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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구곡에 대한 논란

 

 

성혈사에서 초암사로 가려면 덕현리에서 다시 배점리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는 죽계구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죽계구곡은 아래로부터 위로 9, 8, 7, 6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길 오른쪽의 죽계천(竹溪川)이 겨울이라 그런지 삭막하고 을씨년스럽다. 제9곡 지점인 이화동(梨花洞)에 죽계구곡을 설명하는 간판이 하나 서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국망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산굽이를 돌 때마다 절경을 이룬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 계곡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홉 굽이에 이름을 지었다. 후세 사람들이 글자를 새겨 넣는 과정에서 죽계구곡의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안축 선생이 경기체가로 쓴 죽계별곡이 가장 유명하다.

 

영주시 문화관광 자료에 보면 죽계구곡은 최석정(1646-1715)의 문인으로 1728년(영조 4)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가 처음 지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 죽계구곡의 명칭을 정확히 말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죽계구곡은 <순흥지(順興誌)>를 토대로 다음 아홉 군데를 말하고 있다. 백운동 취한대(제1곡), 금성반석, 백자담, 이화동, 목욕담, 청련동애, 용추비폭, 금당반석, 중봉합류(제9곡).

 

 

죽계구곡의 이름은 주세붕이 처음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세붕(1495-1554)의 문집 <무릉잡고> '소백산 초암사에서 자고(宿小白山草菴寺)'에 보면, 그는 1543년(癸卯) 6월29일 초암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석륜암에 오른다. 그러나 이곳에는 죽계의 아름다움만 이야기하고 있지, 구곡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산이 부처님 몸처럼 우뚝 서서 청정한 색을 띠고 있고  山立佛身淸淨色

계곡물 소리와 스님의 게송이 넓고 길게 울려 퍼진다.  溪翻僧偈廣長聲

은하수 이웃하고 누워 별의 움직임 살피니                 臥隣河漢星疑動

마음은 속세의 때를 씻어 말조차 맑아지네.                心洗塵埃語自淸

말로써 서로 수작하지 않으니 이게 바로 넉넉함일세.   莫說相酬是求益

뜬구름 같은 삶, 가는 곳마다 사람의 정 가득하구나.    浮生隨處有人情

 

우리는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을 통해 주세붕이 구곡의 이름을 지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퇴계는 백운(동)서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10리 떨어진 죽계의 초암(사)를 찾는다. 초암사 아래 있는 절경 백운대를 보면서 퇴계는 그 이름을 청운대로 바꾸게 된 연유를 적고 있다.

 

 

"초암사 아래로 맑은 물이 소용돌이치며 급하게 흘러내리다가 멈추어 깊은 소를 이룬다. 그 위 너른 곳에 앉아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본다. 아래를 보며 물소리 들으니 진짜 절경이 따로 없어. 주세붕이 이곳에서 놀다 이름 붙이길 백운대라 했네.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그 이름들이 혼란스럽구나. 흰 백을 푸를 청으로 고치면 좋지 않겠는가. (其下淸流激湍。迤爲渟泓。上平可坐。南望山門。俯聽潺湲。眞絶致也。周景遊名之曰白雲臺。余謂旣有白雲洞,白雲庵。玆名不其混乎。不若改白爲靑之爲善也)"

 

그런데 현재 죽계구곡 안내판에 이름이 나오는 것은 1, 2, 4, 9곡 네 곳 뿐이다. 그리고 그 이름도 약간 다르다. 제1곡이 금당반석(金堂盤石)이고 제2곡이 청운대(靑雲臺)이다. 제4곡이 용추비폭(龍湫飛瀑)이며 제9곡이 이화동(梨花洞)이다. 한마디로 혼란의 극치이다. 이번 여행의 주목적이 죽계구곡은 아니니 이들에 대한 탐사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죽계별곡'을 쓴 안축과 권별이 '죽계사'에서 찬양한 안향

 

 

계절도 소한과 대한 사이의 한겨울인지라 지금은 선인들이 노래한 죽계의 아름다움도 찾기가 쉽지 않다. 고려 충숙왕 때 살았던 안축(安軸: 1287-1348)은 이곳 순흥의 죽계를 방문하고는 경기체가로 '죽계별곡'을 지었는데, 때는 녹음방초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이었다.

 

안축의 문집인 <근재집(謹齋集)>에 실린 '죽계별곡'은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는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 고장 죽계를 방문해 자연과 함께 하고 사람과 함께 하면서 즐기는 안빈낙도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에 초암사를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숙수루(宿水樓) 복전대(福田臺) 승림정자(僧林亭子) 초암동(草菴洞) 욱금계(郁錦溪) 취원루(聚遠樓)에 올라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깬 채로 바라보니 홍백화(紅白花) 산비 속에 피어난다. 이에 절을 찾아 노니 경치가 기가 막히구나. (宿水樓福田臺。僧林亭子。草菴洞郁錦溪。聚遠樓上。半醉半醒。紅白花開。山雨裡。良爲遊寺。景幾何如)"

 

 

그리고 조선 중기의 문인 권별(權鼈: 1589-?)은 <해동잡록>에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안향(安珦: 1243-1306)을 다음과 같이 추모하고 있다. 안향은 이곳 소백의 동쪽, 죽계의 서쪽에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한 바 있다. '죽계사(竹溪辭)'는 이러한 업적을 남긴 안향을 찬양하는 일종의 축사이다. 그렇다면 순흥 땅 죽계는 해동 유학의 본 고장이 된다.

