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순신장군 사우인 충무사와 순천왜성이 있는 신성리 마을 풍경
 이순신장군 사우인 충무사와 순천왜성이 있는 신성리 마을 풍경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광양읍에서 여수로 빠져 내려오는 시원한 6차선 도로를 타고 오다보면 넓은 들판에 공장이 하나 있다. 맞은 편 작은 산위에는 네모로 된 석조물이 보인다. 순천왜성이란다.

매번 지나다니기만 하다가 오늘(1.19)은 기어이 가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신성리로 들어섰다. 오래전 바다가 매립되기 전에 시내버스타고 신성포로 구경 왔던 기억이 있다. 너무 오래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정말 10년이 넘었고 강산이 변했다.

신성리(新城里)는 정유재란이 끝나고 왜성이 있던 곳이라고 해서 예교(曳橋)라 불리다가, 신장개로 바꿔 불렀는데, 일제강점기 때(1914년) 신성리로 지명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청산하기 어려운 일제강점기의 그림자.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신성포는 근대까지 각종 수산물과 물자가 유입되는 포구로 번성하였으나, 전라선 개통과 더불어 차츰 기능이 상실하였다고 한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이 나듯 한 때 번성하던 신성포 앞바다는 율촌산업단지로 매립되어 더 이상 포구역할을 할 수가 없다.

죽어서도 왜군의 귀신과 싸운 이충무공

모퉁이를 돌아서니 많은 비석들이 서있다. 충무사 중건비도 있고, 유적보존회 기념비, 지역 유명인사 유적비 등등. 이곳이 고향이라는 동화작가 정채봉의 시비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찍이 푸른 파도 이랑마다에
만복이 실려와서
비경 중의 비경을 이루고
풀과 나무와 사람들을 늠름히 키운
신성리의 바다가 있었다.
여기에

한 시절에는 왜적에게 볼모가 되어
축성에 피와 땀을 공출당하기도 하였으나
분기하고 분출하여
충무공의 깃발 아래서 되찾은 강산
오늘도 흠모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여기에

- 정채봉의 <여기 순결의 터를 기른> 시비 중 일부

충무사 올라가는 계단. 양편으로 많은 기념비들이 경비병처럼 지키고 있다.
 충무사 올라가는 계단. 양편으로 많은 기념비들이 경비병처럼 지키고 있다.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조심스런 공간으로 들어가듯 계단을 올라간다. 충무사가 있는 이곳 신성리는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 하루 전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충무사(忠武祠)를 건립 하게 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신성리성 전투에서 많은 왜군이 죽어 그 귀신이 밤이면 자주 나타난다는 주민들의 말에 의해, 이곳에 사우(祠宇)를 짓고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후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부터는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죽어서도 왜군 귀신과 싸우시고 계시나 보다.

지금의 충무사는 1943년 가을,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을 1947년 현 위치에 새로 건립하였다. 뒷날 충무공의 군관이었던 송희립(宋希立) 장군과 정운(鄭運)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같이 모셨다고 한다.

문 닫힌 충무사, 당당한 순천왜성

계단에 올라서니 붉은 칠을 한 문은 굳게 닫혔다. 항상 사당을 찾다보면 느끼는 아쉬움이다. 담장너머로 고개를 내미니 안에서 공사 중이다. 문 좀 열어 달랬더니 담장 끝나는 곳으로 들어가는 곳이 있고, 마을을 빙 돌아서 들어오면 된다고 한다.

충무사 풍경. 가운데가 충무사 오른쪽이 영당 건물
 충무사 풍경. 가운데가 충무사 오른쪽이 영당 건물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예전 포구의 영향이 남았는지 마을 여기저기에서는 굴까는 작업들이 한창이다. 충무사로 들어서니 마루가 반질거리는 기와집이 보인다. 유적보존회 사무실이다. 처마 밑으로 충무사를 중건할 때 협찬한 사람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어 놓았다.

다시 문이 하나 더 있고 반질거리는 대리석을 깔아 논 끝에 충무사가 있다. 양편으로는 제실과 영당이 지키고 있다. 혹시나 안을 볼 수 있을까 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열리지 않는다. 사당 문에 조그만 창을 내서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충무사에서 바라본 순천왜성
 충무사에서 바라본 순천왜성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충무사에서 바라본 앞산에는 순천왜성이 당당하게 서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죽어서도 끝나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조․명 연합군과 대치

