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는 크게 격식을 따지지 않고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서 지낸다.
▲ 차례상 우리는 크게 격식을 따지지 않고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서 지낸다.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명절이 돌아오면 난 여전히 마음이 설렌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인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러 형제 중 막내라서 마땅한 책임이 없었으니까….

가령 똑같은 일을 해도 책임이 있는 사람은 중압감이랄까, 뭐 그런 걸 느끼고 잘 해도 별 칭찬 못 받지만 그저 구경꾼이었던 나는 조금만 거들어도 빛이 났다.

내 역할은 주로 엄마 옆에 앉아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다 된 음식을 찔끔찔끔 집어먹는 것. 그러다 막중한 그 책임은 엄마한테서 고스란히 큰새언니한테로 넘어 갔다. 대물림이란 얼마나 무섭냐 하면 우리 새언니는 음식하는 거 별로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집 식구가 된지 어언 47년, 이제는 음식하는 마음가짐도 엄마와 똑 닮게 됐다.

예전 시골 명절은 참 풍성했다. 맨 처음 엿을 고는 것으로 음식만들기가 시작됐고, 며칠 전부터 대청소에 돌입. 하다못해 안방에 있는 장롱 장식까지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다. 새날이라 새것을 먹어야 한다며 겨우내 땅속에 묻어 두었던 배추 무우를 꺼내 새로 김치도 담갔다. 배추김치, 채장아찌, 깍두기, 나박김치. 아마도 엄마 머릿속에는 한 달 전부터 설 준비할 목록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엄마는 늘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귀찮아 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걸 지금은 새언니가 그대로 답습하는 셈이다.

"어머니 미역은 왜 담그세요?"

매번 참관만 하다가 어느덧 나도 책임이라는 게 생겼다. 제일 먼저 돌아온 건 시아버지 제사. 한여름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도 신랑도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냐고 물어도, 그냥 지내면 된다는 말뿐 도무지 속시원히 가르쳐 주질 않았다. 동서가 있지만 서먹서먹한데다 어차피 우리 신랑이 제주라 주선은 우리가 해야 할 처지였다.

팔순이 넘은 시어머니댁에서 지내는 제사라 일단 우리가 먹을 걸 준비해갔다. 달랑 김치와 나박김치만. 김치는 밥상에 기본이고 나박김치는 우리집에서도 차례나 제삿상에 빠뜨리지 않고 올리는데다 시어머니가 좋아하시니까, 망설임 없이 담가서 가져갔다. 하지만 허전하다 못해 기분까지 이상했다. 도대체 뭘로 제사를 지낼겠다는 것인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그런데 우리 시어머니가 미역을 큰 걸로 집으셨다.

"어머니 미역이 떨어졌어요?"
"조금 있긴 있는데 사 가야지."

그래도 나는 눈치를 못챘다. 장을 봐서 집에 들어갔는데, 시어머니 미역부터 꺼내서 물에 담그신다.

"아니 미역은 왜 담그세요?"
"제사 지내야지."
"예에. 제사에 무슨 미역이 들어가요?"
"미역국을 끓여야 제사를 지내지."


아니 미역은 생일이나 애 낳았을 때만 먹는 건줄 알고 있었는데, 무슨 제사상에? 난 제삿상에 미역국을 올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마트에서 미역을 사실 때도 짐작조차 못했다. '사돈의 풍습은 오이 먹는 법도 다르다'더니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나머지 제사 음식은 동서가 해온다고 했으니까, 나는 고기를 푹 고아서 미역국 끓이는 일외엔 할 일이 없었다. 가스렌지에서 끓고 있는 미역국만 쳐다보고 있노라니, 빈둥빈둥 심심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도무지 내가 제사를 지내러 온 건지 구경만 하러 온 건지 헷갈리면서 자연스레 우리집(친정) 제삿날 생각만 모락모락 떠올랐다.

제주인 우리집 종손이 지방 쓸 준비를 하고 있다.
▲ 차례 준비 제주인 우리집 종손이 지방 쓸 준비를 하고 있다.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우리집 제사도 엄격하게 격식을 따지지는 않는다. 제주는 우리집 종손인 조카인데 제일 먼저 집안을 정리하고 아무도 없는 방에 앉아서 지방을 쓴다. 남자들 일은 지방을 쓰는 것과 밤을 깎는 것. 나머지는 다 부엌에서 준비하느라 부엌이 항상 분주하다. 옛날보다 많이 단촐해졌다고는 해도 나처럼 끓는 미역국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처량해졌다.

