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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배다리 지하상가 들머리에 자리한 <문학당>.
▲ 문학당 인천 배다리 지하상가 들머리에 자리한 <문학당>.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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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길을 거닐면서

늦은밤, 골목길 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건널목이 없는 동네라 지하도로 건너야 하는데(지하상가에서 ‘건널목 놓기’를 결사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아서 찻길을 가로지를까 하다가 지하도로 건너기로 합니다. 이 길이 처음부터 차만 다니는 길이 아니었을 터이나, 자동차가 하나둘 늘면서 건널목이 없이는 사람이 길을 건너기 어렵게 되었고, 지하상가가 만들어지면서 건널목이 놓이면 지하상가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줄어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저 두 다리로 걸어서 움직이려는 사람은, 무슨 물건을 사러 나다닐 일이 없이 움직이려는 사람은, 자동차한테 치이고 지하상가한테 치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서울 광화문에도 건널목은 없었습니다. 그 널따란 길에 오로지 지하도로만 옮겨 다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난날 광화문 지하도로 들어갔다 나오며 옮겨 다닐 때에는 길이 헷갈려 엉뚱한 구멍으로 나오는 바람에 힘겹디힘겹게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옮겨 다니던 일이 떠오릅니다. 갓 서울에 자리잡을 때에도 헷갈렸고 서울에서 열 해 가까이 지내게 된 때에도 헷갈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익숙한 사람은 늘 익숙할 테지만, 안 익숙한 사람은 언제라도 안 익숙하기 마련인데,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어디를 가도 길알림판이 제대로 붙어 있는 모습을 보기란 어렵습니다. 더욱이, 사람과 자전거가 자동차한테 치이지 않을 걱정이 없는 채 다니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틀림없이 ‘사람 나고 자동차 났을’ 테지만, 사람한테 도움이 되고자 타는 자동차일 테지만, 자동차 없는 사람한테 마음을 기울이는 교통정책이나 사회정책이 나오는 일은 퍽 드뭅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할머니 할아버지, 계단을 탈 수 없는 장애인, 계단으로 짐을 오르내릴 수 없는 수레와 자전거는 모두 ‘범법자’가 되고 ‘기초질서 위반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는 고가도로를 헐고, 지하도만 있던 곳에 건널목을 새로 놓습니다. 그러나 인천에서는 없던 고가도로를 새로 놓으려 하고, 지하도만 있는 자리에 건널목을 놓으려는 움직임이 조금도 없습니다. 살고 있는 사람은 푸념을 넘어서기 힘들고, 애써 뜻을 모으면 장사하는 사람들 걱정을 하며, 기껏 일을 할 만하다 싶으면 인천을 뜹니다. ‘떠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라서 더더욱 우리 스스로 살기 팍팍하게끔 내버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좀만 벌면 서울로 뜨지 하고, 좀더 모아 서울로 가지 하고, 웬만큼 되면 서울로 옮기자고 생각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인천을 비롯해 부천이나 안양이나 광명이나 구리나 어슷비슷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스스로 우뚝 서고자 애쓰기보다는 스스로 힘들다며 떠나려 하고, 서로 모여 오붓하게 살기보다는 따로따로 떨어져 제 밥그릇만 챙기려 합니다.

지하도로 내려가는 계단 끝에 자리한 <문학당>은, 우리로서는 생각하지 못한 때에 열려 있어서 느긋하게 책 구경을 하러 찾아오기 힘들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가끔가끔 책을 만나 둘러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 문학당 지하도로 내려가는 계단 끝에 자리한 <문학당>은, 우리로서는 생각하지 못한 때에 열려 있어서 느긋하게 책 구경을 하러 찾아오기 힘들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가끔가끔 책을 만나 둘러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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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졸업사진책을 잔뜩 품에 안고

