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책이름 : 시와 혁명

- 글 : 김남주

- 펴낸곳 : 나루 (1991.12.25.)

- 판 끊어짐.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음.

 

(1) 일하는 사람한테 문학이란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동냥질과 애보기'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를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동냥하는 거지한테 아기를 봐주면 돈을 주겠다고 하니, 동냥질이 힘들어 그만두려던 거지는 얼싸 좋구나 하면서 아이를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지는 애보기가 너무 힘들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동냥그릇을 찾아서 세상에 거지일이 얼마나 쉬웠던가 하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애보기를 거지한테 맡겨 보려던 그 어머니는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 애 어머니가 보기에 거지가 동냥하는 품이 썩 딱해 보여서 세상살이를 깨달아 보라는 뜻에서 넌지시 애보기를 맡겨 보려고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애 어머니가 거지한테 내어주는 돈 한 닢이 얼마나 고된 땀방울로 이루어냈는가를 느끼면서, 그 한 닢을 고맙고 달게 받아들이면서 기운을 내라는 마음씀이 아니었으랴 싶습니다.

 

.. 사회과학자들이 그들의 과학적 분석으로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내려야겠지만, 시인은 대중의 구체적인 생활을 매개로 하여 그 일을 해내야 합니다 … 시인은 혁명투쟁에 몸소 참가함으로써 가장 혁명적인 시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 문학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민족의 현실과 사회적 현상에서 눈을 돌릴 권리가 없는 것이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 일에, 나라의 진정한 독립을 되찾는 일에, 동강난 조국을 하나로 잇는 일에, 그리고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근로대중들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에 기초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는 일에, 동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폐쇄된 공간에 처박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남을 시 한 편을 쓰겠다고 골머리를 썩힐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현실에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인간적인 대응을 함으로써 근로대중이 참된 삶을 살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는 시를 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22, 36, 46쪽)

 

애보기는 집안일입니다. 집밖일이 아닙니다. 애보기가 집안일일 때에는 어느 누구도 애보는 사람한테(아빠이든 엄마이든 할매이든 할배이든) 일삯을 치러 주지 않습니다. 애보기가 집밖일이 될 때에는 애보기를 해 주는 사람한테 백만 원이든 백오십만 원이든 치러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애보기를 도맡아 하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 싼 일삯으로 치른다 하여도 백만 원을 더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애보기를 하는 어머니는 늘 느낍니다만, 애보기를 하지 않는 아버지는 '애보기가 무슨 대수이냐'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애보기를 꼭 하루만이라도 홀로 맡아 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나라 보건복지를 맡은 분들 가운데에, 또 여느 공무원 가운데에, 또 학교에서 집일(가정)을 가르치는 분 가운데에, 애보기가 얼마나 고되면서 보람이 있고 뜻과 값이 있는 줄 깨달은 분은 드물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애보기(육아) 정책과 복지'가 여태껏 한 가지도 안 이루어질 뿐더러, 학교교육 또한 엉망으로만 자리잡고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 대중은 자기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다루는 글이면 표현 기법이 조금 낯설고 문장구성이 복잡하여도 어렵지 않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중이 이해 못하는 글은 갈등하는 사회세력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와 동요를 나타내는 그런 사람들의 글입니다 … 이 시는 그 당시 저에게 통쾌한 맛과 재미를 주었습니다. 저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완전한 까막눈이신 제 어머니에게 이 시를 읽어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저보다 더 재미있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영락없이 꼭 우리 밥 먹고 사는 꼬락서니다' 하며 천연덕스럽게 웃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 시와 같은 시를 흉내내어 시라는 것을 처음 쓰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주로 '보리밥은커녕 보리죽도 제때에 먹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판국에 버젓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에그후라이를 먹는 자들을 골려주고 저주하고 마침내는 때려눕히는 데 문학적으로 일조'하고자 의도적으로 시를 써 왔습니다. 20여 년 전 김준태 시인의 시 〈보리밥〉을 내가 읽어 드릴 때, 그것을 귀담아 들이시고 좋아하셨던 제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 새삼 떠오릅니다 … 제 시의 기반은 삶의 터전이고 노동의 대상인 인간의 대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 한 시인이 노동의 대상이고 삶의 터전인 인간의 대지에서 떨어져 있으면, 그가 쓴 시는 아마, 아니 틀림없이 어떤 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문학이 노동과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깃털 하나 들어올릴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  (35, 49∼50쪽)

