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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이야기의 꼭 중간이다. 때문에 황석영의 삼국지에서는 5권에서 이문열의 삼국지에서는 6권에서 적벽대전이 나온다. 삼국지의 중간에 적벽이 선 것은 바로 이 싸움을 통해 ‘천하삼분’(天下三分)을 의미하는 삼국정립(三國鼎立)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벽대전의 최대 화두는 중원에서 밀고 당기는 힘의 역학관계가 배경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긴 역사의 풍상을 겪은 후 통일된 중국이라는 땅에서 우위선(오우삼)은 분열을 통한 안정을 말한다는 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적벽대전’은 하찮은 애정이나 어쭙잖은 휴머니즘만이 강조되는 범작이 되고 말았다.

 

우선 이 영화는 지나치게 중화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영화의 후반에 제갈량(진청우 분)이 ‘천하삼분’을 말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현 중국 정부의 심사를 흐트러지게 하지 않기 위해 삼국정립 부분은 거의 무시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남은 것은 조조의 탐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조조가 마치 ‘소교’를 얻기 위해 일으킨 전쟁인양 보이는 측면이 많다. 조조가 악역을 맡으면 당연히 오나라와 유비가 착한 역이 되는 권선징악의 구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조조는 여자나 좋아하고, 지나치게 아집 많고, 상대방에게 병든 자를 보내 전염병을 일으키는 간교한 자로 보이게 한다.

 

이 영화에서 지나친 중화주의의 단적인 예가 위나라 군대에서 벌어지는 축국(蹴鞠)이다. 축국은 제(齊)나라 이전부터 중원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영화에서처럼 완성된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적은데도 이런 방식으로 만든 것은 중국의 축구 종주국 주장을 위한 포석으로 느껴진다.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이야기 전개다. 한편의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계가 있기에 이 영화가 선택한 적벽의 주요 키워드는 ‘소교’를 둘러싼 주유와 조조의 갈등, 적벽의 전초전으로 벌이는 공명(화살 확보)과 주유(채모, 장윤의 주살)의 조조에 대한 심리전이다.

 

그러다보니 이 시기에 중요한 키워드인 ‘장판파’ 전투나 방통의 연환계, 황개의 고육계, 관우와 조조가 맞닥뜨리는 화용도 등은 흔적이 없다. 유비 진영에 막 들어온 제갈량과 기존 인물인 관우 장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야 너무 부족한 시간으로 무시했다고 치더라도 어쭙지 않은 반전주의는 그다지 공감을 받지 못한다.

 

반전주의를 위해 감독은 손권의 동생인 손상향(짜오웨이 분)이 적진에 들어가 위나라 병사 손숙제와 인연을 맺게 한다. 최후 결전의 순간 손상향은 위나라 진영에서 손숙제를 만나는데 그의 사망으로 전쟁의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 오나라 진영에서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날리는 것도 이런 장치들이다. 그밖에도 공감하기 어려운 장면이 임신한 주유의 아내 소교(린즈링 분)가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조조의 공격시간을 늦추어, 동남풍으로 오나라군의 공격을 성공하게 한다는 설정이다.

 

이 영화에서 소교는 조조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자, 제갈량이 주유를 분노하게 해 오나라를 전쟁으로 이끌게 한 인물로 나온다. 또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공격을 늦추게 해서 남편인 주유가 승리를 이끄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원전에서는 조조가 소교를 탐낸 것보다는 제갈량이 주유를 자극할 때 조조의 시를 오용해 주유를 전쟁에 끌어들이게 한 것으로 나온다.

 

회자되던 삼국지의 드라마 버전이 나관중에 의해 소설화된 것이 1400년 전후이니 그녀는 600년 만에 한 영민한 감독에 의해 주요 인물이 된 셈이다.

 

지난 여름 ‘적벽대전 1’은 나에게 많은 실망감을 줬다. 사실 그에 비하면 대규모 전투 장면이 있는 2편은 보는데 나은 편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불과 몇줄로 소개된 한 전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병사의 수도 백만(위)과 4만(오)이 아니라, 1/5에서 1/10의 수준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다.

 

반면에 나관중에 의해 정리된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지략과 주유와 노숙의 오나라가 결합해 황제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한 조조를 물리치는 이야기로 '승격'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전투를 통해 절대 강자인 조조의 세력이 약해지고 오나라는 강동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고, 유비는 비로소 자리를 잡아간다. 반면에 우리 판소리인 ‘적벽가’는 이런 영웅들의 전투보다는 거대한 전쟁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병졸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 판소리 ‘적벽가’를 빼닮은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삼국지 현장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어떻든 영화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는 시간을 넘어 ‘적벽대전’의 현장은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그 장소들이 대부분 남아있어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운 여행지다. 기자는 테마여행 등으로 몇차례 이 지역을 여행했다. 둥팅후(洞庭湖)와 창지앙(長江) 지류들에 자리한 적벽대전 현장을 만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여행법을 소개해 본다.

 

전체 삼국지 코스를 돌아보는 일은 적어도 수십일이 걸리는 거대한 여정이다. 그중에서 적벽대전만을 꼽아서 돌아본다면 전쟁의 현장인 치비(赤壁), 소교의 무덤이 있는 웨양로우(岳陽樓)가 짧은 여정일 것이고 이곳에 더 추가한다면 형주성(荊州城)과 장판파(長板坡)가 있는 징저우 일대일 것이다.