차가 뜸할 때 길을 건널까 하다가 그냥 지하도로 건너기로 합니다. 아기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란 꽤 버거운 노릇이지만, 거침없이 씽씽 내달리는 차를 살피며 길을 건너기도 아슬아슬하기 때문입니다. 밤마실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 팔에 힘이 쪽 빠졌으니, 그리 길지 않은 계단을 내려가도 땀이 솟습니다. 속으로 꿍얼꿍얼하다가 아기를 보면서 ‘녀석아, 얼른 자라서 엄마 아빠 늙으면 네가 이렇게 우리를 안거나 업고 다녀야지’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계단을 다 내려와 지하상가를 지나가려는데, 지하상가 들머리에 자리한 헌책방 <문학당>이 오늘은 문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여느 때에는, 또 여느 낮에는 문을 닫아 놓고 있더니, 꼭 오늘처럼 힘들고 아기를 안고 헉헉거릴 때에는 문이 열려 있습니다. 책 구경을 잠깐이나마 하고 싶어도 고단하니까 다음에 하자고 생각하게 되고, 힘겨우니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문학당> 아저씨들은 퇴근길 책손을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저녁나절 책방 문을 열어 놓고 술 한잔 기울이는 즐거움을 누리고픈 마음이 제법 있지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어, 졸업앨범들 많네?” 저는 앞서서 슥 지나치고, 옆지기는 잠깐 둘러보면서 저를 불러세웁니다. “응?” 그냥 가지 뭘 또 본다고 그러느냐고 생각하면서도, ‘졸업앨범’이라는 말에 멈칫합니다. 인천 쪽 학교 졸업사진책이 있다면 다문 한두 권이라도 사들고 가도 괜찮을 테니까요.

마침 <문학당> 아저씨가 술잔을 놓고 나와서 “앨범들 많이 있으니까 한번 보고 가세요.” 하면서 부르고, 옆지기도 “아기는 내가 안고 들어갈 테니까, 당신은 보고 와요” 하고 잡아끕니다. “그럴까?”

아기를 옆지기한테 넘겨 줍니다. 흐르던 땀을 훔치고 쭈그리고 앉아서 요모조모 살핍니다. 서울 쪽 학교 졸업사진책이 꽤 섞였지만, 인천 쪽 학교 졸업사진책 또한 여럿 있습니다. 다른 곳 졸업사진책은 심심찮게 장만해 왔으나, 인천 학교 졸업사진책은 거의 장만하지 못해 왔기에, 통째로 가져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저씨, 이거 모두 하면 얼마예요?” “다 가져가면, 십만 원만 주시오.” “십만 원이요…….” 지갑에 남은 돈을 속으로 어림합니다. 십만 원이 나가면 이 한 주 살림돈은 바닥이 납니다. 뒤적뒤적 하면서 망설입니다. 그러다, 인천여자고등학교 1967년치 졸업사진책을 넘겨보고는, ‘좋아, 1967년치 인천여고 졸업사진책 하나를 찾아내었으니, 이 한 권 값이라고 치자’고 생각합니다. 모두 열다섯 권을 사들입니다.

집에 와서 걸레로 먼지와 더께를 닦으면서 살피니 곰팡이 핀 녀석도 두엇 있는데, 사이사이 졸업장과 상장이 너덧 장 나오기에, 이만하면 잘 산 셈이지 하면서 마음을 달랩니다.

여러 학교 졸업사진책. 그리고 '선인재단'을 보여주는 파노라마 사진.
▲ 졸업사진책 여러 학교 졸업사진책. 그리고 '선인재단'을 보여주는 파노라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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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졸업사진책에 담긴 이야기

 《서울 명덕여자고등학교 9회》(1998) 졸업사진책
: 학교옷 아닌 개인옷을 입었는데 치마 차림은 전교생 가운데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거의 없고, 바지 차림도 거의 모두 청바지입니다. 이쯤 되면 거의 ‘학교옷’인 셈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교실 사진을 보면, 맨 뒷자리까지 빈틈이 거의 없고, 책상과 책상 사이도 아주 좁아서 몸을 옆으로 틀어서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고 책걸상도 참으로 작습니다. 1998년에 9회 졸업임을 헤아리면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학교인데에도 이렇군요. 2000년을 훌쩍 넘긴 오늘날에도 학교 형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요.

