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시간은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북아일랜드 데리의 시민들이 공민권을 주장하는 평화 행진을 벌이고 있다. 영국 정부의 총구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시간은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북아일랜드 데리의 시민들이 공민권을 주장하는 평화 행진을 벌이고 있다. 영국 정부의 총구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콜럼비아

관련사진보기


지난 2일 경찰이 후추나 고춧가루에서 빼낸 '캡사이신' 성분을 넣은 분사기를 집회시위 진압에 쓰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고춧가루액'을 뿌리겠다는 모양이다. 이제까지는 불법 집회 때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응했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이고 강경하게 하겠다는 것이 경찰의 방침이다.

방패를 쓰다 물대포가 나오고, 그러다 소화기도 뿌리고 형광액도 뿌리고, 그리고 이제 드디어 고춧가루로까지 진압장비가 '진화'했다.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까? 경찰 스스로 밝혔듯이 앞으로 더욱 '강경 진압'을 하겠다는 방침이다. 진화가 오히려 퇴화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찍은 <블러디 선데이>(2004)라는 영화가 있다.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의 데리라는 도시에서 벌어진,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재현한 영화다.

피의 일요일이란 영국 정부가 군인들을 동원해, 아일랜드 시위 군중에게 총탄을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사건이다. 마치 1980년 광주와 닮았다. 나는 시위를 생각할 때 이 영화를 떠올린다. 딱 한 번 보았던 영화를 여전히 떠올리는 것은 영화의 옛날과 현실의 오늘이, 영화의 영국과 현실의 한국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위는 어떻게 '불법시위'가 됐나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어떤 장면. 영국군의 총탄에 청년이 쓰러지자 쏘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그러나 총격은 멈추지 않았다.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어떤 장면. 영국군의 총탄에 청년이 쓰러지자 쏘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그러나 총격은 멈추지 않았다.
ⓒ 콜럼비아

관련사진보기



영화 <블러디 선데이>는 시위대와 군대를 교차 편집하여 양쪽의 태도를 모두 보여준다. 공민권 운동을 하는 영국 하원의원 아이반 쿠퍼는 완전한 평화적 행진을 계획하고 준비한다. 쿠퍼 의원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폭력 노선에 반대하며 비폭력만이 억압과 차별에서 벗어날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편,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지는 모든 시위는 무조건 불법시위라고 못을 박는다.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영국은 끝내 군인들을 파견한다. 총사령관 포드 소장은 평화시위란 결코 있을 수 없다며 반드시 폭력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시위대의 폭력에 즉시 반격하라고 명령을 내리고야 만다. 법과 질서를 지키겠다는 발표다. 법치국가에서 법은 그들의 편이었다.

2009년의 대한민국, 용산 참사가 벌어진 지 열하루가 지난 1월의 마지막 날에 추모 대회가 열렸다. 상복을 차려입은 행렬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의 박래군 공동집행위원장은 평화적으로 행진하겠다고 거듭 밝혔으나 경찰은 폭력시위로 변질될 수 있다며 추모 행진 자체를 경찰버스로 '원천 봉쇄'했다.

이후 서울 도심 곳곳에서 잇따랐던 추모제와 집회는 모두 불법이 되었고 진압과 연행이 일어났다. 결국 검찰은 박래군 위원장에 관해 '불법 집회를 주도했다'며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박래군 위원장은 영장심사에 응하지 않았다. '철거민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박래군 위원장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이기도 하다.

그 시위는 어떻게 '폭력시위'가 됐나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3차 추모범국민대회'가 열린 2월 7일 저녁 서울 종로 탑골공원 맞은편에서 경찰이 인도 위 어린아이, 노약자 등 시민들과 취재중인 기자들을 향해 무차별로 색소를 뿌리고 있다.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3차 추모범국민대회'가 열린 2월 7일 저녁 서울 종로 탑골공원 맞은편에서 경찰이 인도 위 어린아이, 노약자 등 시민들과 취재중인 기자들을 향해 무차별로 색소를 뿌리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정말이지 시위 현장의 공기는 살벌하다. 시위대와 경찰이 마주하고 있는 틈새, 그 좁은 공간에서는 흔히 욕설과 실랑이가 오간다. 공포와 분노 때문에 온몸의 털 하나까지 바들바들 떨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여기서 영화 <블러디 선데이>에서 느닷없이 귓가를 때리는 한 발의 총성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탕!' 시점 숏으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도대체 누가 총을 쏜 것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한다. 시위대에 숨어든 폭력분자일 수도 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한 군인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하여튼 첫 총성 이후로는 완전히 아수라장이다. 긴장의 공간이 순식간에 폭력의 공간으로 뒤바뀐다. 군인들이 무차별 난사하는 총탄에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비명과 죽음이 북아일랜드 데리의 거리를 지배한다.

