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MBC <PD수첩>에 대한 검찰 수사는 언론 고유 영역인 탐사보도에 대한 수사다. MBC <PD수첩>은 지난해 이명박 정부가 대미 수입 쇠고기 협상을 졸속으로 밀어붙이려 할 때 광우병 위험과 미국 방역체제의 문제점 등을 상세히 전달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탐사보도였다. 탐사보도의 내용은 대개 그 취재대상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탐사보도는 언론의 환경 감시 기능이 확실히 수행되는 대표적인 보도 형식이다. 탐사보도는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탐사보도를 통해 사회가 건강해지고 투명해진다. 그런데 검찰은 MBC <PD수첩>의 일부 내용을 문제 삼아 제작진을 상대로 집요한 수사를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있다. 현 정부가 검찰을 앞세워 MBC <PD수첩>을 수사하는 것은 언론의 대표적 기능을 거세하려는 시도와 같다.

 

MBC <PD수첩>제작진은 탐사보도 형식을 통해 미국에서 쇠고기의 생산, 판매 과정의 문제점을 상세히 보도,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수입 졸속 협상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MBC <PD수첩>이 미국산 쇠고기 졸속협상에 대해 광우병이 발생한 여러 나라를 탐방하는 등 포괄적으로, 균형 잡힌 시각으로 탐사 보도한 것을 현 정권은 문제 삼고 있다. 정부의 이런 비뚤어진 시각은 언론을 정부의 홍보기구로 여기는 독재 정치적 언론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장기집권을 위한 시나리오 상 절대 포기 할 수 없는 부분이란 말인가? 권력이 법치주의를 앞세워 언론영역을 침범, 훼손하려는 시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지금 이 사회에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발현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민주주의가 정상일 경우, 집권 세력이나 특정 공인은 언론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런 자세를 갖추지 않은 정부나 공직자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건을 훼손하는 것이다. 비정상적 민주주의가 발현되고 있는 현 사회에서 언론의 순기능인 저널리즘은 끝까지 보호되어야 한다. 그리고 저널리즘에 희망을 두어야 한다.

 

촛불은 성숙된 민주주의 결과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쇠고기 수입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촛불'로 폭발하자 국민에게 사과했고 정부는 미국과 추가협상을 벌여 수입 조건 등을 일부 수정, 보완했다. 그런데 촛불이 수그러들면서, 이명박 정부의 촛불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고, 미국과 쇠고기 졸속 협상을 한 공직자가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MBC <PD수첩>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여기서 현 정부의 행보에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한다. 그리고 작년 촛불이 갖는 의미에 대해 되새겨 보고, 잊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그토록 크게 타 올랐던 촛불이 집으로 돌아간 이유에 대해서도 관철해야 한다.

 

촛불 이전의 상황은 너무나 암울했다.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상황에서 정치권의 정치공학자들은 선거가 임박하게 되면 5% 이내에서 승부가 판가름 날 것이라며 계산기만 두들겼다. 진보진영은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언어로 논쟁을 벌였다.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속수무책. 상황은 흘렀고, 결과는 참담했다.

 

그런데 그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채 3개월이 안 됐는데 촛불이 켜졌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이번엔 소녀들이 가장 먼저 촛불을 들었다. 한때 이 한 몸 다 바쳐 나라를 구하겠다던 어른들이 있었다. 70,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세대다. 이들은 단군 이래 최고로 책을 많이 읽은 세대라는 말이 있듯이,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머리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본 경험이 없었다. 당연히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이 무뎠다.

 

5월 초, 광장에 모여들었던 촛불 소녀들에게 민주주의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체화된 것'이었다. 이들이 내건 대표적인 구호가 "내가 먹을 것을 왜 네가 정하냐?"였다. 핵심은 "왜 네가 정하냐?"는 것. 그들은 먹을거리에 대한 자기 권리, 먹을거리에 대한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민주화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아이들이 출현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민주화운동 40년, 민주 정부 10년의 결실이었다.

 

촛불 잦아들자, 합동으로 움직인 검찰과 경찰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 거대한 저항이 3개월씩이나 지속된 것일까? 87년 6월 항쟁 당시 사람들이 내건 구호는 오직 하나,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였다. 집권세력이 무릎을 꿇고, '직선제' 요구를 들어주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미선·효순 사망과 탄핵정국 땐, 대선과 총선이 코앞에 있었다. 표로 심판할 기회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거리에서 물러섰다. 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대선을 치른 지 6개월, 총선을 치른 지 겨우 한 달 반이 지났을 뿐이었다. 계속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내는 일 말고는 기댈 게 없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합법적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 집권한 정권이었다. 시민들은 촛불을 통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슴 벅찬 기쁨과 가능성을 느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의 힘을 무너뜨리는 자기모순을 범할 순 없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보수층을 결집하고 새로운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통치 전략을 급격히 수정했다. 역대 수구 정권을 지탱한 것이 공안기관에 의한 공포 정치였음을 그들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촛불이 잦아들자마자 검·경이 합동으로 움직였다. 검찰은 조중동 불매운동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경찰은 유모차 부대 엄마들을 '아동학대죄'라는 이름으로 조사했다. KBS 정연주 사장을 내칠 때, 그저 줄 서 있는 사람들 자리 만들어주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언론을 장악하고 공안기관의 힘을 빌려서야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MBC <PD수첩>을 이토록 집요하게 물고 뜯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현재 경제가 위기인 것만은 확실하다.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의 결과가 어땠나?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했다. 히틀러는 쿠데타로 집권한 것이 아니었다. 독일 국민들이 직접 뽑아줬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민주주의를 역진하고 있는 지금의 기세로 봐서 어쩌면 20~30년 뒤로 후퇴한 파시즘 정권이나 그에 준하는 수구 정권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단지 MBC <PD수첩>에 대한 정치수사, 표적수사 하나만을 문제 삼을 수 없다. 지금 이 사회에 시민정신은 더욱 불을 밝혀야 한다.