 《인천 선화여자중학교 15회》(1986) 졸업사진책
: 교실에서 찍은 사진이 없이 운동장 한쪽 끝에서 한 반 아이들을 모두 모아 놓고 찍은 사진이 실린 대목이 퍽 남다릅니다. 더욱이 담임 사진 밑에 반장 사진까지 넣었습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졸업사진책을 보아 왔지만, ‘반장 사진’을 따로 넣은 졸업사진책은 처음입니다. 교실 사진이 아닌 한 반 모둠사진이다 보니, 1986년 무렵 인천 쪽 중학교 아이들 옷차림과 신발과 머리 매무새 들을 한눈에 알아보기 좋습니다. 뒤쪽에 묶은 다른 사진들을 살피니, ‘등교 때 배지 안 달면 붙잡는 모습’과 ‘교내 반공 웅변 대회’ 사진이 눈에 뜨입니다.

 《인천 동인천여자중학교 1회》(1980) 졸업사진책
: 1회 졸업사진책이다 보니, 새로 지은 건물을 좀더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학교 건물 둘레를 널찍하게 보여주는데 둘레가 온통 휑뎅그렁합니다. 살림집 띄엄띄엄 벌판이군요. 어느 동에 있었기에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어 인터넷에서 이 학교를 찾아보는데, 지금 교장으로 있는 분이 학교를 소개하는 글에 “저는 효녀입니다” 하고 인사하는 교육을 한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이쿠 무서워라, 생각하며 졸업사진책을 넘기는데, 1회 교장 사진 밑으로 ‘애국조회 광경’ 사진을 넣는데, 시커먼 학교옷을 입은 아이들이 열중쉬어 하며 서 있는 모습이, 또 온 학교 아이들 머리 모양을 왼쪽으로 가름마를 타고 오른쪽에는 핀을 꽂도록 맞춘 짧은머리로 틀을 지어 놓은 모습이 적잖이 소름 돋습니다.

