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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에 그림그리기를 몹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제대로 몰랐고, 제 둘레에서 제가 그림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음을 느끼는지 마는지는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2000년인가 2001년인가 아주 오랜만에 국민학교 적 동무들을 새로 만난 적 있는데, 열서너 해 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때 동무들이 저한테 "종규 넌 그림그리기 무척 좋아했잖아?" 하고 말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술자리에서 이 말을 듣고 "응? 그랬던가?" 하니까, 동무녀석은 "맨날 뭔가 그리고 있었으면서." 하고 덧붙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곰곰이 떠올리니, 국민학교 적이든 중고등학교 적이든 빈틈이 있을 때에는 어김없이 빈 종이쪽지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누구한테 그림을 배운 적이 없고, 딱히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빈 종이를 그대로 두기에는 아까웠습니다. 이 자리는 제가 무언가 끄적여 채울 자리라고 느꼈습니다. 고등학생 무렵부터는 그림만이 아닌 글을 함께 채웠는데, 그림그리기는 고등학교 2년 때인가 마지막으로 그리고 그만두었습니다. 얄궂은 일인지 몰라도, 제가 마음속으로 좋아한다고 느끼던 사람들을 얼굴그림으로 여러 번 그려 주었는데, 용케(?) 얼굴그림을 그려 주고 난 다음부터 그 사람을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더군요. 더구나, 그런 얄궂음하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사람은 그림으로 그려 주고 싶다.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그려 주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때에도 그 사람하고 오래지 않아 만남끈이 톡 끊어졌습니다.

 

 그림을 퍽 좋아했으면서도 그림을 잊고팠던 까닭은 이런 만남끈 때문인지 모르는데, 지난 2008년 여름에 옆지기가 아기를 낳던 날, 깊은밤부터 첫이레까지 열흘 즈음을 옆에 늘 붙어 지내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옆지기가 배앓이하는 모습부터 아기를 낳고 병원에 누울 때, 옆지기 어머님이 찾아와서 도와주던 때, 동네 이웃이 찾아와 주었을 때,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는 때 …….

 

 그런데 서른 장 남짓 그린 이 그림들이 송두리째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너무 어둡기도 해서 사진으로 찍을 수 없기도 했지만, 새 목숨이 새로운 곳에 나오는 흐름은 사진으로 담고 싶지 않았고, 두 눈으로도 아닌 온 가슴으로 맞아들이고 싶은 한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느낌대로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용솟음으로 그때그때 후다닥 그렸는데, 그 그림들이 사라져 버리다니.

 

 

 거꾸로 보면, 애틋한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 그림이 사라져 주었으니 반가운 노릇입니다만, 어째서인지 모르나 그림하고 제 삶은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이 사라진 일을 곱씹어 보면, 참으로 제 마음에서 우러나는 좋아함으로 그린 그림이었다고는 하여도, '눈앞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그대로 좋아하기보다는 '이 모습 그대로만 더 오래 새기고프다는' 생각이 얼핏설핏 끼어들었기 때문에, 얄궂은 느낌이 맞은편으로 옮아가지 않았으랴 싶기도 합니다. 그저 좋아서 그린다면 그저 좋은 대로 그리면 되고, 그저 좋아서 그리기 때문에 눈앞에서 마주 바라보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그릴 수 있어요. 또한 제 마음속에는 그 사람 모습이 고이 아로새겨져 있고요. 그림으로 담기는 사람을 좀더 깊이, 그러니까 나 혼자서만 좋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려지는 그이가 먼저 '그림으로 담기고 싶다'는 뜻을 느끼면서 그리는 그림이었다면 제 삶자락은 사뭇 다르지 않았으랴 생각해 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그림밭에서 아픈 생채기를 겪었기 때문에, 사진밭에서 사진기를 들 때에는 '그림그리기에서만큼 어설프고 섣부른 짓'을 안 합니다. 아픈 생채기는 한 번으로 넉넉하니까요. 아니, 또다시 아픈 생채기를 남길 수 있다 하여도, 이 생채기를 어리석게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려지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이 언제나 한몸과 한마음으로, 또한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이 한결같이 한뜻과 한느낌으로 되고 싶으니까요.

 

 

 아침에 골목을 거닐며 일터로 나오는 길에 동네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사람 발길이 아주 뜸한 골목 한복판에 강아지 한 마리가 가만히 서 있기에 저 또한 가만히 마주 바라보다가 사진 한 장 슬며시 찍었습니다. 강아지는 내내 그대로 있습니다. 강아지 사진을 찍고 돌아서면서 다시 흘끔 바라보는데 강아지는 내처 그대로입니다. 문득, 돌아가신 김기찬 님이 생각납니다.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이라는 사진책을 하나 내면서 같은 이름으로 사진잔치를 연 적이 있는데, 사진잔치 마당에서 들여다본 김기찬 님 사진은 책에서 보던 사진하고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전지만 한 크기로 뽑은 사진으로 들여다보아서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골목길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여기저기에서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진은 '골목길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이끌었습니다. 강아지야 어디에나 있지 않겠습니까. 아파트에도 있고 빌라에도 있으며 사무실에도 시골에도 나라밖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강아지가 골목길에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아니, 버티고 있다기보다 아주 마땅한 자리에 더없이 부드럽게 제자리를 조용히 차지하고 있습니다.