 

우선 적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한국에서 직항이 있는 우한(武漢)과 창사(長沙)다. 우한은 산샤 여행 때 가는 곳이고 창사는 장자지에(장가계) 여행의 주요 거점이다. 장자지에 여행자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 창사로 도착했을 경우를 생각해 길을 설계한다.

 

창사 공항에서 치비로 가는 길에서 우선 웨양로우를 둘러보는 게 좋다. 창사공항에서 웨양로우까지는 160킬로미터로 고속도로가 잘 되어 있어 2시간 정도면 닿는다. 웨양로우는 3대 누각에 꼽히는 황허로우나 텅황거에 비해 크지는 않지만 둥팅후 때문에 더 많은 시의 배경이 된 곳이다.

 

누각의 1층과 2층에는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가 같이 써 있다. '악양루기'는 누각뿐만 아니라 둥팅후가 가진 문화의 깊이를 잘 표현한 글이다. 특히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거워 할 것이니라)는 시구에 담긴 뜻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교의 무덤은 웨양로우의 바로 옆에 ‘소교의 묘’(小喬之墓)라는 간단한 비문을 가진 비석과 함께 서 있다. 주유의 묘가 루지앙(庐江)을 비롯해 수 곳에 있고, 루지앙에도 소교의 묘로 불리는 곳이 있으니 어디가 진실인지는 모르나 어떻든 여행자들에게 소교를 만나는 흥미를 준다.

 

언니 대교가 손책(孫策 오 군주, 손권의 형)에게 시집가고, 동생 소교는 오나라 대도독 주유(周瑜 175∼210)에게 시집갔다. 제갈량은 오나라를 움직이기 위해 주유에게 조조가 오나라를 쳐서 소교를 유린하는 것을 자극했다. 조조는 오나라를 쳐서 소교를 얻어 하북에 동작대라는 궁전을 세우고 소교를 노리개로 삼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호언했기 때문이다.

 

결국 촉은 이 과정에서 주유가 이끄는 오나라 군의 힘을 빌리게 되어 적벽대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청총(靑塚)은 이제 나무까지 무성히 자라, 오는 객들에게 역사의 향취만을 말해줄 뿐이다.

 

치비는 웨양에서 고속도로로 90킬로미터쯤 가다가 국도로 빠져 40킬로미터쯤 가면 닿는다. 이미 관광단지로 개발되어 있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면 조악하기는 하지만 야산을 활용해 이리저리 만들어 놓아 재미있다.

 

산의 대문에는 방통, 제갈량, 손권, 주유, 노숙 등이 그려진 패방이 있다. 패방 너머에는 방통 봉추가 머물렀다는 봉추암(鳳雛庵)이 있다. 주유가 창안한 화공을 만들기 위해 연환계를 편 그는 스스로는 제갈량에 버금간다고 생각했지만 실력에서나 운에서도 제갈량을 미치긴 어려웠다.

 

다시 작은 산을 넘어가자 이번에는 빠이펑타이(拜風臺 배풍대)가 나온다.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렀다는 곳이다. 제갈량의 지략을 신격화하는 곳이다. 물론 당시에 절기적으로 이런 바람이 불수 있는 시기기는 했지만 천문을 읽던 제갈량의 카리스마를 의심하기는 쉽지 않다. 뒤에는 제갈량이 쓴 전후 '출사표'가 '악비'의 글씨로 적혀 있다. 다시 산굽이를 지나면 '적벽대전 기념관'이 나온다. 조악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정세나 문물 등을 잘 정비해 놓았다.

 

다시 작은 숲길을 따라가면 주유의 석상과 더불어 '적벽'이라는 글자가 써 있는 작은 강가 바위가 나온다. 높이는 10미터도 안 되는 작은 바위지만 이곳이 주는 다양한 상상력은 사실 천길 만길 벼랑에 못지 않을 것이다.

 

앞에 펼쳐진 창지앙의 물길을 보면 가장 인상적인 것이 생각보다 물살이 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조의 군대는 배를 이을 수밖에 없었고, 화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경 1.2킬로미터 남짓한 이 강에서 수십만 수군이 싸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만큼 너무 기대는 하지 말 것이다.

 

 

어떻든 적벽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당시 가장 큰 위세를 지닌 조조의 패퇴는 강남에서 손권이 이끈 오나라의 위세를 정립시키고, 유비가 형주(荊州)를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전투를 통해 진정한 위촉오 삼국지가 성립되게 되었다. 또 유비 진용 내부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객 신세를 면치 못하던 제갈량이 관우와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제갈량과 관우의 헤게모니 싸움의 중심은 화용도(華容道)를 통해서 이뤄진다.

 

후에 판소리 '적벽가'의 중심 소재가 된 화용도의 현재 위치는 웨양 부근이어서 과거의 위치가 같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제갈량은 적벽에서 패퇴한 조조군의 퇴로에 각 장수를 배치하는데 화용에 관우를 배치한다. 제갈량으로서는 아직 조조가 죽을 운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유비군 내부의 힘이라도 바꾸는데 활용한 것이다.

 

적벽을 본 후에는 170킬로미터 거리인 우한으로 갈 수 있다. 작은 차나 배낭 여행자라면 여기서 강을 건너 홍후(洪湖)를 지나 시엔다오(仙桃)를 거쳐 징저우로 가는 게 좋다.


태그:#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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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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