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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이 들어차고 음악이 흐르는 순간 유적지는 살아있는 극장으로 다시 태어난다.
▲ 오데옹 극장 관객이 들어차고 음악이 흐르는 순간 유적지는 살아있는 극장으로 다시 태어난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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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여행할 때 가장 긴장하는 순간이 있다. 대도시, 그것도 로마나 프라하처럼 좁고 꼬불꼬불한 옛 길을 있는 그대로 살려놓아 온통 일방통행과 미로로 엮여 있는 오래된 대도시로 입성하는 날이 그렇다.

지금도 차를 운전해서 서울시내에 들어서는 걸 무서워하는 우리 부부가 지도 한 장 들고 타국의 낯선 대도시에 도착한 순간. 뭐라 할까. 온 몸의 감각기관이 몽땅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한꺼번에 달려드는 형국이랄까. 그래도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일은 그것 역시 여행이다 생각하자면 또 그 뿐이다. 하지만 진정 곤란한 건 주차문제다. 특히 차에서 먹고 자는 가난한 여행자의 경우엔.

그래서 주로 우린 주말에 대도시를 방문한다. 현지인들이 도심을 빠져나가는 금요일 저녁에 도착해서 그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월요일 이른 아침에 그 도시를 떠나는 것이다.

사실 이건 기가 막힌 타이밍의 예술이다. 왜냐면 주말 도심은 주차가 쉬울 뿐만 아니라, 각종 공연이나 행사, 파티 등으로 도시가 볼거리들로 북적대며, 결정적으로는 유럽 대부분 도시들이 주말에 한해 도심 주차가 무료이기 때문이다.

아테네에 온 아메리카 인디언?
 아테네에 온 아메리카 인디언?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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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 도착한 날도 금요일 밤이었다. 일단 주차부터 하느라 허둥지둥 찾아든 공원. 주차비가 공짜임은 물론 눈 앞 언덕 위에 황금빛 신전이 둥실 있었다. 바로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운수 좋은 날’이다.

그 밤 그곳에 올랐다. 좁고 미로 같은 길, 황금빛 카페와 레스토랑은 신전을 찾아 나선 지친 나그네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난 밤 박물관에서 몰래 꺼내온 것 같은 고대 그리스 조각상들, 도자기나 장신구들, 온갖 기념품들을 펼쳐두고 흥정하는 장사꾼들, 그리고 그 사이를 흘러 다니는 여행자들까지. 고대 그리스인들이 길고 긴 여행 끝에 신탁을 받고자 도착했던 그 밤들처럼 거리는 그렇게 술렁였다. 아내와 난 이 모든 풍경이 한꺼번에 마음에 들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어깨를 쳤다. 아직 신화의 시간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내 눈 앞에서 그가 뭔가를 흔들어 보였다. 카드였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왕과 왕비와 왕자가 그려있는 카드가 아니라 맨몸의 그리스 여인들이 누워있거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춘화가 들어있는 나름대로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이었다.

하나 살까. 잠시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첫날부터 무엇을 사면 꼭 후회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다시 그 길을 걸었다. 제우스 신전을 돌아 아크로폴리스로 향하던 길, 화려한 파티 의상을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북적이고 있다. 순간, 장기여행자의 예민한 감각이 발동한다. 사람들을 헤치고 파티 장소로 들어섰다. 막 결혼서약을 마친 신랑신부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넘치도록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이방인의 축하인사 한 꼭지를 더해준다.

 장기여행자의 예민한 감각이 발동하는 순간
▲ 결혼식 장기여행자의 예민한 감각이 발동하는 순간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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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린 한국에서 온 여행자야. 너희 커플이 그리스에서 본 첫 신랑신부인 거 있지. 멋진 만남이지 않아? 지구 반대편 친구들을 대표해서 행운과 축복을 전하고 싶어.” 

신랑신부가 싫어할 리 없다. 아니,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맘껏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권했다. 그래서 우리도 좋아졌다. 식탁에는 그리스 전통 음식들로 가득했으니까. 주머니사정 염려할 필요 없는 행복한 점심 한 끼. 오늘도 운수 좋은 날이다.

길 위에서는 이상한 법칙이 있다. 한 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도시에서는 계속 그런 일들이 이어진다. 또 반대로 첫인상이 나쁘면 이상하게 기차를 놓치거나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사기를 당하는 등 속상한 일들만 생기는 것이다.

아테네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한 행운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전날 밤의 그 미로 같던 길을 따라 ‘높게 우뚝 솟은 곳(아크로폴리스)’까지 이어졌다.

