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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전에 그리고 역사에 길이 기념되는 사람

오늘은 인류의 역사 그 가운데에서도 인권사에 길이 남을 노예해방선언을 이끌어낸 미국 제16대 대통령인 링컨이 탄생한 2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1863년 1월 1일부터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특정 지역에서 노예로 예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킬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기억될 이 명문화된 선언의 주인공인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월 1일자로, 위와 같이 시작되는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공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위대한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충무공 이순신이나 가장 영민하고 어진 임금으로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는 조선조 세종대왕 같은 인물도 탄생일 혹은 업적을 이루어낸 날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곤 하는데, 정작 그의 젊은 시절 주 무대가 되었던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의 모습은 다소 평온해 보인다. (적어도 미국언론을 통해서 보이는 느낌이 그렇다.)

200주년이라는 뜻 깊은 행사도 할 법한데 워낙 경제위기의 흔적과 상처가 큰 것일까? 아니면 시끌벅적한 이벤트를 하고 있는데 내가 그 분위기를 실제로 느끼지 못해서일까? 어찌되었든 오늘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어낸 인물로 추억되는 링컨은 지금처럼 그렇게 조용히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촌뜨기 변호사

어렸을 적 위인전을 읽어보았던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링컨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하고 가난했다. 친모를 포함해 가족 구성원이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여러 번씩 목격해야 했으며 그나마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그의 아버지는 문맹에 가까운 무능력한 산골짜기 목수이자 농군일 뿐이었다. 그렇게 그의 어린 시절의 배경을 되뇌여보면 그가 어떻게 자라났을 수밖에 없었는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링컨은 달랐다. 어린 시절 겪었던 깊은 슬픔과 좌절감 그리고 그를 자신과 비슷한 운명으로 이끌고자 했던 아버지와의 생활들까지도 그는 스스로 감싸 안았다. 훗날 최고의 명연설과 유머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그의 중년시절은 어쩌면 예측하기 어려울 법도 하지만 우리는 깊은 슬픔과 좌절감 그리고 번뇌를 통해서 긍정의 힘을 추출해 낸 그의 인생을 어렵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다.

초등학교를 조금 다니는 것으로 가방끈을 자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스물두 살에 집을 나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게 된다. 배운 것이 일천하고 책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던 가난한 환경에 둘러싸였지만 그의 집요한 삶의 목표와 희망은 그런 것을 뛰어넘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읽는 법을 배우고 새어머니의 관심과 배려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오랜 시도 끝에 그는 마침내 변호사의 꿈을 이루게 된다.

유난히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의 열망과 선천적으로 타고난 말솜씨, 그리고 승부에 대한 강한 의욕들이 그의 꿈을 이루는 좋은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수 없는 학벌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200년 전이었던 그 당시에도 많이 혹은 어느 정도 배운 사람들이 지금보다 적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링컨은 짧은 학력으로 인해 톡톡한 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시 일리노이 주의 주도인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업무를 하고 있는 자들은 링컨을 향해 ‘뜨내기 변호사’, ‘이류변호사’ 라는 낙인을 찍으며 그를 무시하고 괄시했다. 인간인 이상 콤플렉스와 스트레스가 정말 하나도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가 그러한 역경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잠못들게 만드는 꿈과 비전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실패와 고비를 넘기며 결국 대통령까지

링컨의 명언 혹은 어록들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하고 있다. 여러 차례 낙방했던 변호사시험의 이력을 시작으로 하원의원 낙선, 상원의원 낙선 등 그의 청년시절과 장년시절은 한 마디로 실패로 요약되는 듯싶었다. (실제로 링컨 평전이나 그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책들을 보면 비교적 단편적으로 링컨이 ‘오뚜기’처럼 일어난 것과 같은 부분을 집중해서 기록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결과측면에서만 바라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읽었던 책 가운데 그에 대해서 가장 비평적이면서도 객관화된 서술로 주목을 받은 [권력의 조건]이라는 책을 보면 그는 실패 뒤에 적지 않은 슬픔 속에 힘들어 했고 주저앉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났고 결국 역사에 남을 인물이 되지 않았던가.)

