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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10월 23일생 ▲ 사망자: 심옥동(沈玉同) ▲ 군번 0618567(계급:이병)

1951년 5월! 스물 한 살의 꽃다운 청춘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끌려가야 했다.

그가 아내에게 "결혼했으니 열심히 일해서 가난도 벗고 아들 딸 많이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려 부자로 호강시켜 주겠노라"고 언약하던 그의 인생은 그리 길진 못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할 신혼의 꿈도 잠시, 꿈같던 4개월은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군에 가기 전날 밤 이후에 불어 닥칠 험난한 풍파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밤새 어여쁜 신부를 꼬옥 끌어안고 울었다. "부모님 모시고 잘 살아라 꼭 살아서 돌아오마"라고 그의 부인 서미례(79)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그렇게 군대에 갔고 얼마 후 그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부자간을 끊어 놓은 전쟁은 그들의 인생과 가정마저도 망쳐 놓았다.

1951년 음력 4월 국가의 부름을 받고 떠난 아버지(심옥동)는 군에 입대해 일년 반 동안 적과 치열하게 싸우다 백마고지에서 전사했다. 또한 아들(심질수)은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명예를 찾기 위해 오십 평생을 국가와 싸우다 작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언어장애까지 왔으니 결국 그들은 둘 다 '전쟁이 남긴 피해자'들이었다.

당시 군에 간 사람을 알 수 있는 1930년도 여천군 남면에서 작성된 년도별 병역의무자 연맹부에는 1930.10.23 심옥동(沈玉同)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군에 간 사람을 알 수 있는 1930년도 여천군 남면에서 작성된 년도별 병역의무자 연맹부에는 1930.10.23 심옥동(沈玉同)이 기록되어 있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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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 심질수(59·여수시 남산동)씨는 "아버지가 6.25에 참전하신 뒤 돌아오지 못해 나중에야 전사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전사했던 기록이 총살로 바뀌었습니다.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는데 왜 기록을 바꾼 것인지 전사한 아버지의 명예를 꼭 찾고 싶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유복자로 태어나 힘들게 자란 심질수씨는 "1970년도에 국방부를 찾아서 아버지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였으나 국방부가 그런 사람없다"며 민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1994년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또 마찬가지여서 아버지가 군에 갔는데 왜 군번을 찾아 주지 않느냐며 민원실 직원들과 여러 차례 싸웠다"고 말했다.

이후 서울 병무청에 민원을 제기하자 비로소 아버지의 병적증명서를 찾아내게 되었고 이를 전사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2007.2.11일에 군의문사 정보공개 결정통지서에서 띤 군경력증명서에는 심옥동씨의 경력사항이 1950.5.31~1951.11.09 전사로 처리되어 있다.
 2007.2.11일에 군의문사 정보공개 결정통지서에서 띤 군경력증명서에는 심옥동씨의 경력사항이 1950.5.31~1951.11.09 전사로 처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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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기록에서 찾은 심옥동씨는 ▲ 2005.5.25 광주·전남지방병무청 복무이탈(군병적말소) ▲ 2007.2.11육군본부 군경력증명서 경력사항:전사 ▲ 2007.5.22 광주.전남 지방병무청 전역구분:전사 ▲ 2007.10.30 국방부 장관 정보공개통지서 전산 병적 DB자료에는 전사로 관리된 기록을 제시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는 아버지의 전사기록과 전우들을 찾던 중 마침내 1994년도에 아버지와 같이 입대하여 제주도 훈련소를 거쳐 같은 부대에 배치되어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 김소동씨를 찾게 되었다. 그들은 동향에다 동갑이어서 서로를 의지하며 전우애를 키웠다고 했다. 뒤늦게 전우가 아직도 불명예를 안고 있는 것을 본 김소동씨는 1994년 5월30일 '전사사실 인우보증원'를 작성하여 공증까지 받아 놓았다.