 

애보기를 하며 가루젖을 먹이고 종이기저귀를 쓰고 세탁기를 돌리고 전자레인지를 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온통 애 어머니가 홀로 맡아 손으로 다스리면서 키워 왔습니다. 애낳기만 집에서 하지 않았으며, 애보기를 넘어 아이를 가르치는 일 또한 집에서 해 왔습니다. 애 아버지가 아닌 애 어머니가 아이를 가르쳐 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세상에서는 아이를 키운 어머니 손길과 마음길과 품길을 고이 여기면서 받들 줄 아는 마음그릇이 아주 작아졌습니다. 어머니한테서 자라난 딸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도록 다니며 여성학을 배웠다고 하여 남다르지 않습니다. 입으로 남녀평등을 외치고 있다 한들 그리 벌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뛰어나고 빼어난 물질문명과 기계로 애보기 품을 덜 수 있다 하여도, 그 어떤 물질문명과 기계로는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호텔요리사한테도 손맛이 없으면 밥맛이 나지 못하고, 이름난 글씨에서도 손글이 아니면 글맛이 나지 못하는 까닭과 한동아리입니다.

 

애보기가 제값을 받지 못하는 흐름에서는 사람이 사람값을 받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 한결같이 어린이로 자라며 어김없이 푸름이를 지내면서 젊은 한 사람이 되고 무르익은 한 사람으로 거듭나다가는 늙은 슬기를 다스리며 다시 세상에 내려놓고 흙으로 돌아가는데, 어린 목숨을 고이 받들지 못한다 할 때에는 사람이 처음 우뚝 서는 뜻과 넋을 아끼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일이 일이 아니게 된다고 할까요. 일이 일 아닌 돈으로만 따져지게 된다고 할까요. 일을 일다이 즐기지 못하면서 오로지 돈벌이로만 치닫게 된다고 할까요. 오로지 돈벌이로만 치달으면서 우리 마음결이 뒤틀리거나 비뚤어진다고 할까요.

 

.. 나는 소박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고 싶다.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배를 채울 밥과 입을 옷과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나는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내는 유일한 길은 위대한 삶인 것이다. 그 길이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비인간성, 부패와 타락에 대한 전면전에 시인 자신이 몸소 참가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이다 … 작가에게 있어서 체험은 작품을 쓰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재산이다 … 그것도 고통스런 시련이 거듭된 그런 체험이다 … 작가는 생활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평범한 사람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 배울 만큼 배우고, 그래서 적당히 노력하면 그래도 괜찮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문학과, 매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을 해도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문학은 사뭇 다른 것이다 ..  (53, 66, 68∼69, 70쪽)

 

애보기를 겪거나 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홀로 쓸 수 있는 겨를이 넉넉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지만, 애보기를 겪거나 해야 한다면 그만큼 홀로 쓸 수 있는 겨를이 없거나 모자라 아무것도 못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애보기는 우리 삶에서 가장 거룩한 일이라고 느낍니다. 다른 어느 일도 못하게 가로막는다 할 만한 애보기이기 때문에 더없이 거룩한 일이라고 느낍니다. 오로지 이 하나에만 온마음을 쏟고 온몸을 바치도록 하고 있으니 그예 거룩한 일이라고 느낍니다.

 