어린 시절부터 싹이 트면서 보이기 시작했던 그의 장점과 능력 소질 그리고 의지는 결국 그를 가장 큰 위기 앞에 직면한 미국의 최고 통수권자의 자리로 이끌게 된다. 대통령이 된 그는 그를 비난했던 스탠턴을 전시 국무장관으로 앉히면서 적(敵)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기묘한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뛰어난 위기관리능력과 국민들에게 친근하고 안정된 연설들로 최대 위기였던 미국의 남북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전쟁을 원만하게 다잡아가기 시작한다. “시대가 인물을 낳는다”라는 말에 우리는 익숙하지만 나는 그런 표현보다는 “준비된 인물은 시대를 뛰어넘는다”라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늘 기도하는 대통령, 준비하는 대통령, 포용과 통합 앞에 무릎 꿇을 줄 알았던 대통령은 결국 노예해방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어쩌면 그의 서명으로 시작된 기나긴 흑인들의 압제된 역사와 고통의 세월이 조금씩 풀려나면서 올해 ‘오바마’라는 걸출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롤 모델로 삼기에는 너무나 벅찬 사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는 인물은?”이라는 물음에 늘 두 사람을 적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만 적으려고 했다가 언젠가부터 한국인 한 명, 외국인 한 명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김구(金九)와 링컨(A. Lincoln)을 꾸준히 꼽아왔다.

링컨을 삶의 롤모델로 삼아본다고 할 때 그가 남긴 업적과 인생의 결과물들을 먼저 생각하면 너무나 벅차고 따라가기에 불가능할 것만 같다. 그러나 내가 삼고자 하는 인생의 모델이란 그가 남긴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그의 내면에서 싹트고 있었던 꿈에 대한 강한 열망과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세상을 바라보았던 삶의 자세, 슬픈 개인사와 어지럽고 일어나기 어려울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뛰어난 자기통제, 책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았던 겸손함, 바로 그런 것들이다.

성장하면서 조금씩 생각해보면 링컨의 강점들 가운데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고 그러한 자신의 강점과 품성 그리고 의지를 잘 조절하면서 꿈을 이룬 그의 삶의 발자취를 보면서 나 역시 (범위에서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그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걷고 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렸을 적에 막연하게 생각하고 삼았던 인물의 인생이 이젠 어느덧 실제로 그렇게 가고픈 정도가 되었으니 링컨에 대한 나만의 연구와 되새김의 수준은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아니지만 나만의 철학으로는 분명 정립된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오랫동안 회자되고 또 그렇게 될 링컨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끝까지 (미)연방의 연합과 통합의 의지를 꺾지 않으며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던 날 링컨은 포드극장에서 부인과 함께 [우리 미국인사촌]이라는 연극을 관람하게 된다. 즐겁게 관람을 하고 있을 무렵 총알 두 방이 그의 뒷통수를 관통하면서 링컨은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08년, 코카서스 산맥 북쪽 어느 마을에서 부족장이 톨스토이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했고, 떠오르는 해처럼 웃었으며, 바위처럼 확고하게 행동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링컨이고, 그가 살았던 나라는 미합중국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너무 멀어서, 젊은이가 걸어서 거기에 닿을 때면 노인이 되어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963년 8월23일, 흑인이자 민권 및 인권운동가로 잘 알려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연설했다.

“한 세기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은 노예해방선언문에 서명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의미심장하고 상징적인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 역사적 선언은 불의의 불길에 고통을 받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다가왔습니다. 긴 예속의 밤을 끝내는 환희의 새 아침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2008년 11월 4일, 미국 제44대 대통령 선거 당선자 버락 오바마는 당선 연설에서 이렇게 연설하면서 링컨을 다시 기념했다.

“젊은이와 노인,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흑인과 백인과 히스패닉과 아시아계와 미국 원주민, 동성연애자와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든 미국인이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미국은 붉은 주(공화당 우세 주)나 푸른 주(민주당 우세 주)의 집합도 아니고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체도 아니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보냈습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 언제까지라도 늘 우리는 미합중국일 것입니다. (중략) 미국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분열되어 있었을 때 링컨이 말했듯이,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고 동지입니다.”

언제나 그리고 늘 변함없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건국 이후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꼽는다면?" 이라는 질문을 미국인들에게 던졌을 때 부동의 1위자리에 오르는 인물은 단연 링컨이다. 링컨을 뛰어넘는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것만은 아닐진대 왜 그는 지금도 오랫동안 미국민 아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회자되고 기념되고 있는 것일까? 변덕과 작은 굴곡에도 여지없이 바뀌는 것이 인간이요 사람이라는 점을 전제해 볼 때 그에 대한 평가와 기념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닐 것이다.


태그:#링컨, #대통령, #꿈과 희망, #미국대통령, #링컨탄생 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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