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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약하고 전기장판이랑 보냈으니 춥지 않게 따뜻하게 보내세요."

 

혼자 사는 오빠가 몸까지 아파 병원에 있다 하니 착한 동생이 신경이 쓰이는가 보다. 울산에 사는 동생이 이번에 약이며 전기장판이랑 담요를 보냈다. 이번 뿐이 아니다. 지난 해(11월)에 매제랑 처음 이곳 진해에 왔다.

 

근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동생을 봤다. 사십대 고운 여인에서 이제는 50대 중년 여성이 되어 나타났다. 병원 근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이내 반찬을 보냈고, 이번에는 생활용품까지 보냈다.

 

IMF때 헤어진 동생을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정말이지 눈물이 나려 한다. 형제 간에 반찬도 보내주는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다. IMF 때 나는 고향 울산을 떠난 뒤로 한 번도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동생도 나를 찾지 않았고 왕래도 없었다.

 

IMF 때 아내와 같이 하던 식당이 갑작스레 매출이  감소했다. 아이들 교육비, 생활비, 거기다가 전 부터 있던 은행이자는 천정부지로 올라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아내는 도저히 이대로는 못 사니 "아이들 교육은 자기가 벌어시킬테니 헤어지자"고 하였다. 나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내 형제들을 만나지도 않고 고향을 떠났다.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친구, 형제,일가친척에게도 부끄러워서였지만 특히 여동생한테 미안해서 볼 낮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2006년)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형님들을 만났다. 형님들한테는 내가 직접 찾아갔다. 동생한테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집은 형제가 5남1녀인데 내가 사남이다. 여동생이 다섯째이며, 아래에 남동생이 하나 더 있다.

 

여동생과는 4살 터울이다. 형들은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다 서울로 부산으로 돈 벌러 나갔었다. 형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우리 형제들 중 처음으로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군대에 들어가면서 형님도 그랬지만 동생이 나한테 건 기대가 컸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집으로 올 때의 실망이라니. 이후 고향에서 자영업을 하면서 하는 것마다 실패하여 집안에 웃음꽃은 고사하고 늘 티격태격 할 때다. 동생은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내가 울산에서 부산으로 새로 직장을 잡고 이사할 때도 살 집을 마련해주었다.

 

그 때 동생이 한 말이 지금껏 뇌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  "오빠는 성공할 줄 알았는데…." 동생은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울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함께 공부하게 됐다. 오빠로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계획도 도움을 줘야 했는데, 난 너무나 무능한 오빠였다.   

 

동생이 입학할 때 나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생각해야 했다. 내가 군에 가자 동생은 작은형 집에서 공부했다. 그 때 형수는 일수계를 했다. 부도를 낸 건지 당한 건지 일수 돈과 형 돈까지 몽땅 들고 집을 나갔다. 형도 빚쟁이를 피해 부산으로 가게 됐다. 그 충격으로 동생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오빠들이 없는 집에서 부모님께 제일 효도를 많이 한 동생

 

그 때문에 동생은 떠난 둘째 형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우리 집에서도 한 번은 시누이 간에 티격태격한 적이 있었다. 그 때부터 여동생은 나를 싫어했는데 기어코 이혼까지 했으니 얼마나 미워하였을까?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동생은 딸이 귀한 집안에 여자 아이로 태어났으니 귀여움을 받았을 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형한테 들은 말로는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딸"이라 하니 "갖다 버리라"는 말에 어머니께서 울며불며 만류하셨단다. 내가 본 아버지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는데…. 알 수는 없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한다고 바쁘니 아버지가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어왔다. 나도 커서는 동네 우물을 길러 다녔다. 아버지는 여동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남자애 모양으로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렸다.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딸보다 아들이 좋았는가 보다.

 

그래도 아버지는 딸을 초등학교에 보내고 졸업할 때 도교육감상까지 받자 중학교에도 보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내 친구도 못간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동생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오빠들이 없는 집안에서 부모님께 효도를 많이 하였다.  미안한 것이 참으로 많다. 내가 군에 있을 때 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는데 결혼식에 참석 못하였다. 잘못된 사리분별이었다.

 

한동안 내리 3년을 집에 가지 않았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네가 정녕 집이 싫어서 안 오느냐"고 할 정도였다. 남들은 철마다 집에 오고 어떤 군인들은 멀쩡하게 살아있는 '삼촌'도 죽이고 '할아버지'도 죽여서 휴가를 받아 오는데 "너는 어찌 하나뿐인 동생이 결혼하는데 안 오느냐"고 핀잔을 들었다. 내가 아는 후배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두 번이나 죽이는 것을 보았다.

 

내가 십 년 군 생활 동안 정식 휴가를 받아 집에 간 것은 임관 휴가외 단 한 번 외에는 기억이 없다. 정식 휴가 외엔 부대 전출시에 집에 다녀갔다. 하룻밤만 자고 다음날 떠날 때는 아버지도 무척 섭섭하게 생각하셨다.

 

아버진 혼자서 농사일을 하고 집안일도 하셨는데 그 잘난 아들들은 서울로 가고 그나마 믿었던 나까지도 군대로 도망(?)해 버렸다. 집에는 막내 남동생만 남아 학교에 다닐 때 여동생이 울산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아버지한테 제일 잘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휴가를 얻어 집에 왔으니 집안 소식도 잘 몰랐다.

 

나는 나대로 군 생활이 고달팠다. 월급 받아 저축은 고사하고 수 년 동안 아버지 용돈도 보내지 못했다. 언제인가 처음으로 군대에서 보너스가 나와 집에다 10만원을 보내면서 맛있는 것 사 잡수시라고 편지를 보냈다. 돌아가실 때까지 편지와 그 돈을 그대로 보관하였다고 하여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였다.

 

돌아보면 난 아버지가 키워주고 공부시켜 주었지만 자장면 한 그릇도 대접하지 못하였다.  여동생은 주말마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오빠들이 못다한 효도를 하였다. 같이 울산에 살면서 여동생이 어려울 때도 난 전혀 도와주지 못했다.

 

매제도 한 때 하던 사업이 부도나서 쩔쩔맸다. 셋방살이 하면서도 분식집을 하여 아들 둘을 대학까지 마쳤다. 지금 큰 아들은 건설사에 다니고 작은 아들은 의대까지 졸업하여 지금은 부산 모 대학병원에서 일한다면서 자랑한다.  

 

"매제야~동생아~그래 정말 잘했다." 지금은 융자지만 아파트까지 장만하여 산다 하니 난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오빠가 너 반만큼만 했어도 이렇게 살지 않을 텐데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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