"제삿상에 조기를 올리는 집이 어딨어?"

저녁이 가까워서야 짐을 잔뜩 든 동서가 왔다. 동서는 짐을 풀어 식탁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나물 세 가지는 어디가나 기본이고 전도 그렇고, 생선이 한 보따리? 으음 바다가 가까우니까 역시 생선을 많이 쓰는군. 그런데 그 다음 나온 건 다름아닌 삶은 계란?

"이건 뭐여요."
"계란을 아주 삶아 왔어."


내가 물은 건 삶은 계란을 왜 가져 왔느냐는 뜻이었는데, 그럼 여기선 제삿상에 계란을 놓는 게 당연?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이 되어 버린 난 더 물을 수도 없어 가만히 입 꼭 다물고 서 있었다. 동서는 삶은 계란을 예쁘게 잘라서 제사상에 올려놓고 생선을 꺼내는데 세 가지나 된다. 가재미나 명태는 알겠는데 불그스름한 이 생선은 뭘까?

"이 생선은 이름이 뭐예요."
"아니 그 유명한 열기도 몰라요. 여기는 제삿상에 꼭 이 열기가 올라가야 돼요. 열기하고 문어가 올라가면 제사 잘 차렸다고 볼 수 있지요."


으음~. 나는 고개만 끄덕끄덕 하면서 구경만 했다. 생선을 접시에 올리는 것도 방식이 있었는데, 많이 복잡해서 한두 번 봐 가지고는 따라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시아버지 제사와 추석까지 두 번을 지냈지만 여전히 헷갈린다. 미역국, 삶은 계란, 생선 세 가지, 문어가 올라간다는 건 알겠는데….

그때 문제가 됐던 건 나박김치였다. 붉은 색이 전혀 없어야 한다며 머뭇거리다 결국은 나박김치를 올리지 못하고 지냈다. 그리고 미역국을 끓여도 탕(무를 깍뚝썰기해서 소고기를 넣고 푹 끓인 국. 그 국에서 무우를 건져 따로 그릇에 올려 놓는 것)을 놓는단다. 결국 탕국과 미역국을 다 끓여야 격식에 맞게 지내는 거지만, 요즘은 대부분 한 가지(미역국 혹은 탕국)를 선택해서 하는 집이 많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 나는 신랑에게 말했다.

"여기는 말야. 제삿상이 복잡하다. 우리는 어적으로 조기만 올리면 되는데, 여기는 생선도 여러가지야."
"아니, 제삿상에 조기를 올리는 집이 어딨어?"


엄마를 생각하면서 새 음식을 장만했다

이제 시댁의 풍습에다가 엄마가 내게 물려준 우리집 풍습까지 합해져 더 풍성한 명절이 될 것 같다.
▲ 새김치 이제 시댁의 풍습에다가 엄마가 내게 물려준 우리집 풍습까지 합해져 더 풍성한 명절이 될 것 같다.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큰맘 먹고 혼자 만두를 빚었다. 나도 엄마처럼 정성껏 설을 맞이 하고 싶어서...
▲ 만두 큰맘 먹고 혼자 만두를 빚었다. 나도 엄마처럼 정성껏 설을 맞이 하고 싶어서...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난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누구나 남의 제사를 볼 기회가 없으니 내 방식이 아니면 다 생소해 보일 것이다. 나나 우리 신랑이나. 이제 이번 명절로 시댁에서 지내는 차례나 제사가 세 번째다. 아주 조금 시댁이라는 곳의 분위기를 파악한 나는 옛날 우리 엄마가 했던 명절 음식을 장만했다. 새김치와 식혜, 그리고 만두를.

음식을 하는 내 마음은 아직은 싱싱하다. 우리 신랑도 내가 아주 신나 보인다고 좋아한다. 작은 나라 안에서도 이렇듯 다른 차례(제사)풍습을 가지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 그래서 양쪽 풍습을 합한 더 풍성한 설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태그:#명절, #차롓상, #미역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