6사단 2연대에 참전했던 김소동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저는 돌산읍 죽포에서 왔고 심옥동은 남면 안도에서 차출되어 제주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아 6사단 2연대 3소대 3분대에서 같이 배치되었어요. 동향이었던 우리는 당시 백마고지에서 전투를 했는데 전투중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아 옥동이가 배고픔에 다래열매를 따와서 동료 전우들에게 나누어 줄때 보니까 목에 휴대했던 군번줄이 분실된 것을 보고 크게 나무란 적이 있어요. 그 후 전투중 옥동이가 폭탄을 맞았어! 그 사람은 틀림없어요."

"그러면 그날 돌아가셨습니까? 심옥동씨가?"
"하여튼 그날 오후에 돌아갔습니다. 오후에"

뒤바뀐 아버지의 운명 그리고 명예!

이후 육군본부에 전사 처리를 요청했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고 2005년도에 다시 재접수했는데 얼마 후 심질수씨는 황당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전사가 아닌 총살로 기록된 것이다. 육군본부의 근거는 아버지 이름의 매장보고서와 사형판결문이었다.

매화장 보고서에 의하면 심옥동(沈玉童)을 총살로 사형시켜 남원시 운락면에 매장시켰다고 했으나 그런 지형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 허위로 밝혀진 매화장보고 매화장 보고서에 의하면 심옥동(沈玉童)을 총살로 사형시켜 남원시 운락면에 매장시켰다고 했으나 그런 지형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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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질수씨에 의하면 "우리 아버지는 1930년 10월23일 생이라고 호적등본에 반듯하게 나와 있는데 육군본부에서는 동명이인을 들먹이며 1925년생 당 27세를 끼워 맞추고 있습니다. 육본에서 주장하는 매화장보고서에 사체도 없고 실제지명이 없는 매화장보고서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게다가 매화장보고서에 적힌 매장보고서도 이상합니다. 그곳은 군의문사조사위원회 조사결과 남원군 운락리는 당시부터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 지명으로 밝혀졌고 그런 지명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엉터리로 밝혀진 것입니다"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2008년 6월 24일 KBS '시청자 칼럼 우리사는세상'의 보도에 의하면 육군본부 정희경 병적관리과 민원검증담당관은 "심옥동씨는 1951년 8월에 3보충대에서 2보충대로 갔고 그 이후에 (심옥동씨는) 수도사단 1연대 2대대에서 계속 근무를 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의 근거는 사형판결문으로 1925년도에 심옥동이 수도사단 1연대 2대대 소속이었다는 것.

하지만 심옥동씨 전속명령지 기록은 1훈련소→3보충대→2보충대까지이고 정작 1연대 자대배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는 사형판결문에 '심옥童' 단기 4258년(1925년)생과 '심옥同' 단기4263(1930년)생 심옥동을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담당자는 "그건 군번이 똑같지 않습니까? 소속이 똑같고 그리고 육군의 병적상 심옥동은 한 사람밖에 없는데 그 사람이 생년월일이 잘못 적혀있다고 해서 심옥동이 아니다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판결문과 매화장보고서의 군번이 같으니 한 사람이라는 것이 육군본부의 주장이다. 하지만 KBS 보도가 지적한 매장보고서의 매장 장소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장교의 진술이 다른 만큼 매장보고서의 신빙성이 떨어지며 현재 기록들만으로는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 판단하기 힘들다는 보도이후 군의문사위에서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2008.7.1일 군의문사에서는 1925년생과 1930년생 심옥동이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며 보존자료 일체의 내용을 정정하라고 판결했다.
 2008.7.1일 군의문사에서는 1925년생과 1930년생 심옥동이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며 보존자료 일체의 내용을 정정하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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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일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결정문(진정 제127호 심옥동 사건)에 의하면 "진정인의 아버지 망 심옥동(沈玉同,1930.10.23생)과 사형수 심옥동(沈玉童,1925.8.29생)이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없으므로, 이 사건에 대하여 국방부 장관에게 사형수 심옥동의 판결문 등을 근거로 작성된 망 심옥동에 대한 병적기록표, 사망확인서, 병적증명서, 전사망확인자료,군 경력증명서 등 군 보존자료 일체의 내용을 정정할 것을 요청한다"고 결정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문들