‘오늘은 6월 5일 ‘환경의 날’,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매표소 앞에 놓인 입간판을 보며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우리 부부의 한 쪽 가슴이 연한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할지라도 이렇게까지…. 그런데 환경의 날이라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 입장료를 환경세로 돌려야하는 것 아닌가? 잠깐 머리를 갸우뚱해보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오늘은 나그네 부부에게 억세게 운수 좋은 날이라는 것.

 6월 5일 환경의 날과 매월 첫째주 일요일은 공짜!
▲ 파르테논 신전 6월 5일 환경의 날과 매월 첫째주 일요일은 공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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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크로폴리스 아래로 펼쳐진 아테네
▲ 높게 우뚝 솟은 곳 아크로폴리스 아래로 펼쳐진 아테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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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관광객은 너무 많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입구에 위치한 니케 신전에서 파르테논 신전까지 앞 사람 엉덩이만 보며 걸어야할 지경이었다. 둘레 160m에 높이 10m의 기둥 46개가 떠받들고 선 거대한 신전 파르테논. 2,500여 년 전에 태어나 서양 건축양식의 원형이 되었다는 이 위대한 건축물은 세월에 힘이 부치는 듯 다소 노쇠해 보였다. 아마 복구공사를 하느라 사방에 세워둔 철 구조물 때문에 더 그랬으리라.

“겁나게 커버리네이. 근디 잘 안 보인다. 울타리 땜시.”

전라도 사투리를 ‘허벌나게 혀브리는’ 모자(母子)를 만났다. 그리스에서 처음 보는 한국인이었다. 터키와 그리스를 20일 정도 둘러보시고 내일 귀국한다는데 터키에 비해 그리스는 별로란다. 여행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터키에 비해 그리스가 좀 심심하긴 한 편이다. 그래도 참 좋아 보인다. 엄마와 아들이 함께 여행하는 모습.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댄서들.
▲ 어린 발레리나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댄서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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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오데옹(Herod Atticus Odeon)에서 발레공연을 봤다. 5일 전에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노래했다는데, 그날은 14명의 어린 댄서들의 조금은 서툴지만 아름다운 공연이 있었다. 낮에는 그냥 유적지였던 곳에 관객이 들어차고 음악이 흐르자 극장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자그마치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자리 같은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곳. 아테네만의 매력이 아닐까.

다시 다음날, 또 같은 길을 따라 구 시가지인 ‘플라카’를 돌아다닌다. 디오니소스 극장, 고대 아고라, 로마아고라, 헤파이스토스 신전, 바람의 탑…. 평소 게으른 여행자가 발바닥에 불이 나게 바빠진 이유가 있다.

어제는 ‘환경의 날’이라 무료였는데, 오늘은 첫째 주 일요일이라서 무료란다. 꼭 무엇에 홀린 것만 같다. 알 수가 없다. 매일이 어찌 이리 운수 좋은 날인지. 아테나 여신께서 동양에서 온 여행자를 어여삐 보시였나? 그렇지 않고서야, 하하.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 6월의 따가운 그리스 햇살과 우산 하나.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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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할 건 솔직해야 한다. 당연히 나는 아테네에 도착해 조금 실망을 했다. 아테네는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상상해왔던 곳이 아니었다. 어느 날에 그 옛날 신화의 시대를 플라카 지역에 몰아넣고 그 후론 먹고 사는 일이 너무나 바빠 돌아볼 겨를도 없는…. 상상해왔던 풍경과 현실의 풍경은 늘 그렇게 다른 법이다. 아니, 여행이란 것 자체가 도착하는 순간에 상상해왔던 것들을 깨고, 그 상처 위에 낯설음을 새로이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현대 그리스인들이 우르르 출근하는 월요일,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아테네를 빠져나왔다. 이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곧장 달려갈 생각이다. 그곳에서 우린 애마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로 가는 여객선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잊어버린 것이 있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면서도 결국 첫날의 그 섹시한 카드를 사지 못했다. 그날 그 순간 샀어야 하는 건데…. 가난한 여행자는 늘 이런 후회를 반복한다.

덧붙이는 글 | 양학용 기자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나 967일 동안 세계 47개국을 여행한 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책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예담)로 묶어냈습니다. [유럽 중고차여행]은 독일에서 중고차를 구입한 후 5개월 동안 19개국 19만 킬로를 여행한 기록입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중고차여행, #아테네, #그리스, #유럽여행, #파르테논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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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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