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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서울 중앙지방법원.
 서울 서초동 서울 중앙지방법원.
ⓒ 김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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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식의 실패는 죽음이다."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은 누구나 기억할 말입니다. 경계근무를 마치고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식당으로 갔는데, 밥이나 반찬이 떨어졌을 때 그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엔 "전쟁에는 실패해도 배식에 실패하면 용서하지 못한다"는 농담도 곧잘 했습니다.

법원에 들어와 보니 배식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배당'이었습니다. 사건 배당은 법원의 생명인 공정성을 담보하는 관문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건의 성향이나 난이도 등에서 특정 재판부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사건을 배당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고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가 배당의 최종 책임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군대 배식보다 중요한 법원의 사건 '배당'

작년에 제가 민사재판부의 배당업무를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번은 어느 재판장으로부터 항의성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재판부에만 복잡한 사건이 배당되는 것 같다"는 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현재 법원의 사건 배당 방식엔 자의성이 개입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자 그 재판장은 이내 수긍하였습니다.

그보다 훨씬 오래 전 일입니다. 형사항소부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사실심의 마지막인 항소심에서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은 형을 깎아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법원은 법률심이라 양형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는 재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노력 중의 하나가 사건 배당을 잘 받는 것이었습니다. 변호인들은 재판장들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재판부를 찾아냈습니다. 구속 피고인들 사이에서는 "○부는 형이 세니 그 재판부만 피하면 실형을 면한다"는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까지 돌았고, 특정 재판부에 배당을 원한다는 가족과 변호인들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건배당이 전산시스템으로 바뀌면서 특정인의 입김이 개입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관련 규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대법원 재판예규에 따르면 사건의 "배당순위번호의 부여는 사건배당 주관자(법원장 또는 수석부장판사)의 임의성이 배제되는 방법"을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배당은 "재판부의 배당순서에 따라 사건 1건씩을 각 재판부에 배당순위번호의 순서에 따라 배정"합니다.

쉽게 말해 재판부가 사건을 순서대로 1건씩 돌아가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단 의료, 교통, 성폭력 등 전담사건은 전담 재판부로, 이미 재판 중인 사건과 관련사건이 있으면 관련 재판부에서 맡게 됩니다.

지금의 시스템은 사건 수, 전담사건 유무, 관련사건의 유무, 재심사건 유무 등 조건만 입력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배당을 합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아닐지라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합리적이고 공정한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사건 배당 공정성 시비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이로써 법원에서 사건배당을 향한 고민은 끝이 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제(23일)부터 언론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일어난 이른바 '촛불사건 배당'을 놓고 법원의 공정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특정 재판부에 촛불사건 몰아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도 예외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일입니다.

대법원 재판 예규에는 이른바 '중요사건'이 있습니다. 중요사건이란 국회의원, 판검사 등이 피고인인 사건이나 언론 보도 사건 중 사안이 중대하여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 등을 일컫습니다. 중요사건은 소속 과장이 법원행정처에 사건이 접수된 사항과 종국 결과를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적시처리가 필요한 중요사건'으로 선정된 사건은 사건의 전문성, 복잡성, 처리 시한, 재판장의 인사이동 가능성, 현재 업무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재판부를 지정하여 배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배당을 하지 않고 배당권자가 재판부를 지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촛불집회 사건들도 중요사건으로 분류되어 일반적인 사건 배당이 아닌 '특별배당' 방식으로 재판부가 지정되었던 것입니다.

법원측은 촛불 사건 배당 논란에 대해 "정치적 외압은 없었고, 중요사건 처리 절차에 따른 정상적인 배당이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고 합니다. 언론 보도를 전부 사실로 믿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의심이 가는 구석이 적지 않습니다.

'촛불 사건', 중요사건이라고 특정 재판부 몰아주기 당연?

먼저, 중요사건이라고 해서 특정 재판부에만 몰아서 배당해야 하는가입니다. 법원은 촛불집회 사건들을 관련 사건으로 묶어서 한 재판부로 배당했고, 여기에는 여러 재판부가 판결할 경우 양형의 편차가 날 것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집회에 참석한 사건들이 관련사건이 된다는 점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고, 고참급인 부장판사가 있는 재판부로만 배당할 타당한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또 다른 의문이 드는 것은 촛불사건을 중요사건으로 특별배당하였다가 뒤늦게 일반배당으로 돌린 과정입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선 판사들의 항의를 받은 후에 법원 수뇌부가 촛불사건을 일반배당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특별배당의 문제점을 뒤늦게 '시정'한 것인지, 아니면 특별배당의 필요성이 없어져서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어느 쪽이거나 사건배당의 예외를 적용하는 데 법원이 신중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외압설' '코드 배당'...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언론에서는 외압이 있었다거나 현 정부의 코드에 맞춘 사건 배당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명확하지 않은 법원측의 해명을 들어볼 때 법원 안에 있는 저마저도 그러한 의심을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또다시 법원은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법원이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법정을 잘 꾸미고, 법정에서 판사가 공손한 말을 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법원이 공정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어야 합니다.

99명의 판사가 공정해도, 1명이 불공정하면 법원 전체가 욕을 먹는 법입니다. 법원 구성원 전체가 양심을 지키려 해도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가 있으면 법원은 양심없는 집단으로 매도됩니다. 이번 사건은 반면교사가 될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 배식의 실패가 죽음이라면, 법원이 공정한 사건배당에 실패하면 돌아오는 것은 불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용국 기자는 법원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사건배당, #법원, #촛불집회, #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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