 

 '골목길 풍경'을 이어찍는 가운데 살짝 한 번 내놓은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길 풍경'이란, 어쩌면 이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골목길 다시 보기'를 해 주는 한편, '사진 다시 보기'를 한 셈이 아닌가 싶다고 이제 와서 새삼 느낍니다. 그때에는 못 느꼈어요. 그저, 그 사진잔치는 여느 사진잔치하고 대단히 달랐고, 이 다른 느낌은 아주 좋았기에 이 사진잔치에 찾아와 사진 구경을 하는 사람이 몹시 적은 그때 일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느꼈습니다.

 

 그 뒤로 아홉 해가 흘렀습니다. 2000년 2월이었던가, 제법 쌀쌀한 날에 열린 사진잔치였는데, 아침에 골목 강아지를 찍다가 그때 사진들이 떠올랐고, 오늘 제가 찍은 골목 강아지 사진하고 김기찬 님 골목 사진하고는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고 문득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골목길에서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좀더 자주 보는 가운데, 언제나 맑고 싱그러운 꽃그릇을 잔뜩 보고 있기 때문에, 저로서는 '꽃이 있는 포근한 골목길 삶터'를 사진이야기로 담고 싶다고 느낍니다. 아니, 언제부터인가 살며시 '꽃이 있는 포근한 골목길 삶터'를 사진으로 신나게 찍고 있습니다.

 

 

 아무개한테는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길 풍경'이고, 저무개한테는 '꽃이 있는 포근한 골목길 삶터'입니다. 그무개한테는 어떤 골목일까요. '지저분하고 쾨쾨한 뒷골목 그늘'일까요? '돈 되는 아파트를 지으려면 얼렁 때려부숴야 할 가난한 달동네 판자집'일까요? '늙은 부모만 남아 집과 함께 늙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옛 도심지'일까요?

 

 그렇지만 저는 김기찬 님 사진이 썩 달갑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풍경'이라는 낱말이 걸렸습니다. 그때에도 저는 '서울 가난한 골목동네에서 아주 값싼 방'을 얻어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제 삶터를 '풍경'으로 바라보는 일은 껄끄러웠습니다. 서울에 가기 앞서 인천에서 지내던 집들은 그저 골목동네였고, 서울을 떠나 충주를 거쳐 다시 돌아온 인천에서 새로 지내는 집이나 일터는 하나같이 골목동네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골목동네는 언제나 현실입니다. 한갓지게 바라보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보면, 저와 이웃한 동네사람한테 제가 찍는 골목길 사진은 '한갓지니까 저런 사진이나 찍지?' 하는 소리를 들을 만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을 잘 모르는 동네이웃이든, 사진을 잘 안다는 사진쟁이들이든 '서울도 아닌 인천 같은 골목길 사진을 뭐가 좋다고 저리도 부지런히 찍느냐고, 돈이 철철 넘쳐나니 저딴 짓이나 하지?' 하는 눈길로 바라보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나마 제 사진을 조금 생각해 준다는 분들은 '사라져 가는 인천 모습을 지키려고 사진을 찍는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저는 '지키기'를 하려고 찍는 사진 또한 아닙니다. 그저, 제가 태어났고 자랐고 살아가는 이곳을 꾸밈없이 찍을 뿐입니다. 제가 걷는 대로, 제가 보는 대로, 제가 만나는 대로, 제가 부대끼는 대로.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옆지기와 아기를 사진으로 담듯,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헌책방을 찍습니다.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헌책방하고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찍습니다. 그리고 인천 골목길입니다. 제 뿌리와 터전은 인천이니까요. 뿌리와 터전이 서울인 사람은 서울에서 서울 골목을 찍으면 됩니다. 뿌리와 터전이 부산인 분은 부산에서 부산 골목을 찍으면 돼요. 그러고 보면, 저는 '자전거가 있는 골목길 한켠'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할 수도 있군요.

 

 그러니까, 라면을 좋아하면 라면집을 찍으면 됩니다. 라면사발을 찍으면 됩니다. 아가씨를 좋아하면 아가씨를 찍고, 아저씨를 좋아하면 아저씨를 찍으면 됩니다. 책을 좋아하여 책을 찍고, 연예인을 좋아하여 연예인을 찍습니다. 뭐, 돈을 좋아한다면 돈 되는 사진이나 돈 버는 사진만 찍을 수 있겠지요.

 

 책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책을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만, 책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영화를 생각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만, 영화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사랑놀이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사랑놀이를 생각하는지 아리송합니다만, 사랑놀이를 온삶으로 받아들여 좋아하지 않고서는 사랑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이란, 제 모든 넋과 땀과 품과 말미를 바치는 가운데 이루는 삶입니다. 제 모든 꿈과 슬기와 가슴과 터전을 들이는 가운데 빚어내는 삶입니다. 어느 한 가지가 빠지면 '톱니가 빠져 틱틱거리는 자전거 페달질'처럼 어느 한 가지가 빠진 사진이 됩니다. 사진을 빈틈 하나 없이 찍어야 한다는 법이란 없지만, 나 스스로 좋아하는 밥상을 차리려는데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나 밥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취나물을 좋아하면서 취나물을 빼놓고 무슨 밥상을 차리겠습니까. 김치를 좋아하면서 김치 없이 어떻게 라면을 먹겠습니까.