용산에서 여섯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누가 불을 냈느냐고 따졌다. 철거민이냐, 경찰이냐. 화재의 책임을 놓고 싸워댔다. 검찰은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위 영화로 말하자면 첫 총탄을 누가 쏘았느냐를 따지는 일일 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평화적 행진을 벌이는 시위대를 중무장한 군인이 진압해야 했느냐는 것이다. 용산으로 말하면 절박한 철거민들을 꼭 용역업체와 특공대가 합동작전을 벌여서까지 진압해야 했느냐는 문제다.

이같이 초현실적이리만치 '강경'한 진압은 인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인터넷에 떠도는 3월 7일자 칼라TV 영상에는 전투경찰이 몰려들어 어린 여중생 둘을 방패로 인도 한복판에 가두는 기막힌 장면이 있다.

영화 <블러디 선데이>에서 "폭도가 어디 있느냐"는 통신병의 질문에 "시위대는 무조건 폭도"라고 대꾸하는 장교의 모습이 여기에 디졸브(앞의 장면이 사라지는 동안 새 장면이 페이드인 되는 것)된다. 영화나 현실이나 지배 권력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야만적이다.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기는 좀체 어려운 일이다. 끝내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그 시위는 어떻게 '폭풍'이 됐나

지난 2월 7일 오후 '용산철거민참사 희생자 제3차 추모범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해 청계광장에서 열리지 못하고, 인근 한국관광공사앞 도로에서 유가족과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지난 2월 7일 오후 '용산철거민참사 희생자 제3차 추모범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해 청계광장에서 열리지 못하고, 인근 한국관광공사앞 도로에서 유가족과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피의 일요일, 북아일랜드 데리에서는 14명의 사망자와 13명의 중상자가 났다. 영국의 법정은 영국군의 손을 들어주었고 전면 무죄판결이 났다. 총을 발사한 군인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거기다 이 대단한 '강경 진압'의 책임자들에게 여왕은 훈장을 주었다. BBC를 비롯한 언론 또한 영국 권력의 나팔수가 되었다. 영국은 폭력 시위에 단호히 대응한 정부가 되었다. 참사가 벌어진 뒤 기자회견에서 아이반 쿠퍼는 영국 정부에게 말한다. 울분과 비탄이 가득한 목소리로.

"당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이제 모든 도시의 청년들과 아이들이 공화국군에 가담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에게 폭풍이 휘몰아칠 것입니다."

실제 '피의 일요일' 사건은 아일랜드공화국군이 재무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공화국군은 아직까지 독립을 원하며 영국에 폭력으로 저항하고 있다.

다시 현실의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점점 잦아지는 시위와 점점 강경해지는 진압을 생각한다. 정부는 시위를 막고자 힘쓸 뿐, 왜 시위가 일어나는지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진정 중요한 것은 시위 뒤에 부글거리는 사회의 모순이다.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등록금에 목을 매는 학생들,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드는 사회적 소수자들, 고층아파트에 밀려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그러하다. 이런 때에 경찰이 이야기하는 시위 진압의 진화론은 답답하다.

현실에서 "정당한 법집행이었다"는 한국 경찰서장과, 영화에서 "법과 질서가 바로 세워졌다"고 자랑하는 영국 장군은 닮았다. 법으로 보호받지 못해 분노하는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대화가 아닌 주먹이었다. 법이 모든 사람의 친구일 때 법치의 원칙은 정당하다. 그러나 법이 정부만의 친구가 될 때 법치는 폭압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분노에 떨고 있는 모양새다. 반대하는 목소리를 죄다 법이란 핑계로 억누른다면,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아이반 쿠퍼의 말처럼 언젠가는 폭풍이 휘몰아치지 않을까 염려되는 이유다.


태그:#블러디 선데이, #강경진압, #용산참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