이후 육군본부는 대법원 가족관계등록과로부터 "1920년생부터 1935년생까지 호적에 등록된 심옥동에 대한 인적사항을 확인한 결과 민원인의 부친 심옥동은 1930.10.23生 으로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29번지 호적에 존재하는 한  명으로 확인되었다고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에 통보했다. 이것은 심옥동에 대해 동명이인을 가리기 위해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위의 판결에 따라 조사한 것인데 한 사람 밖에 나오지 않아서 심질수씨는 육군본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육군본부에서는 대법원 가족관계등록과에서 1920~1935년까지 심옥동이 한명으로 확인되었다고 군의문사에 통보했으나 의문사 조사에서 1934년생 심옥동이 또 나왔다.
 육군본부에서는 대법원 가족관계등록과에서 1920~1935년까지 심옥동이 한명으로 확인되었다고 군의문사에 통보했으나 의문사 조사에서 1934년생 심옥동이 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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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심질수씨는 의문사위를 찾아가서 "내가 알기로는 공군과 해군에 심옥동이 있는데 왜 조사를 해주지 않느냐?"며 상임위원장실에서 강력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군의문사위에서는 또다시 1920년생부터 1935년생까지 심옥동을 확인한 결과 추가로 부산 출생 해병 소속 1934년 출생으로 기록된 심옥동(沈玉同)의 병적기록카드에서  불명예 제대한 사실과 1943년생 심옥동이 나왔다. 심질수씨는 "육본과 군의문사위는 이를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육본에서는 1920년부터 1935년까지 심옥동이 한명뿐이라고 했지만 군의문사 확인 결과 추가로 부산 출생 해병 소속 1934년 출생으로 기록된 심옥동(沈玉同)의 병적기록카드에서  불명예 제대한 사실이 밝혀졌다.
▲ 의문사에서 제시한 심옥동의 마이크로 필림 육본에서는 1920년부터 1935년까지 심옥동이 한명뿐이라고 했지만 군의문사 확인 결과 추가로 부산 출생 해병 소속 1934년 출생으로 기록된 심옥동(沈玉同)의 병적기록카드에서 불명예 제대한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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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질수씨는 "육군본부에서 무슨 이유로 엄연히 심옥동은 4명임을 확인했는데 왜 한사람으로 정리하며 1925년생을 전사한 1930년생 우리 아버지에게 덮어씌워 총살로 만들고, 허위매장보고서까지 둘러대고, 동명이인을 가리기 위한 조사에서 34년생을 빼고 허위보고하는점 등 꼬리를 무는데 이 나라에 이런 행정이 어디 있느냐?"고 개탄했다.

작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언어장애까지 온 심질수씨는 "죽기전 아버지의 기록을 제대로 바꾸어 명예를 꼭 되찾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작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언어장애까지 온 심질수씨는 "죽기전 아버지의 기록을 제대로 바꾸어 명예를 꼭 되찾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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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명예를 꼭 찾고 싶습니다!

6.25가 일어난 지 올해로 59해째를 맞고 있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국가를 위해 충성했던 애국선열들이 보상은커녕 제대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버지의 불명예를 찾기 위해 소송을 준비 중인 심질수씨는 "우리 아버지는 6.25 사변이 일어날 때 가정을 뒤로 하고 백마고지에서 생사를 걸고 목숨바쳐 싸워 국가를 지켰다"며 "전사로 기록된 서류조차도 군의문사위와 육군본부는 왜 아버지를 전사자로 인정해주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또 "죽기 전에 자식 된 도리로 이제라도 아버지의 명예를 찾아 제대된 기록을 남겨 드리고 싶다"며 "관계기관에서는 나 몰라라 하지 말고 꼭 저의 아버지의 기록을 제대로 바꾸어 주십시오!"라고 항변하고 있다.

한편 심질수씨는 2009년 3월 12일 순천보훈청에 전쟁 중 전사한 아버지를 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국가유공자 인정 신청서'를 내놓은 상태여서 향후 그의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태그:#심질수 , #군의문사, #육군본부, #유공자,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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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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