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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훌쩍 가고 싶은 곳이 없으랴만 아내는 우리 정원만한 곳이 없다며 찰밥을 준비했다. 옛날에 갔던 곳도 다시 보면 느낌이 다른 줄은 알지만 애써 한 번 가본 곳이라는 핑계로 둘러대며 심어놓은 것들과 인연이나 다지자고 정원으로 차를 몰았다.

아내의 뜨락은 아직도 이름이 없다. 기분에 따라 농장이라고도 하고 정원 혹은 뜨락이라는 별칭을 부르기도 하지만 아직 불편한 점은 없기에 되는대로 쓰고 있다. 

그렇다고 정원의 이름을 생각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헛된 욕심을 부리고 마음을 비운다는 뜻에서 하심원(下心園)으로 정할까 했지만 특정 종교의 분위기가 떠오른다는 주변 친지들의 말에 접었고, 아내의 세례명을 따서 '로사의 정원'으로 부를까도 생각했지만 유명인의 아류인 듯 싶어 망설이고 있다.

아내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이름 끝 자를 따서 숙정원(淑庭園)으로 부를까도 생각 중이고, 숙정원이라는 한글 이름은 같지만 맑고 깨끗한 정원이라는 뜻의 숙정원(淑淨園)으로 정할까 하는 생각도 있다.

아무튼 아직 이름이 없는 아내의 뜨락에서 부처님 오신 날의 하루를 보낼 작정으로 정원에 도착했더니 먼저 핀 붉은 철쭉은 색이 바래고, 뒤따라 아직 어린 하얀 철쭉들이 단정한 하복을 입은 여학생들처럼 줄지어 피고 있다.
정원의 서편은 하얀 철쭉길이다. 잔디와 어우러진 길을 아내는 매우 좋아한다.
▲ 하얀 철쭉길 정원의 서편은 하얀 철쭉길이다. 잔디와 어우러진 길을 아내는 매우 좋아한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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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눈비와 바람과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숨을 죽이며 길고 긴 기다림 끝에 피워낸 꽃도 시간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욕심과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았던 내 인생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밤부터 비가 올 것이라고 들었는데 점심 때부터 흩뿌리던 비는 설마 아직은 지나가는 비겠지 하는 방심의 허를 뚫고 이내 굵은 빗줄기로 변하고 만다. 마저 하지 못한 일이 있어도 반가운 비다. 서둘러 비닐하우스 한쪽으로 피신하여 아내와 비 내리는 정원의 모습을 보며 지난 2년의 세월을 이야기했다.

늙은 감나무의 연두색 잎, 화려한 꽃, 장독대,  그 너머에 보이는 낡은 옛집은 오늘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비 내리는 정원 늙은 감나무의 연두색 잎, 화려한 꽃, 장독대, 그 너머에 보이는 낡은 옛집은 오늘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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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나무를 심었다. 10여 종의 유실수와 10종류 정도의 관상수는 물론 작은 철쭉을 합하면 거의 2천주 이상은 심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잔디밭에 공을 들었던 일은 또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힘들게 했으면서도 기쁨과 보람을 주었던 것들은 역시 그동안 심고 가꾸었던 20여 종의 농작물이 아니었던가 싶다.

사실 그냥 심었다는 말이나 수확했다는 말에는 시간의 개념도 없고 물리적인 노력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농사에서 무엇을 심고 수확했다는 말의 이면에 담은 의미는 의외로 길고도 복잡하다. 예를 들면 고추 모종을 심기 위해 땅을 갈고 고르는 시간, 비닐로 멀칭하고 모종을 심는 시간, 지지대를 박고 고추를 묶은 시간의 크기나 노동의 강도를 계량할 수 없고, 수확하기까지 잦은 비와 드문 비에 가슴 졸이고 바람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을 객관적 수치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작물을 상품화해보겠다고 야콘을 판매해서 얻은 소득을 계산하면 지금도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밖에 없다. 아마 다시는 우리 땅에 심은 농작물을 상품으로 팔기 위해 박스에 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나긴 시간 피와 땀과 눈물로 거둔 수확의 산물을 팔고나서 허망했던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아이들의 과자에도 붙여진 소비자 권장가격처럼 농산물에도 소비자 권장 가격을 붙여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최소한 노동의 대가는 보장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만 덧붙인다.

5월은 심은 작물이 땅에 자리를 잡는 달이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워 여름의 풀과 경쟁할 채비를 갖추는 달이다.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받아 열매를 키우기 위한 준비의 계절이다. 때문에 봄의 밭작물들은 바쁘다.

살아있는 것들 모두 정령이 있다면 우리가 심은 나무, 작은 마늘 한 쪽도 인연에 의한 만남일 것이다. 때문에 자라는 나무와 고추와 마늘을 비롯한 농작물이 병 없이 잘 자라기를,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붉은 꽃들은 열흘 여의 영화를 누리더니 시들어간다.  인간의 모습처럼.
▲ 색이 변하는 꽃길 붉은 꽃들은 열흘 여의 영화를 누리더니 시들어간다. 인간의 모습처럼.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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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반가운 비를 보며 그런 기원을 담아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로 시작되는 지난 시절의 동요를 흥얼거린다.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인,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린 정원에서 애들하고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본다는 6 ․ 70년대 노래를 지금 아이들의 감수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랴만 "아빠는 꽃보며 살자 그랬죠. 꽃같이 예쁘게 살자 그랬죠."라는 대목은 좀 더 크게 불러본다.    

우리가 지상에서 보낼 시간, 부처님 오신 날을 몇 번이나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더 이상 헛된 욕심에서 벗어나 주변의 사람들이 편안하기를, 또 나와 인연을 맺은 나무 한 그루라도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지켜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비록 짧은 일생의 꽃일지라도 그 꽃을 보며 "꽃같이 예쁘게 살자"는 마음을 가졌으면 싶다.

부처님 오신 날, 마음에 나만의 절집을 지어보는 일도 의미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내 블로그에도 보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부처님 오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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