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려대학교 전경
 고려대학교 전경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손님, 타시면 안됩니다."

"예?"
"글쎄, 타시면 안 됩니다."
"왜요?"

"저기 계신 분이 타야 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제가 먼저 잡았잖아요."
"그래도 저기 계신 분이 타야 합니다."
"왜요?"

"제가 왜 안 됩니까? 차별하는 겁니까?"
"차별은 아닙니다."
"그럼 이유가 뭡니까? 차가 사고라도 났습니까?"
"사고도 아닙니다."

"그럼 이유가 뭡니까?"
"손님은 안 되는데, 저기 저 분은 됩니다."
"그게 차별 아닙니까?"
"차별하는 거 결코 아닙니다."

"답답하시네. 왜 안 되는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보세요."
"하여튼 차별은 아닙니다."
"아니, 제가 먼저 잡았는데 왜 타면 안되냐구요!"
"영업비밀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나흘 동안 이어지는 '동어반복'

손병두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이 26일 오전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려대학교의 고교등급제 실시 의혹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손병두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이 26일 오전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려대학교의 고교등급제 실시 의혹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박상규

관련사진보기

26일 오후 1시 고려대는 백주년기념관에서 고교등급제 의혹에 대한 해명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요지는 간단합니다. 서태열 입학처장은 "고교등급제나 특목고 우대를 일체 한 적 없다, 행정상 실수나 부정을 자행하였다는 의혹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서두는 "학부모와 수험생에게 혼란을 끼친 점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고교등급제, 입시부정, 입시사고 등 여러 가지 의혹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증거로는 ▲ 교과 등급이 낮은 일반고 학생이 합격하고, 교과 등급이 높은 외고 학생이 불합격한 사례 ▲ 외고 평균 합격률 57.5%보다 높은 합격률을 기록한 일반고가 471개라는 점 등을 제시합니다. 최상위권 일반고 학생은 떨어지고 낮은 교과성적의 외고생은 합격하면서 '고교등급제'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고 말한 겁니다.

비교과 영역이 당락의 변수라는 예의 주장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교과 등급이 우수하더라도 비교과 성적이 나쁘면 탈락할 수 있다"는 레퍼토리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주목받았던 실질반영비율, α값, K값 등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고려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쇠라고 지적했던 부분은 주머니에 감춰둔 채, 결백을 외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26일 처음 나온 게 아닙니다. 23일 서태열 고려대 입학처장은 <주간조선>의 지면을 빌어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25일엔 손병두 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이 국회에서 유사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26일 오전에 열린 대교협 이사회에서 손병두 회장은 "고려대는 고교별로 차등해 일률적으로 가점 또는 감점을 하지 않았다"며 "고교등급제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특목고 우대를 했다는 일부 언론의 주장도 고려대 측의 소명자료를 보면 반론이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다르지만, 내용은 동일합니다. 그것도 4일 동안 같은 이야기만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고려대든 대교협이든 '가재는 게 편'임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의문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반복해서 말하면 간혹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기도 하나, 이번 경우는 영 아닙니다. 들어도 들어도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고려대는 교과등급이 낮아도 합격한 일반고생의 사례가 고교등급제의 반박 증거라고 말하는데, 이건 '교과 90% 비교과 10%' 반영비율이 사실은 '교과 10% 비교과 90%'이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즉, 교과를 90% 반영한다고 했지만 실질반영비율은 90%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고려대는 해명 기자회견에서 실질반영비율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외고보다 높은 합격률을 기록한 일반고가 있다느니, 일반고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강남의 모 외고가 있다느니, 일반고 학생과 외고 학생의 합격률이 각각 52.4%와 57.5%로 비슷하다느니 말하면서 고교등급제가 아니라고 반박하지만, 이건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고교등급제 의혹이 처음 불거진 작년부터 제기되었던 의문이 그겁니다. 지난 23일 권영길 의원실이 공개한 두 학생의 학생부가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   고대 수시에서 합격한 외고생과 불합격한 일반고생의 학생부 비교
 * 고대 수시에서 합격한 외고생과 불합격한 일반고생의 학생부 비교
ⓒ 권영길의원실

관련사진보기


그림에 나와 있는 내신등급, 출결사항, 수상실적, 봉사활동 및 자치활동 등을 비교해보면, 일반고 학생이 외고 학생보다 우수합니다. 일반고 학생의 내신등급은 1.5등급인데, 외고생은 5.8등급입니다. 그런데도 일반고 학생은 불합격되고, 외고 학생은 합격했습니다.