애보기를 하는 동안 책 하나 마음껏 펼치지 못합니다. 옆지기 어머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느긋하게 보지 못합니다. 옆지기는 매듭일을 하지 못하고, 저는 글 한 줄 쓰지 못합니다. 틈틈이 겨우 쌀을 씻어 불리고 안치고 빨래하고 밥하고 상 내오고 치우고 닦고 쓸고 하노라면 어느새 하루가 꼴딱 넘어가는데, 이런 사이사이 씻기고 똥 치우고 빨래 걷고 바깥바람 잠깐 쐬고 해야 합니다. 아기가 낮잠에 살짝 들었을 때 밀린 일을 겨우겨우 하면 어느새 깨어나 놀아 달라 하고, 저녁에는 더 놀자며 안 자면서 칭얼거리는데, 이렇게 아이와 함께 들들 볶이노라면, 밤에 새근새근 아기를 옆에 누이고 같이 누워야지,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글쓰기를 하든 책읽기를 하든 할 기운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아기를 사이에 놓고 세 식구가 누워 이야기 몇 마디 나누다가 스르르 잠들면서 생각합니다. 이토록 온통 붙들리도록 하는 아기라 한다면, 내가 아기였을 때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떠했을까 하고. 아버지는 일 나간다며 새벽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데, 그동안 어머니 혼자서 형하고 나를 어찌 돌보셨을까 하고. 두 형제를 돌보는 가운데, 모자란 살림을 채울 곁일까지 하셨는데 잠이나마 제대로 주무신 적은 며칠이나 되었을까 하고. 나를 낳아 기른 어머니는 내가 떠올리기로 책을 거의 한 번도 읽으신 적이 없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렇게 책을 읽은 적 없는 어머니라 하지만, 내가 세상 살아가는 앎과 슬기는 온통 어머니한테서 배우고 받아들이고 물려받지 않았느냐 하고.

 

.. 그들이 나에게 준 위대한 교훈은, 인류에게 유익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이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하고, 자기 시대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불굴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당연하게도 내 시의 내용은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따뜻한 불, 밥이며 집이며 옷이며 학교며 노래며, 이런 것들을 갖고 싶어하되 그것을 제 뼈와 살의 노동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 농민에 대한 애정이고, 기본적인 그런 것들을 갖고 싶어하면서도 그것을 남의 노동의 대가를 착취함으로써 독점하려는 자들에 대한 증오이고, 증오의 대상 '나쁜 사람들'을 찾아 무기를 벼리는 사람들에 대한 찬가이다 … 하이네는 평생 동안 크게 두 종류의 문학 유파와 싸웠다. 하나는 생활의 뿌리가 없이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문학, 다시 말해서 어깨에 노래의 날개를 달고 중세의 종교적 질서를 찾아 과거로 도피하는 낭만주의 문학이다 … 하이네는 상황과 구체적인 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특정의 이념과 사상을 공허하게 외치는 그런 문학의 경향성을 반대했지, 사상과 이념이 시대적 상황과 생활의 구체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문학의 경향성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  (74∼76, 134쪽)

 

문학은 재미있어야 합니다. 시며 소설이며 수필이며 희곡이며 숱한 문학은 즐거워야 합니다. 이 재미에는 웃음과 눈물이 고이 깃들어야 합니다. 이 즐거움에는 땀과 흙이 배어들어야 합니다. 고단한 사람들이 고단함을 무릅쓰고라도 읽을 만큼 재미가 있으면서 웃음이 있어야 하고, 힘겨운 사람들이 힘겨움을 이겨내고라도 읽을 만큼 즐거우면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그대로 사랑이면서 가르침이 되는 문학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믿음이 꾸밈없이 믿음이면서 너나들이가 되는 문학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애 어머니가 기꺼이 맞아들일 문학이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만큼 애쓰지 않고서야 애 아버지가 흐뭇하게 받아들일 문학으로 자리매길 수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 삶에 뿌리내리고, 우리 삶에 이바지하며, 우리 삶에 어깨동무할 때라야 비로소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느낍니다.

 

(2) 일하지 않는 사람한테 문학이란

 