 

 

 '월터 닉'이라는 분이 글을 쓴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분도출판사,1981)라는 책을 읽다 보면, "프란치스꼬는 이 일을 자기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온전히 돌려 드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프란치스꼬는 지체없이 모든 이가 통상적으로 피해가 버렸던 나환자 수용소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 환자들은 그의 생활에 있어 풍부한 역할을 했다. 그가 쓴맛이 단맛으로 바뀜을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이 나병환자들을 통해서였다. 프란치스꼬는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고, 이것으로써 자신의 크리스찬 생활의 시작과 더불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음을 의미해 주었다.(19쪽)"는 대목이 나옵니다. 뒤이어, "그렇게도 숱한 사람들이 자기들 생애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십자고상들, 켈트 양식의 높은 십자고상들을 바라보거나 심지어는 금으로 된 십자고상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체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은 채 과연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는 대목이 이어집니다. 온힘을 다해 가난해지고 싶었다는 프란치스코 님인데, 이이는 "가난과 혼인했다"고, 이리하여 "하느님과 혼인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퍽 낡은 책인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이라서, 헌책방마실을 하지 않고서는 만나기 어렵고, 예배당에 나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구태여 집어들 까닭 또한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찌어찌 이 책을 알아보았을 뿐더러 사들었고 또 읽습니다. 제가 천주교 세례와 견진을 받기는 하였어도 스스로 날라리라고 여기는데, 이런 책을 만날 때면 스스로 거룩해진다고 느끼면서 아주 부드러이 책을 어루만지고 차근차근 펼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책을 읽는 동안 제 머리속에 엉클어져 있던 느낌을 가다듬으며, 제 몸속에 뒤죽박죽으로 꼬여 있던 매무새를 추스릅니다.

 

 그래, 나는 "사진하고 혼인했는가?" 하고 스스로한테 물을 수 있는가? "나는 사진하고 혼인하면서 가난해지든 말든 꿋꿋하게 이 길을 걷겠는가?" 하고 스스로한테 따질 수 있는가? "나는 사진을 찍다가 돈도 벌고 이름값도 높이고 어디에선가 힘도 낸다 하여도 처음과 매한가지로 사진길을 이을 수 있는가?" 하고 스스로한테 다짐할 수 있는가?

 

 꽤 많은 사진쟁이 분들께서 이름없던 때에는 눈물겹고 웃음짓게 하던 사진을 이름있는 때에는 못 찍는 모습을 곧잘 봅니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안타까이 되었을까 곱씹는데 마땅히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실마리를 잡습니다. 이분들, 이제는 이름높은 자리에 올라선 사진쟁이 분들께서는, 당신 이름을 높이느라 정작 '찍히는 사람'하고 멀어지고 만 셈입니다. '찍히는 사람'은 저 멀리 쓸쓸하고 고단하게 냅두고, 아니 저 뒷자리에 내팽개치고 혼자 신이 나서 자가용에 올라탄 채로 앞으로만 씽씽 내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한결같이 어깨동무를 해야 할 이웃한테 등돌리고, 언제나처럼 술동무 말동무 길동무로 삼을 오랜 벗님과 지기한테 손사래를 치고 있는 노릇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시골 저잣거리를 찍거나 도시 골목길을 찍을 때 '번쩍번쩍 빛나는 사진장비로 잔뜩 뽐내는 콧대로 내려다보면서' 찍고 맙니다. 영어가 맞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서양말로 하면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찍고 맙니다. 당신 삶이 아닌 사진을 '무언가 멋나게' 찍으려 하니까 당신 삶뿐 아니라 당신 이야기와 목소리와 냄새와 얼굴 어느 한 가지도 당신 사진에 깃들어 놓지 못하고 맙니다. 당신 삶자리가 아닌 데에서 사진을 '어쩐지 훌륭하게' 보이도록 찍으려 하니까 이러한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사진은 우리 같은 낮은자리 사람이 보아서는 하나도 모를 재주놀음이요 신선놀임인가 봐요' 하는 소리를 듣고 맙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풋내기 사진쟁이 사진도 삶이요 솜씨좋은 사진쟁이 사진도 삶입니다. 김영갑 님 사진은 김영갑 님 삶이요, 브레송 님 사진은 브레송 님 삶입니다. 이러한 사진을 앞에 두고, 우리들은 이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를 읽어내야 하고, 우리가 찍으려는 사진에 우리 삶이 얼마나 배어들도록 할는지 힘써야 하며, 우리는 우리들 어떤 삶을 어떻게 사진에 스며들도록 하려는지 느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익히고 배우고 갈고닦아야 합니다. 사진은 내 하루하루를 고스란히 비추어 놓는 일기장 같은 삶자취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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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진, #사진찍기, #사진말, #골목길, #골목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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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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