왜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정채봉길’이라는 도로 표지판도 보인다. 순천왜성 앞 주차장은 무척 넓다. 주차장 한 가운데 커다란 돌에는 순천왜성 전투를 그린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
‘정왜기공도’는 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한 그림이라는 뜻으로 정유재란(1957~1958) 마지막 3개월간 육.해상에서의 전투장면을 당시 명군(明軍)을 따라왔던 화가가 폭 30센티미터 길이 6.5미터의 두루마리에 그린 것으로 현 소재는 불분명하다.
이 그림은 ‘정왜기공도’ 일부분으로 순천왜성에 주둔한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는 전투 장면이다. 성곽방어시설, 공성병기(攻城兵器), 전함(戰艦) 및 전투장면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안내판에서-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 ‘정왜기공도’는 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한 그림이라는 뜻으로 정유재란(1957~1958) 마지막 3개월간 육.해상에서의 전투장면을 당시 명군(明軍)을 따라왔던 화가가 폭 30센티미터 길이 6.5미터의 두루마리에 그린 것으로 현 소재는 불분명하다. 이 그림은 ‘정왜기공도’ 일부분으로 순천왜성에 주둔한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는 전투 장면이다. 성곽방어시설, 공성병기(攻城兵器), 전함(戰艦) 및 전투장면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안내판에서-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앞으로는 호수가 있고 빙 둘러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호수를 따라가니 하얀 새들이 부리를 물속으로 이리저리 흔들며 걸어가고 있다. 저어새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얼른 세어보니 13마리다. 물속을 걸어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호수가 끝나는 곳은 순천왜성 문지(門址)가 버티고 있다. 안내판에는 순천왜성을 섬처럼 만들기 위해 해자를 파고 다리를 만들었으며, 입구에 방어시설로 문지를 만들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문지의 계단으로 올라서니 주변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이중으로 된 문지는 조선과 명나라의 군대가 쉽게 넘어서기 힘든 장애물이었을 거다.

성벽을 겹겹히 쌓은 난공불락의 요새
 성벽을 겹겹히 쌓은 난공불락의 요새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순천왜성(順天倭城)은 임진왜란 당시인 1957년(정유년)에 왜군(倭軍) 장수인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왜병을 이끌고 이곳에 와서 본진(本陣) 3첩(堞)․내성 3첩․외성 3첩 등 9첩으로 쌓은 것이다. 이곳에서 정유재란의 마지막 단계인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 간에 걸쳐 펼쳐진 싸움이 왜교성(倭橋城) 전투이다. 이 싸움은 광양만 해역과 해룡(순천)일대의 육해상(陸海上)에서 우리나라(朝鮮)와 중국(明)의 연합군과 고니시 유까나가가 거느리는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결전지였다. 이성은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왜성(倭城)이다. - 안내판에서

마지막 전투지였던 바다는 매립이 되고

조금 위쪽으로 문지가 하나 더 있다. 문지를 지나면 본성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난다. 걸어 올라가면서 제 모습을 드러낸 왜성은 성벽이 여러 층으로 되어있다. 아래에서부터 보면 커다란 탑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설령 문지를 통과한 군대는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탑을 올라가는 것처럼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노출되면서 공격을 해야 한다. 결국 무모한 공격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의 막바지. 왜군들은 호남지방까지 진출했으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본국으로 도망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 전투를 위해 해상으로 길을 열었다.

임진란 마지막 전투지였던 바로 앞바다는 매립되어 공장이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다.
 임진란 마지막 전투지였던 바로 앞바다는 매립되어 공장이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다.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피라미드 같은 모양의 천수기단. 당시 기단 위에는 3층 건물이 서있었다고 한다.
 피라미드 같은 모양의 천수기단. 당시 기단 위에는 3층 건물이 서있었다고 한다.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성의 맨 위에는 마치 제단 같은 네모진 기단(基壇)이 있다. 이곳이 지휘소 역할을 했을 천수(天守)건물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천수기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본다. 주변이 한눈에 둘러 보인다. 조선과 일본이 마지막 전투를 치렀던 바다는 산업단지가 들어설 부지로 매립이 되었다. 배가 드나들었던 곳에는 6차선 넓은 도로가 놓였으며, 커다란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간다.

복원도 좋지만 너무 지나친 복원은…

내려오는 길에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성은 너무나 깔끔하게 복원되었다. 왜성도 문화재로 인정해야겠지만 옛 성벽과 너무나 차이가 난다. 옛 성벽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건만 새로 복원한 곳은 커다란 바위를 반듯하게 다듬어 견고하고 촘촘히 만들어 놓았다.

아직 남아있는 옛 성벽
 아직 남아있는 옛 성벽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성벽에 자란 노박덩굴의 노란 열매
 성벽에 자란 노박덩굴의 노란 열매
ⓒ 전용호

관련사진보기


복원도 좋지만 너무 지나친 복원은 관광객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당시 전쟁의 와중에 이렇게 완벽하게 쌓지는 않았을 텐데. 옛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난공불락의 성도 세월 앞에는 별 수 없나 보다. 노박덩굴의 노란 열매가 속살을 드러내 놓고 웃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순천에서 여수가는 길에 있습니다.
한적한 마을구경 더불어 성벽을 따라 가벼운 산책하기에 좋습니다.
구경하는 시간은 1시간 정도



태그:#충무사, #순천왜성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