오늘날 흔히 떠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쇠 셋쯤은 있어야 색시를 얻을 수 있다고. 그러나 열쇠 숫자는 해가 갈수록 하나둘 늘어 다섯이 되고 일곱이 되고 아홉이 된다고. 아파트 열쇠 차 열쇠, 또 무슨 열쇠였을까요. 금고 열쇠였을까요. 이제는 아파트도 한 채만이 아닌 두어 채는 있어야 하고, 자동차 또한 한 대만이 아닌 두어 대는 있어야 합니다. 금고로 친다면 수두룩하게 있어야 할 테고, 별장 열쇠 따위도 있어야 할 테며, 골프회원권이나 금덩이나 여러 가지 다른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사람이 끝없이 넉넉한 살림이 되지는 않는 데에도 열쇠 숫자가 줄어들 낌새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 써도 다 못 쓸 만큼 많은 돈을 거머쥐고 있어도 이보다 훨씬 큰 돈을 거머쥐려고 아등바등이 됩니다. 나한테 너무 넘친다면 기꺼이 덜어내고 나누어야 할 텐데, 덜어내지 않으니 터져 버립니다. 나누지 않으니 쏟아집니다. 스스로 덜어낸다면 알뜰살뜰 함께 즐거울 수 있으며, 손수 나누려 한다면 오순도순 서로 웃을 수 있건만, 제 손으로 덜지도 나누지도 않으니 허튼 데로 줄줄이 새나가고 맙니다.

 

..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 지배계급은 노동자ㆍ농민의 자식들이 태어나 사물의 이치를 분별할 나이가 되면 학교교육을 통해서 그들의 세계관을 주입시킵니다 … 물질적인 부를 지배하고 있는 계급은 학교 등 일체의 이데올로기 기관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문사ㆍ방송국ㆍ잡지사 등 대중매체뿐 아니라 문협, 예총, 또 무슨 연구소 따위를 장악하고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은 물질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는 지배계급입니다 … (29, 30쪽)

 

실업자가 얼마요, 예비실업자가 또 얼마요 하는 이야기가 떠돕니다. 나라에서 내는 통계가 아니더라도 일을 않는 사람이 꽤 많은 우리 나라입니다. 그런데 일이란 무엇일까요. 돈벌이가 일일까요. 돈을 번다면 모두 일하는 셈일까요. 돈을 많이 벌면 일을 잘하는 셈이고, 돈을 적게 벌면 일을 못하는 셈일까요. 돈벌이를 안 하면 실업자일까요. 돈벌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무능력자인가요. 돈벌이에 뜻을 두지 않으면 우리 사회를 갉아먹는 밥버러지인지요. 그리고, 실업자란 왜 생겨나게 되고, 사람들은 왜 제 일을 스스로 못 찾으면서 떠돌게 되고, 스스로 싸구려 임노동자로 팔려 나가고 비정규직으로 푸대접받고 하게 되는가요.

 

.. 그렇다. 그들은 죄수들인 것이다.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행동했던 사람들인 청년 학생들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는 죄수인 것이다. 38선 이남 국토에 120개의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4만 6천 여 명의 미군이 주둔함으로써만 재산과 생명과 권력이 보장되는 어떤 사람에게는 민족의 자주성 운운하는 자의 말과 행위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 우리 나라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고 있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돈없는 사람들은 그런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 있어도 대학에 들어갈 수 없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법률로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 누가 미국이나 중국이나 소련으로 가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습니까? ..  (168, 181∼182쪽)

 

돈을 버는 사람은 그저 '돈벌이꾼'이라고 느낍니다. 일을 하는 사람일 때라야 비로소 '일꾼'이라고 느낍니다. 돈만 벌려 한다면 '돈쟁이'에 머물고,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면 '살림꾼'이 된다고 느낍니다. 돈에 매여 산다면 '돈벌레' 소리를 들을 테고, 스스로 일을 즐기고 이웃과 일을 나눌 줄 안다면 '참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리하여, 돈을 잘 벌고 살림이 넉넉하다 하여도, 스스로 마음그릇이 좁기 때문에 책 하나 못 펼치게 됩니다. 책도 못 펼치지만 이웃을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이웃을 들여다보지도 못하지만 세상을 꿰뚫어보지 못합니다. 세상을 꿰뚫어보지도 못하지만 제 삶이 어떠한가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 하여도, 스스로 마음그릇을 알차게 꾸려 나간다면, 없는 틈을 어떻게든 마련하여 책 하나 펼치게 됩니다. 책도 펼치지만 이웃을 들여다보며 사랑을 나눕니다. 이웃을 들여다보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세상도 꿰뚫어봅니다. 세상을 꿰뚫어볼 뿐 아니라 제 삶이 어떤 흐름을 타게 되는지를 낱낱이 알고 깨닫고 다스릴 줄 압니다.

