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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앞으로 모두 모이세요, 지금부터 이곳 천제단에서 우리 지점 대박기원제를 지내겠습니다."

"어떻게 하는데요?"

"어떻게 하긴, 술 한 잔씩 올리고 절하면 되는 거지, 허허허."

 

태백산 정상의 천제단 안이 시끌벅적하다. 어느 회사 평택지점에서 등정한 사람들이 이름도 특이한 '대박기원제'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그들 20여 명은 천제단 안쪽에 펼침막을 펴들고 제단에는 술과 떡, 돼지 머리 등 제물을 차려 놓고 있었다.

 

이날 태백산은 정상에 몰아치는 바람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싸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시리게 하는 날씨였다. 정상의 기온은 섭씨 영하 13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추위에 떨며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잠깐 쉬기도 할 겸, 점심이나 간식을 먹기 위해 천제단 돌담 안으로 들어섰지만 담장 안은 이미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천제단에 올라 ‘대박기원제’ 지내는 사람들

 

대박기원제를 지내는 사람들은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씩 제단 앞으로 나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제단에 올리고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서를 마친 그들은 술을 나누어 마시며 희희낙락 추위를 잊고 있었다. 대박기원제는 올해 사업이 번창하여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올리는 것이라 했다.

 

 

지난 1월 13일 아침 서울지방의 아침기온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평지가 이런 온도라면 해발 1567미터인 태백산의 기온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추울 것이었다. 그러나 태백지역의 낮 최고 기온이 영하 1도 정도일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당당히 태백산행 버스에 올랐다.

 

오전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태백산 유일사 주차장 근처에서 내려 곧장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는 옛날에 한 번 오른 적이 있는 넓은 길이 아니었다. 앞장선 산악대장은 바람처럼 산을 올랐다. 그가 남겨놓고 가는 표지를 따라 등산객들도 열심히 뒤를 따랐다.

 

산행시점이 이미 1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여서인지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산죽지대가 나타났다. 전에 많이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데다가 엊그제 내린 약간의 눈이 키 작은 산죽 밭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오늘 엄청 추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춥지 않고 오히려 덥네 그려."

 

일행이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하는 말이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노라니 금방 이마와 등에서 땀이 흐른다. 눈 덮인 길이었지만 오르기에 별로 미끄럽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 오르자 능선길이 나타났다.

 

 

그런데 능선길에 올라서는 순간 몸으로 느끼는 체감온도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가볍게 파고드는 바람결이 너무나 차가웠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이 너도나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두꺼운 모자를 꺼내 쓰고 목도리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런데도 조금 전에 땀을 흘린 머리 부분이 써늘한 느낌이다.

 

유일사 쉼터는 언덕을 하나 넘어야 했다. 등산로는 여전히 눈이 덮여 있었지만 오르막길에서는 별로 미끄럽지 않아 그냥 걸었다. 그런데 언덕에 올랐다가 유일사 쉼터로 내려가는 길에서 그만 사고가 나고 말았다.

 

먼저 넘어진 사람은 여성등산객이었다. 앞서서 내려가던 여성등산객이 쭈르륵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길은 경사가 상당히 급했지만 평탄한 흙길이어서 위험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내려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몸이 비틀거리며 쭈르륵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가.

 

"미끌~ 쭈르륵~~ 우당탕! 어이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순간 나는 벌렁 뒤로 넘어지고 만 것이다. 두 팔을 공중으로 내저으며 내 몸은 빠른 속도로 3~4 미터쯤의 거리를 미끄러진 후에야 길 옆의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며 정지했다.

 

아이젠 착용하지 않고 눈길을 내려가다가 넘어져 안경과 깔개를 잃어버리다

 

"어디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으세요?"

 

내 비명 소리를 듣고 뒤따라오던 40대 남성 등산객이 다가와 팔을 붙잡아 일으켜 준다. 그러나 다행히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엉덩이와 두 팔이 약간 뻐근할 뿐이었다.

 

툭툭 털고 일어나 우선 아이젠을 착용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언덕 위에서부터 아이젠을 착용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결국 넘어지는 사고를 부른 것이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약간의 통증이 오는 엉덩이와 팔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내려오노라니 왠지 시야가 부옇다. 착용하고 있던 안경이 없었다. 넘어지면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넘어진 곳으로 되돌아가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안경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조금 불편한 시력으로 그냥 산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것은 안경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내려가 유일사 쉼터에서 자리에 앉으려고 배낭 옆주머니에 차고 있던 작은 깔개를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넘어질 때 깔개 역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유일사 쉼터에서부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추운 날씨에도 등산객들로 가득했다. 인근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서울 등 타 지역에서 온 등산객들이었다. 등산객들의 복장은 대부분 중무장이었다. 어떤 등산객은 얼굴까지 온통 두꺼운 천으로 감싸 눈만 빠끔한 모습이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여기저기 주목들이 서 있었다. 큰 나무는 어른의 두 아름은 될 것 같은 굵은 줄기에 잎이 무성한 것도 있었지만 너무 늙어 속이 텅 빈 줄기에 시멘트 콘크리트를 가득 채우고 서 있는 나무는 매우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등산객들은 멋진 고목과 고사목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품속을 파고드는 바람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더욱 싸늘해졌다. 봉우리에 올라서자 돌담을 둘러쌓은 장군단이 나타났다. 이 봉우리가 태백산의 정상인 해발 1567미터인 장군봉이다. 등산객들 몇은 싸늘한 바람을 피해 장군단 안에서 간식을 들고 있었다.

 

배터리가 얼어붙어 기념사진 촬영에 애를 먹다

 

능선을 따라 천제단으로 향했다. 천제단 안에는 이미 '대박기원제'를 올리려고 평택에서 올라온 어느 회사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기원제를 올리는 모습을 잠깐 구경하다가 밖으로 나섰다. 바람결은 더욱 싸늘했다.