고려대는 비교과에서 당락이 갈렸다고 주장합니다. 위 그림에서 비교과가 우수한 학생은 누가 봐도 일반고 학생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택시는 선착순이고, 대학은 성적순이라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고려대 앞에 가면 상식이 무너집니다.

10일 설명은 이해되고, 13일 설명은 이해 안되나?

그렇다고 대교협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도 아닙니다. 고려대 의혹을 풀기 위해 대교협 대학윤리위원회가 지난 13일에 개최되었는데, "고려대 입학처장의 설명으로는 제기된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라고 결정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즉각적이고 명확한 소명을 하도록 고려대에 요청합니다.

* 고려대 설명을 들은 13일 대교협 윤리위원회의 결정사항(대교협 보도자료 중)
 * 고려대 설명을 들은 13일 대교협 윤리위원회의 결정사항(대교협 보도자료 중)
ⓒ 송경원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13일에 있었던 서태열 입학처장의 설명은 23일 <주간조선>에 보도된 이야기와 동일합니다. 아니, 보도는 23일에 되었으나 기자와의 인터뷰는 10일에 있었기 때문에, 서태열 입학처장은 <주간조선>에 먼저 말하고, 3일 후 대학윤리위원회에 출석하여 거의 똑같은 말을 합니다. 이걸 대교협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려대가 고교등급제를 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같은 말을 들었는데, 13일에는 잘 모르겠었고 지금은 이해된다는 투입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이해한 만큼 그대로 대교협의 언어로 국민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교협 손병두 회장은 26일의 이사회에서 고려대와 거의 유사한 발언만 하고 자리를 뜹니다. 대신 "고려대가 직접 국민을 상대로 설명회를 열어 의혹에 대해 진솔하게 밝히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권고했다"고 밝힙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입니다. 대교협은 4차례 윤리위원회를 열어 고려대의 소명을 들었다고 하는데, 고려대의 설명을 그대로 따라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나 감히 추정해봅니다. 이런 대교협이 앞으로 대학입시를 계속 관장한다고 하니, 심히 우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재현하면 금방 검증됩니다

박종훈 경남도교육위원과 민태식 변호사는 지난 16일 오전 경남도교육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려대의 입시부정 의혹과 관련한 집단 소송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박종훈 경남도교육위원과 민태식 변호사는 지난 16일 오전 경남도교육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려대의 입시부정 의혹과 관련한 집단 소송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합격한 학생과 탈락한 학생의 학생부를 보고 또 봅니다. 고려대의 해명도 계속해서 살핍니다. 봐도 봐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거 고려대 행사 참여 기록이 있는 학생을 합격시킨 거 아니야'라는 억측도 합니다. 머리를 탓하기도 합니다. 누가 속시원히 설명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재현해보면 됩니다. 논문의 내용이 이상하다는 의혹이 있을 때, 다른 연구자가 재현하면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려대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의문을 표시한다면, 고려대는 실질반영비율이나 상수값 등을 공개하면 됩니다. 그걸 전국 2190개 고등학교나 1493개 일반계 고교 선생님들이 자기 학교 학생들의 기록을 넣어 돌려보면 어떻게 해서 합격했고 불합격했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뭐, '영업비밀'을 공개하는 게 난처하다면, 고교 진학지도 담당 선생님이나 다른 대학 입시관계자 몇몇을 불러 수치를 보여주고 재현해보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러면 되는데, 고려대는 결백만 주장하면서 믿어달라고 외칩니다. 대교협은 "고교등급제 안 했답니다"라고 거들 뿐입니다. 교과부는 수수방관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서 탈락한 학생들의 억울함은 커져만 갑니다. 학생의 잠재력을 신장시키는 게 교육인데 교육부와 대교협, 고려대 삼형제는 학생의 원통함만 키우고 있습니다.


태그:#고교등급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러 교육기관에서 잠깐잠깐 일했고 지금은 정의당 정책위원회에 있다. 꼰대 되지 않으려 애쓴다는데, 글쎄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