 

.. 1973년 3월 밤 12시 무렵에 나는 느닷없는 경찰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경찰관의 숫자는 다섯 명이었는데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내가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 친구의 자취방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다짜고짜로 내 손을 등 뒤로 제끼더니 오랏줄로 묶었다. 그리고 그들은 방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졌다. 그들이 압수한 것은 책 몇 권과 내가 습작해 놓은 시 원고지 뭉치였다 … "여기에 한 번 들어오면 벙어리도 입을 열고 나가는 곳이야." 이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자 모양의 실내였다. 실내에는 다른 경찰관들이 나 같은 것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시끌벅쩍 상소리며 전화벨소리를 내며 일에 열중하고 있었나 … "이 새끼가 그 새끼야." 이것이 사복 차림의 신사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리고 그는 내 뺨을 후려갈겼다. "야 이 새끼야, 내 큰 자식은 연세대 다니면서도 아무 일 없이 공부하고 있어. 너 같은 새끼가 뭘 안다고 지랄이야." 이것은 내가 지방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같잖다는 투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무의자 옆에 세워져 있었던 나무막대기(각목)로 내 몸 이곳저곳을 마구잡이로 두들겨댔다. 나는 꿈쩍않고 맞아 주었다. "야 쌔끼 군대도 안 갔다 왔어? 순 빨갱이 새낀데, 어이 서장, 6ㆍ25 참상을 찍은 사진 있지? 그걸 이 쌔끼 눈앞에 보여줘. 이런 쌔끼를 뭣 할라고 여기까지 끌고 와? 도봉산 골짜기 어디다 꼬라박아 버리지 않고. 이런 것들에게는 대한민국 법이 아까워." 그리고 그는 안호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권총을 꺼내더니 내 머리통에 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저주했다 … 내가 본격적으로 수사관의 취조를 받은 것은 다음날 밤이었다. 그동안 스물네 시간 동안 나는 밥먹고 대소변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잠은 긴 나무의자에서 웅크리고 잤는데 쇠사슬 한쪽 끝은 의자에 묶여 있었다. 나는 영락없는 개 신세였던 것이다 ..  (154∼157쪽)

 

돈만 버는 사람한테는 책이란 없습니다. 어쩌다가 쥐어지는 책이라 하여도 마음을 살찌우는 책이 아닙니다. 마음에 밥이 되는 책이 아닙니다. 마음을 가꾸는 책이 아닙니다. 마음을 일으키는 책이 아닙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책이 아닙니다. 마음이 바로서도록 하는 책이 아닙니다. 마음이 올바르도록 하는 책이 아닙니다. 마음에 슬기로움이 깃들도록 하는 책이 아닙니다.

 

책다운 책 하나 여미려고 하는 책마을 사람 또한 돈이 넘쳐난다고 해서 책을 여미어내지 못합니다. 돈이 없고 빚에 쪼들리면서도 고운 뜻을 놓지 않는 책마을 일꾼만이 책다운 책을 꾸준하게 펴냅니다. 큰돈은커녕 작은돈조차 못 만진다고 하여도, 좋은 책 하나를 쓰다듬는 보람으로 땀과 품을 바칩니다.

 

그리고 이 땀과 품을 샅샅이 알아채고 넙죽 받아먹는 사람은 바로 세상을 온 몸뚱이로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낮은자리 일꾼입니다. 책으로 혁명을 이루려는 사람은 피와 살이 발라지면서 책에 꿈을 담고, 스스로 제 삶에서 혁명을 이룩하려는 사람은 피와 살이 발라진 책에 서린 땀과 품을 읽어내면서 언제나 다시서기와 새로서기를 맛보고 참일꾼으로 오롯이 일어서게 됩니다.

 

(3) 혁명을 이루고자 혁명으로 살았던 시인

 

김남주 님은 시인입니다. 대나무창이나 낫이나 쟁기와 같은 느낌으로 우리한테 아로새겨진 시인입니다. 틀림없이 김남주 님은 대나무창으로 콱콱 쑤시는 시를 썼고, 낫으로 싹둑 베는 시를 썼으며, 쟁기로 땀흘려 갈아엎는 시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김남주 님은 왜 이와 같은 시를 썼을까요. 굳이 대나무창과 낫과 쟁기와 같은 시를 써야 했을까요. 혁명을 이루고픈 마음으로 쓰는 시는 반드시 대나무창과 낫과 쟁기를 부리는 시여야만 했을까요.