 

나는 얼마 전 <PD저널>에 '비정규직이 정규직 투쟁에 합석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 한 적이 있다. 비정규직 독립PD가 방송사 정규직PD들의 투쟁 전선에  동참하는 것을 보고 궁금해 하는 차원을 넘어 말도 안 되는 글조차 지면에 오르기에 그 이유를 밝힌 칼럼이었다. 그 칼럼에 두 가지 이유를 말했는데 그 중 하나가 '시민의 덕'이다. 지금 이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요소가 '시민의 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이 지면을 통해 '시민의 덕'을 얘기하고자 한다.

 

시민의 덕(civic virtue)을 찾아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의 명성이 아직도 자자한 것은 그가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줌으로써 인간이 동물계에서 결정적인 '비교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불은 인간이 얻은 최대의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비교우위는 인간과 여타 동물들 사이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21세기, 인간 그 자신의 세계에서도 누가 더 큰불을 가졌는가가 보이지 않는 계급을 나눈다. 여기서 불이란 부(富)와 권력(勸力)이다. 보다 큰불을 가진 자는 기득권으로 득세하여 때론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작은 불을 가진 자를 핍박하고, 작은 불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올가미를 씌우려 애쓴다.

 

그런데 플라톤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 전해지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는 조금 색다른 대목이 나온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줄 선물을 훔치기 위해 신들의 세계로 잠입했을 때 그가 훔치고자 한 물목이 오로지 '불'하나 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의중에 두었던 또 다른 물목은 '시민의 덕(civic virtue)'이다. 그러나 그는 이 품목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는 절음발이 공예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 들어가 '불'을 훔치는 데는 성공하지만, '시민의 덕'은 제우스 방에 있었기 때문에 대도(大盜) 프로메테우스 조차도 그 품목만큼은 절취하지 못한다. 그가 의도했던 또 하나의 다른 선물은 결국 배달되지 않은 '선물'로 남는다.

 

이 배달되지 않은 선물을 어찌 할 것인가? 배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아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 손으로라도 그 빠진 선물을 확보해야 하는가? 당대 논변수사학의 거두 프로타고라스가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소크라테스 일행에게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런 문맥에서다.

 

그 빠진 선물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귀중한 것이다. 인간사회의 정의, 공동체를 위한 덕목,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능력과 용기와 실천력, 이런 것들이 그 '시민의 덕'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배달되지 않은 선물은 인간이 제 손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프로타고라스는 주장한다.

 

그 배달되지 않은 선물의 빈자리가 너무도 커 보이는 곳이 바로 지금 한국사회다. 인간은 '불' 덕분에 먹고 살 일상의 기술은 확보했을지 모르지만 불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시민의 덕'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프로타고라스의 문제 제기였다면, 이는 프로타고라스의 시대를 떠나 현대 사회의 전반의 문제로 부상한다. 그러나 그 문제가 뼈아픈 성찰의 화두로, 사회 경영의 원칙적 질문으로, 교육의 근본적 과제로 진지하게 제기되고 사회 전체가 '시민의 덕목'을 키울 방도를 찾아야 할 곳은 지구촌의 다른 어느 동네보다도 바로 우리 동네, 우리 사회다.

 

민주주의는 가만히 앉아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지면을 빌려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덕주의적 설교가 아니라 민주시민사회를 만들고 시민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 이상으로 지금 우리에게 절박하고 절실한 명령은 없다는 것이다. 이 빠진 부분을 메우고 시민적 역량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왕조사회의 신민(臣民)이었다가 식민시대를 거쳐 졸지에 뭐가 뭔지도 모르고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바뀐 것이 근대 한국인의 정치적 운명이었다면, 이 운명의 전개에서 거의 송두리째 빠진 것이 시민으로서의 '성숙'이라는 과정이다.

 

그러나 한국현대사를 살펴보면, 한국의 대중들은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다시 일어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7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전쟁 당시 열 살짜리 꼬마들이 스무 살 대학생이 되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79년 부마항쟁도 유신이 선포된 지 7년 만에 일어났다. 광주의 피바람을 겪고, 87년 6월 항쟁을 이뤄낸 것도 꼭 7년 만의 일이었다. 대중들은 늘 다시 일어났다. 길어야 10년이었다.

 

앞으로 남은 4년은 커다란 위기이자 기회다. 우리는 이번에 민주주의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만히 앉아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크게 깨달았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우선 각자가 기대하고 있는 정책과 원칙이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적합한지, 지금부터 힘을 모아 나가야 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 '온건함'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과 동의어다.

덧붙이는 글 | 최영기 기자는 한국독립PD협회장입니다. 


태그:#PD수첩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9,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이 기자의 최신기사오케이 대통령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