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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8일 자전거를 타고 백련산에 올랐다가 서대문구 응암동 재개발지역을 둘러보고 내려와 점심을 먹고는, 오후 4시 청계광장에서 예정된 용산참사 6차범국민추모대회에 참여하기 전에 모교를 오랜만에 찾았습니다. 모교라는 말이 영 어색하고 달갑지 않지만 그곳을 꼭 찾아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인근을 찾은 김에 겸사겸사 모교를 찾아갔습니다. 다시 페달을 밟아 홍제천을 따라 내려와 홍남교에서 연희고개를 넘어 연희삼거리로 내려가는 바람에 길을 헤매기는 했지만, 옛 기억을 더듬어 모래내길과 재개발로 철거될 남가좌동 일대 소형주택가와 정겨운 골목길, 백련시장을 지나 남가좌사거리를 찾아냈습니다.

학교 앞 길 거북골길이라 한다.
 학교 앞 길 거북골길이라 한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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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간 수없이 오간 사거리 일대는 옛모습도 남아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한 지 6년이나 지나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거북골길이라 이름붙은 학교 앞 2차선 도로는 그대로였지만, 즐겨찾던 그 유명한 엄마손 떡볶이집도 오락실도 당구장도 카페도 술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군인들에게도 먹인다는 미국산 수입쇠고기를 전문으로 팔아대는 정육점이 자리하고 있더군요.

그 학교 앞 길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늘 같은 자리에서 학생들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와 마주했습니다. 그는 1991년 4월 26일 '학원자주화 완전승리와 총학생회장 구출 투쟁 및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시위 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난타 당해 심장막 내출혈로 병원으로 후송중 사망한 강경대 열사입니다.

학교 앞 한편에 강경대 열사 동판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 앞 한편에 강경대 열사 동판이 자리하고 있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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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 한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가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강경대 열사의 동판에는 수많은 젊은 청년, 학생들이 어깨를 두르고 열사의 원통한 죽음을 부르짖고 그를 살해한 군사정권의 폭압을 규탄하는 추모행렬의 모습을 하고 있고, 강경대 열사의 가슴에는 '제폭구민'이란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원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 4글자가.

강경대 열사의 가슴에 제폭구민이라 글귀가 선하다.
 강경대 열사의 가슴에 제폭구민이라 글귀가 선하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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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학번 새내기 시절 강경대 열사가 어떤 분인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4월 그날이 되니 학생회관과 과방에는 분향소가 차려졌고 그 자리에 강경대 열사의 영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내에서 집회(출정식)를 마친 학과 선배들과 동기들과 함께 학교 앞 그 비좁은 길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싸웠습니다.

매년 그렇듯이 경찰의 봉쇄로 남가좌사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강경대 열사 동판이 자리한 그 길에서 줄지은 대오와 깃발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매캐한 최루가스를 마시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한참 그렇게 있다 다시 교내로 돌아와 정리집회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http://www.memorial.or.kr/home.htm
* 사건 개요 http://www.memorial.or.kr/kangintroduce02.htm

지금도 누군가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지금도 누군가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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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이는...
 강경대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이는...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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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좁은 길에서 학우들과 함께 폭거에 맞서 싸웠었다....
 이 비좁은 길에서 학우들과 함께 폭거에 맞서 싸웠었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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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철없어 왜 집회와 시위를 해야하는지, '선봉'이란 꼬리표가 따라붙는 학과를 다닌다는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잘 몰랐습니다. 다만 한 젊은이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경찰과 광주를 학살한 정권에 의해 죽임 당했고, 그 억울함과 폭거는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민중들에게 계속되고 있고, 망할 등록금은 선배들이 아무리 싸워도 주체없이 치솟고 학교도 학생들이 주인이 아니고, 그래서 세상은 참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은 살며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는 아직도...
 학교 운동장에는 아직도...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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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학살자를 비호하는 정권 퇴진을 부르짖었다.
 그때 우리는 학살자를 비호하는 정권 퇴진을 부르짖었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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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누군가 싸워야 하고 학우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과 혈기도 발동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에게도 당시 세상은 지금처럼 모멸차고 가혹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996년 3월 연세대 노수석 열사가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서총련 결의대회'에서 경찰의 살인적 진압작전에 사망하는 날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한 때가 정신없이 지나고 마주한 강경대 열사 앞에서, 1991년과 별반 다름없이 지금도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제물삼고 있는 이 암흑세상을 어떻게 해야할지 참으로 고민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부활한 백골단과 '과격-불법시위-준법질서' 운운하는 경찰의 살인진압으로 철거민을 집단살해하고도 반성은커녕 그 영정까지 짓밟고 유가족과 추모군중들을 폭력진압하는 살인정권이 눈 앞에서 활개를 치는 모습 때문에 말입니다.

일말의 양심과 영혼, 인간성 조차 철저히 거세된 사회에서 이 억울함과 폭거에 맞서 싸울 이들이 있는게 다행이다 싶지만, 그것도 예전같지 않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다들 어디로 숨은건지 어떻게 그냥 되는대로 살고들 있는건지? 그냥 긴 책망의 한숨만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 한숨을 뒤로하고 학교를 잠시 둘러보고 나와 다시 페달을 밟아 홍제천을 거슬러 올라 북악터널을 통해 찌질한 청와대를 지나 경찰들로 바글바글한 청계광장으로 나아갔습니다.

1991년 5월 투쟁, 출처 :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1991년 5월 투쟁, 출처 :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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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진 출처 :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1991년 5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진 출처 :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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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강경대열사, #용산참사, #대학, #강경대, #명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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