 

.. 요즘은 어떤가. 같은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이 죽어도 모르고 사는 세상이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안됐다고 혀나 한 번 끌끌 차면 그만인 것이다. 워낙에 인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웃의 삶과 죽음에 관심을 가지면서 살다가는 생활의 전선에서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울타리 밖에는 자기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공동체의 문제가 산재해 있는데 그것에 등을 돌리고 달팽이처럼 가정이라고 하는 움막에 자기의 삶을 가워 놓고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를 ..  (60, 164쪽)

 

제가 꾸리는 도서관 책꽂이 가운데 퍽 잘 보이는 자리에 김남주 님 시모음과 글모음을 차곡차곡 갖추어 놓았습니다. 저로서는 하나같이 여러 번 읽은 책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그리 안 읽히는 책들입니다. 이제는 한물갔다고 여겨지고, 이제는 케케묵었다고 여겨지며, 이제 보면 너무 날이 서 있던 시라 세상흐름에 걸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책들입니다. 박노해 님 같은 분은 일찌감치 대나무창 따위는 내다 버렸다 할 텐데, 김남주 님 시와 글을 곰곰이 되읽어 보노라니, 박노해 님 같은 분은 처음부터 대나무창이고 낫이고 쟁기이고 든 적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팔뚝질만 조금 하다가, 입으로만 조금 뇌까리다가, 머리만 조금 굴리다가 시나브로 돌아선 시가 아니었느냐 싶습니다.

 

.. 시를 휴지로 쓸 것 같은 사람에게는 주지 말아야 하고, 약으로 써먹을 사람에게만 주어야 경제적인 사람이라네 ..  (202쪽)

 

《나의 칼 나의 피》나 《진혼가》나 《조국은 하나다》나 《솔직히 말하자》 같은 시모음은 하루하루 잊혀지는 이름입니다. 우리 입으로 읊지 않는 시입니다. 나라에 민주주의가 자리잡지 못했어도, 사회에 독재주의가 걷혀지지 않았어도, 세상에 평화와 자유가 뿌리내리지 못했어도, 우리 삶에 아름다움과 사랑이 깃들이지 않았어도 잊혀지고 읊지 않는 시가 되어 갑니다. 아니, 벌써 이렇게 되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 그러면 아버지가 바라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나란 사람은 지금 어떤 사회적인 위치에 있을까. 그 위치를 상상만 해도 나는 소름이 끼친다. 아버지가 바라던 그 위치에 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면 아버지와 같은 가난하고 짓눌린 사람 위에 군림하고 이리 해라 저리 해라 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밟고 서 있을 것이다 … 어찌 내가 그런 짓을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흔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변명들을 한다만, 인간이 인간을 짓밟고 눌러타고 앉아 그 짓을 한단 말인가 ..  (187∼188쪽)

 

'김남주 다시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김남주 다시읽기'가 이루어지리라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김남주라고 하는 시인 한 분은 온몸으로 혁명을 하려는 매무새로 시를 썼음만은 누군가 아직까지 '세상 바꾸기'를 생각하는 분들 마음자리에 남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손꼽습니다. 혁명을 하고자 스스로 혁명이 되었고, 삶과 생각과 말과 문학 모두 혁명이 된 김남주 시인이었음을, 그러니까 '사랑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 스스로 온몸으로 사랑이 되어야 하고, '믿음 함께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들랑 스스로 온마음으로 믿음이 되어야 함을 곱새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비손을 합니다.

 

낱말은 달라도 '혁명'과 '사랑'과 '삶'과 '일'은 늘 한 자리에서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사랑 없는 혁명이란 없고, 혁명 없는 삶이란 없으며, 사랑과 혁명과 삶이 아리따이 어우러져야 즐거운 일이 되어 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시와 혁명

김남주, 나루(1992)


태그:#김남주, #시집, #시인, #책읽기, #혁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