 

"우리 태백산 정상에 올라왔으니 기념사진을 찍어야 할 것 아녀?"

"그럼, 찍어야지, 자, 표지석 앞에 나란히 서 봐?"

 

일행들을 표지석 앞에 서게 하고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배터리 없음’ 표시가 나타나며 촬영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등산에 대비하여 전날 충분히 충전을 해두었는데 배터리가 없다니. 너무 추운 날씨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한 번 충전하면 사진 100컷 촬영은 문제없는 카메라가 아직 20여 컷밖에 찍지 않았는데  말썽을 부리는 것이었다. 기온이 너무 낮아 카메라를 꺼내 들고 준비 하는 사이 배터리가 얼어버린 것이다. 할 수 없었다.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들고 입김을 호호불며 애를 쓴 후에야 겨우 사진 한 컷을 찍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얼어서 얼얼하던 손가락이 저미듯 쓰라려 온다. 금방 동상이라도 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메라를 집어넣고 얼른 두꺼운 벙어리장갑 속에 손을 넣었다. 추운 날씨에는 두꺼운 벙어리장갑만큼 보온성이 좋은 장갑이 없다. 곧 얼었던 손가락이 포근하게 풀리고 있었다. 매우 추울 것에 대비하여 벙어리장갑을 준비해간 것은 매우 잘 한 일이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양지 쪽에 앉아 간단한 간식을 들고 하산길로 나섰다. 능선길을 따라 문수봉을 거쳐 내려가고 싶었지만 능선길은 너무 추웠다. 곧장 망경사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도 흙길에 눈이 두껍게 덮여 있어서 매우 미끄러웠지만 아이젠을 착용하고 있어서 미끄러지는 일은 없었다.

 

 

잠깐 내려오자 눈앞에 작은 비각 하나가 나타났다. 단종비각이었다. 삼촌인 수양대군 세조에게 밀려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단종의 비각이 왜 이곳에 세워져 있을까? 사연이 있었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어 있을 때 전 한성부윤 추익한이 단종에게 태백산의 머루다래를 따다가 지성으로 진상했다고 한다.

 

단종비각과 망경사 용정, 그리고 단군성전과 당골 광장의 각설이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단종이 곤룡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날이 바로 단종이 죽은 날이었다. 그래서 태백산에서는 단종이 태백산의 산신령으로 왔다 하여 이곳에 비각을 세워 그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각 안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 쓴 비석이 안치되어 있었다.

 

단종비각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사찰은 망경사였다. 길은 상당히 급경사였다. 망경사로 내려가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저 뒤쪽 위에서 핸드폰 한 개가 미끄럼을 타고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내 뒤를 따르고 있던 여성 등산객 둘이 그 핸드폰을 붙잡으려 했지만 놓친 것을 내가 재빠르게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길에서 두꺼운 상자 하나만 있으면 눈썰매를 타고 당골까지 빠르게 내려 갈 수 있습니다."

 

핸드폰이 썰매를 타듯 미끄러져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앞서 걷던 다른 등산객이 일러주는 말이었다. 그러나 공원 측에서는 등산로에서 썰매 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오가는 등산객들의 안전 때문일 것이다.

 

망경사 마당에 있는 문수보살상 앞의 그 유명한 용정은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용정은 해발 1470미터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100대 명수(名水) 중의 으뜸이라는 유명한 샘이었다. 망경사 마당 이곳저곳에서는 끼리끼리 둘러 앉아 점심 먹는 등산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태백산 정상에서 가까운 높은 위치에 자리한 망경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다. 신라 진덕여왕 때인 서기 652년에 자장이 창건하였다. 자장이 함백산 정암사에서 노년을 보내던 중 현재의 망경사 터에 문수보살 석상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암자를 지어 그 석상을 모셨다고 전해온다.

 

 

승려는 보이지 않고 등산객들만 북적이는 사찰 객사 중간에는 가게가 자리 잡고 있어서 등산객들에게 라면을 팔고 있었다. 망경사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하산길을 재촉했다. 길은 여전히 넓고 좋았지만 눈 덮인 급경사길은 눈썰매장처럼 미끄러운 길이었다.

 

급한 내리막길을 한참을 내려오자 저 앞 쪽 언덕에 멋진 한옥이 나타났다. 절집인가 하여 올라가 보니 단군 성전이다. 태백산 정상에 천제단이 있으니 이곳에 단군성전이 세워져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전 입구 마당가에는 길게 수염을 늘어뜨린 단군상이 안치되어 있고, 오른 편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팔작지붕 형태의 단군성전이 나타났다. 매년 개천절에 제를 올리는 곳이었다.

 

대문 앞 정면에 있는 돌계단을 내려오니 다시 하산길이 이어진다. 골짜기 길은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한파에 얼어붙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당골 광장이 가까워지자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골짜기 입구에는 석탄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지역이 한때 석탄을 많이 채굴하던 곳이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음식점들이 즐비한 광장 가운데에서는 여성처럼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아주 얇은 숄을 걸친 거의 벌거숭이 차림의 남자가 춤을 추며 구성진 노래를 뽑아내고 있었다.

 

"이 추위에 저 사람, 춥지도 않나. 저렇게 벌거벗고 노래하게."

 

일행들이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드러난 피부가 추위 때문에 온통 시뻘겋다. 엿과 노래 테이프를 파는 각설이 패였다.

 

"얼마나 추울까? 이 추위에 참, 먹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먼. 쯧쯧!"

 

주차장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수십 대의 관광버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이날 태백산을 찾은 등산객은 수백 명이 넘어 보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태백산, #천제단, #유일사, #이승철,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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