침내는 단농(斷農)이 되고 말았다. 보리농사도 마찬가지지만 밀농사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하면서 농민들이 밀농사에서 손을 떼고 만 것이다.

마을마다 돌아가던 탈곡기는 무용지물이 되어 몇 년 동안 동네 고샅에서 녹슬다가 고물장사의 손에 넘어간다. 정미소를 겸했던 방앗간도 하나 둘 사라져 쉽게 이용할 수도 없게 되었다. 밀농사를 짓고 싶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예에 있을 터이다. 이렇듯 우리 밀 농사는 낭만적 정서를 품고 이 땅에서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농촌을 가볍게 본 정부 정책의 무관심과 오류가 불러온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대신 온 나라에 표백제나 방부 처리된 수입산 밀가루가 판을 덮고 있다. 봉지를 뜯고 몇 달을 두어도 상하지 않는단다. '쥐가 다니는 길목에 그 밀가루를 뿌려두면 쥐가 그걸 먹고 죽을' 정도라니 그 밀가루의 가공할 독성에 아연할 뿐이다. 도시마다 길가마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칼국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볼 때 못내 염려스럽다.

경험들 해보셨는지 묻고 싶다. 국수든 빵이든 밀가루 음식을 먹고 명치끝이 매달리며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매식의 경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어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바로 독성 밀가루가 원인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수입산 독성 밀가루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밀' 애호가들이다.
그래, 옛날처럼 우리가 직접 밀농사를 지어 우리 손으로 탈곡하고 우리의 방앗간에서 빻고, 우리 손으로 직접 반죽하여 국수 만들고 빵 만들어 우리 입, 내 입으로 들어가 건강을 지킬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나? 그런 일이 일반화될 때 국가사회도 건강해질 것이다.

기사 속에서 김월자씨는 우리 밀 보관에 큰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다. 밀가루는 빻아다 제대로 갈무리해 두지 않으면 대번에 벌레가 끓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김씨의 말대로 냉장 보관하는 모양이다.

일주일이면 상하는 밀가루, 옛사람들은 어찌 보관했을까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보관했을까. 일주일 정도면 상하는 밀가루니 밀방아를 일주일 간격으로 빻아다 먹었을까? 어쩌다 국수를 안 먹는 날도 있고 아침엔 밥, 점심이나 저녁엔 국수, 이런 식으로 먹어야 했는데 그 양을 정확한 셈법으로 배량(配量)해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를 간략히 소개하므로 그 보관법을 짚어보기로 하자.

50여 년 전 중부지방에 큰 장마가 일었다. 마을 앞강에 방찻(防遮)둑이 넘실거리도록 황톳물이 노도처럼 밀며 개옹이 차서 흘렀다. 어느 마을 어느 집을 쓸고 왔는지 돼지 송아지가 산채로 떠 내려왔다. 목재도 쓰레기 더미와 함께 떠왔다. 그 중에 옹기 단지도 있었다.

물 구경하던 장정 하나가 눈앞 가까이로 떠오는 옹기단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그 단지를 밀어 올려 꺼냈다. 황톳물에 범벅이 된 단지를 대강 씻어내고 뚜껑이 있을 리 없는 내부를 살폈다. 뭔가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그 부분을 조심스럽게 긁어내고 보니 내부는 돌덩이처럼 단단한 밀가루였다.

밀가루가 젖어있는 두께는 고작 2~3cm 정도였다. 그 이하에 있는 밀가루는 말짱했다. 장정이 그 밀가루 단지를 집으로 가져가 여러 날인지 여러 달인지 양도(糧道)에 보탰음은 물론이다.

우리 어머니는 밀방아를 빻아온 날이면 항아리에 밀가루를 퍼 담으며 손바닥을 펴 꼭꼭 눌러댔다. '이래야 버러지도 안생기고 오래 두고 먹는단다'는 게 어머니의 밀가루 보관법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 시절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게 밀가루를 보관하지 않았나 싶다.
말하자면 가능한대로 밀폐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 방법이 밀가루를 보관하는 최적의 기법인지에 관해서는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 또 얼마나 오래 먹을 수 있었는지도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보관된 밀가루를 하루나 이틀, 아니 한두 달에 없애지는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정만진 기자의 우리밀 사랑 기사를 보며 먼저 옛 생각이 떠올라 이 기사를 쓰게 되었다. 몇 안 되는 우리 밀 농사꾼들과 그를 활용하는 애국자들의 정신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나의 이 기사 한 줄이 보탬이 될런지는 모르겠으나 기사 작성자의 충정만은 이해되었으면 한다. 


태그:#우리밀 추억, #들마루 멍석자리, #꼭꼭 눌러담는 법, #종잇장같이 밀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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