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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곤한 봄이다. 금요일 오후 햇살마저 따스하니, 버스 안에서 고개를 주억 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서초구 양재역에서 탄 버스는 목적지인 잠실로 향하고 있었다. 서너 정거장쯤 지났을까. 양재동의 어느 정거장에서 십여 명의 초등학생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때는 오후 3시였다.

 

퇴근시간 때가 아닌지라 올라탄 초등학생들은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뭐, 여기까진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낯선 풍경은 그 중 절반 정도가 앉자마자 책을 꺼내 들고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중요한 시험이라도 보러 가는 모양새다. 잠이 달아났다.

 

내 바로 옆에 앉은 초등학생은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직육면체의 부피 구하는 문제, 리터 단위를 밀리리터로 바꾸는 문제 등이 책에 빼곡히 적혀 있다. 뒷자리에 앉은 초등학생은 영어랑 씨름하고 있었다. 영어 단어의 뜻을 쓰는 문제, 영어 문장의 빈칸을 채우는 문제 등을 풀고 있었다. 20대 후반인 내가 중학교 때나 접했던 문제들이다.

 

"하루에 학원 3개 다녀요"

 

궁금증에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옆에 앉은 초등학생에게 첫 마디를 건넸다.

 

"집에 가는 길인가 보지?"

"하! 지금 학원 가는 길이에요."

 

나를 힐끔 올려다 보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짜증이 한 가득이다. 기세에 눌려 그 다음 말이 쉬이 이어지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책의 한 귀퉁이에 '○○○스쿨'이라고 새겨져 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 내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아무개군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방과 후 학원 3군데를 다닌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종합보습학원을 거쳐 영어회화를 심화학습하고 논술훈련을 받은 뒤 귀가한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해가 진작에 자취를 감춘 저녁 8시경이다.

 

힘들지는 않은지, 주위 친구들이 다 학원을 그렇게 다니는지 등 더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아무개군이 버럭 성을 내며 한 마디 한 이후 그러지 못했다.

 

"빨리 학원숙제 해야 되니깐 귀찮게 좀 하지 마세요!"

 

초조하게 밖을 내다보며 대거리했다. 학원 숙제를 다 하지 못했나 보다. 다 하지 못한 숙제의 무게가 정거장을 지나칠 때마다 무거워지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모든 말 속에 스며있다. 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묻지 않아도 전해진다.

 

열 정거장쯤 더 지나쳤을까. 양재동에서 함께 탄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내리는 문 쪽으로 모였다. 내 목적지는 제쳐두고 나도 따라 내렸다. 아이들의 발길이 머문 곳은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서울 강남구 대치동이었다.

 

아이들의 가방에는 사교육이 주렁주렁

 

지난 15일 수능성적이 공개됐다. 모든 영역에서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는 2009학년도 1-4등급 비율 상위 20개 시·군·구에 속해 있다. 서울 지역에서는 강남구와 서초구가 유일하다. 이에 앞서 작년 10월에 실시한 일제고사에서 강남지역 초등 6학년의 경우 외국어와 수학은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199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나도 밤 늦게 귀가 하곤 했다. 친구들과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신나게 놀다 보니 저녁 8~9시를 넘기기도 한 것이다. 집에 가서는 혼쭐이 났지만 뛰어 노는 데는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아이들은 하루 종일 사교육이 치이다 밤 늦게 집에 돌아간다. 힘들어 하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편한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별 수 없을 게다. 통 안에 가둬놓고 일렬로 쫙 늘어 세우려는 거센 시도 밑에서 튀는 선택을 얼마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은 터벅터벅 학원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맨 가방에는 사교육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매달린 사교육의 무게만큼 어깨는 쳐지고 성적은 비례한다. 그래서 그렇다. '자율과 경쟁'은 애초부터 불평등이요, 반인간적이다.


태그:#사교육, #초등학생, #일제고사, #대치동, #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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