 

"동에 죽계(竹溪)가 있고 서에 소백(小白)이 있어 공의 사당 그 사이라. 백운(白雲)이 동에 가득 전로(前路)를 알 수 없다. 시내에 고기 놀고 산에는 잣나무니, 이곳이 옛날 공이 노닐던 곳. 어찌 아니 돌아오나. 돌아오소 돌아오소 날 슬프게 하지 말아주소. 소백(小白)은 서쪽이요, 죽계(竹溪)는 동쪽이며, 산에는 구름이요, 물에는 달이로니, 고금이 한결같다. 공이 오실 적에 옥룡이 앞에 끌고 붉은 난새(鸞) 옆에 끄네, 내 올리는 단 술잔 내 정성 살리시어 흠향하시고 가까이 즐기소서. 옛날 공이 나시지 않았을 때 사문은 어둡고 윤리는 땅에 떨어져서 구름같이 연기같이 어둡더니, 공이 한 번 나오시자 삼한(三韓)이 씻겨져서 백일 청천(白日靑天) 같이 우리도 높아졌네. 높고 높은 사당에 공의 상(像) 모셨으니, 죽계(竹溪)는 더욱 맑고 소백(小白)은 더욱 높다."

 

풀로 만든 암자(草菴)가 모두 기와집으로 변했어

 

 

이러한 죽계구곡을 차로 올라가니 초암사까지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초암사는 소백산에서 가장 오래된 절 중 하나다. 부석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절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화엄종찰을 짓기 위해 소백산 지역을 다니다가 현재 부석사 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서까래가 부족하여 현재의 초암사 자리에 풀로 암자를 짓고 수행하면서 서까래를 공급해 부석사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긴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초암사는 상당히 현대적인 절이다. 1980년대 초 비구니인 보원 스님이 불사를 시작해 대웅전, 삼성각, 대적광전 등을 새로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들 전각 외에도 요사채와 선방 등이 있어 초암사는 수도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초암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대적광전이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을 모셨다. 불상이나 탱화 단청이 모두 화려하다. 대적광전에서 조금 올라가면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그런데 삼성각 옆에서 돌로 만든 개가 한 마리 지키고 있다.

 

초암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봉우리인 원적봉이 도적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이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일종의 비보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요즘 절에서 개를 많이 키우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개가 아닌 개 조각상이 있는 것은 처음 본다. 비구니 스님들의 절이니 경계의 차원에서 만들어 놓은 것일 수도 있겠다. 이곳 삼성각에서는 눈 덮인 소백산 줄기가 아주 잘 올려다 보인다.

 

초암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건물이 대웅전이다. 이곳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했다. 대웅전 앞으로는 요사채와 선방이 있고 그 앞에 3층석탑이 있다. 3층석탑에서 계단을 타고 한 층 내려가면 화장실인 정랑(淨廊)이 있고 이곳을 돌아가면 나란히 선 두기의 부도를 볼 수 있다. 

 

 

단아한 3층석탑과 매너리즘에 빠진 부도

 

이곳 초암사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것이 바로 이 3층석탑과 부도이다. 3층석탑은 방형의 지대석에 이중기단을 하고 위에 삼층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이다. 상층 기단부와 탑신부에 우주를 제외하면 장식이 거의 없어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옥개석 하단에는 4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상륜부는 상당히 훼손된 편이다. 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일반형에 속하면서도 전체적인 비례에서 기단부가 다소 위축된 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층석탑은 초암사에서 역사성과 예술성이 가장 두드러진 문화재이다.

 

초암사에는 두기의 부도가 나란히 서 있다. 그래서 동부도와 서부도라 이름 붙였다. 초암사 동부도는 팔각원당형의 통일신라시대 부도로 넘어진 것을 세우는 과정에서 제대로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탑신과 중대석이 바뀌었고 그 중대석도 뒤집혀진 상태이다. 8각인 하대석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래층의 8각 지대석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서부도는 동부도보다 예술성도 조금 떨어지고 시대도 고려시대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복련을 새긴 하대석을 얹었다. 중대석은 8각 모서리에 우주를 표시했고, 상대석은 앙련으로 장식했다. 옥신부는 8각기둥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은 전각의 반전이 경쾌한 편이다. 상면에는 복엽연화문을 장식하여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상륜부는 대부분 훼손되었고 보주형의 연꽃 봉오리만 남아 있다.

 

초암사는 소백산 동쪽의 작은 절 성혈사, 초암사, 비로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재는 이들 세 절 중 가장 특색이 없는 절이 되고 말았다. 문화재도 가장 적어 절 자체가 갖는 비중도 크지 않다. 그러나 자연이 아름다운 죽계구곡을 통해 국망봉에 오르는 지름길에 절이 위치하고 있어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태그:#초암사, #죽계별곡, #죽계사, #3층석탑,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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