 《인천 제물포여자중학교 2회》(1984) 졸업사진책
: 아이들이 학교옷이 아닌 개인옷을 입고 있지만, 왜 이렇게 안 어울린다고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옷을 안 입는 다른 학교 졸업사진책을 보아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우리가 아이들한테 너무도 틀에 박힌 옷입기를 시킨 탓이거나, 아이들 스스로도 자기 몸을 꾸미는 옷차림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요. 유행 따라서 옷을 입히게 되어서 이리 되었을까요. 아니면, 인천이라서? 뒤쪽 모둠사진을 보니, “소련의 KAL기 격추만행 궐기대회” 사진이 들어갑니다. 이 사진을 보니, 저도 이무렵 국민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우리를 모두 운동장에 불러 모아 ‘궐기대회­’를 한 다음,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오는 행진까지 시켰던 일이 떠오릅니다. ‘학생 동원’은 오랜 우리네 전통(?)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떠나는 마지막 말씀을 남긴 뒤, 택시를 불러서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퍽 보기드문 모습이 아닐까 싶고, 이런 모습을 졸업사진책에 담아내는 이 학교도 대단했다고 느낍니다.
▲ 떠나는 교장 교장 선생님이 떠나는 마지막 말씀을 남긴 뒤, 택시를 불러서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퍽 보기드문 모습이 아닐까 싶고, 이런 모습을 졸업사진책에 담아내는 이 학교도 대단했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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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숭의국민학교 33회》(1974) 졸업사진책
: 이제는 허물리고 없는 옛 건물이 학교 건물로 나옵니다. 사진으로만 몇 장 남았을 예전 모습인데, 우리들은 너무 손쉽게 ‘낡았다’는 말을 내세워서 우리 역사와 문화를 무너뜨립니다.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국민학생이기는 하지만 ‘참 어려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인 인천이기는 하나, 1970년대 첫머리 인천 숭의동이라는 곳을 떠올린다면, 그리 넉넉하게 먹고 자라기 힘들었기에, 아이들이 더 작아 보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체육대회 사진을 뒤쪽에 싣는데 “새마을 체육대회”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옆 학예회 사진도 “새마을로 가는 우리 학교”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인천연합체육대회 카아드 색숀’ 사진을 석 장 찍어서 하나로 붙여 놓는데,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인천공설운동장과 둘레 골목집들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인천 인화여자고등학교 16회》(1981) 졸업사진책
: 졸업장이 함께 끼워져 있습니다. 책장을 넘겨 맨 첫 사진으로는 ‘이사장’도 ‘교장’도 아닌 ‘백선엽 대장’이 철모 쓴 사진을 싣고, 옆으로는 ‘학교법인 선인재단 설립자 백인엽’ 사진을 싣습니다. 두 사람 이름을 딴 ‘선인’재단이라고는 하지만, 철모 쓴 별 넷짜리 장군 사진을 여고 졸업사진책에 집어넣다니. 더군다나, 그 뒤로는 파노라마로 찍은 ‘선인재단 전경’을 넉 장에 걸쳐서 펼쳐서 보도록 큼직하게 실어 놓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렇게 만들어 주었기에 1981년 무렵 인천 동구 송림동과 남구 주안동 둘레 모습을 헤아려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인천 선화여자상업고등학교 15회》(1986) 졸업사진책
: 박정희 독재자가 날뛰던 때 인천에서 무서운 힘을 휘두르던 백인엽ㆍ백선엽 두 사람이 만든 ‘선인재단’ 모습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파노라마 사진으로 담아 앞에 길쭉하게 붙여놓습니다. 언제 보아도 엄청납니다. 이제는 이들 독재자 재산을 시가 거두어들이기는 했지만 ……. 뒤쪽에 동아리 사진을 싣는데, 맨 첫째로 나오는 동아리가 ‘새마을부’입니다. 헉, 새마을부라니. 이곳에서는 뭘 했지? 그런데,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에도 학교에 ‘새마을부’가 있지 않았던가?

 《인천 남중학교 29회》(1974) 졸업사진책
: 졸업장 한 장 끼워져 있는데 ‘선인재단 인화여고’에서 만든 졸업장하고 견주니 초라한 종이쪽 하나라고 느껴집니다. 사이에 어느 여학생 사진이 석 장 끼워져 있습니다. 남중 졸업사진책 임자와 이 여학생은 무슨 사이였을까 궁금합니다. 남중 졸업사진책에도 반장 사진을 따로 한 장 담임 밑에 넣어 줍니다.

 《인천 송도중학교 48회》(1968) 졸업사진책
: 몇몇씩 짝을 짓는 기념사진을 답동성당과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앞에서 많이 찍습니다. 이무렵이나 그 뒤로나, 인천 중동구에 있던 학교에서 모둠사진을 찍을 때면 으레 맥아더동상 앞에서 찍곤 했습니다. 소풍을 간다고 하면 으레 자유공원으로 갔고, 자유공원에 가면 으레 맥아더동상 앞에서 모둠사진을 찍었습니다.

인천여고 1967년치 졸업사진책에 실린 모둠사진 하나. 이렇게 학교 둘레 길가나 거리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기면, 스무 해나 서른 해, 또는 마흔 해나 쉰 해에 돌아보면 더없이 애틋하면서 남다른 추억이 샘솟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무렵 1967년만 해도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철길 밑이며 둘레에는 신호등이나 건널목이 따로 없었습니다.
▲ 옛 인천 거리 인천여고 1967년치 졸업사진책에 실린 모둠사진 하나. 이렇게 학교 둘레 길가나 거리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기면, 스무 해나 서른 해, 또는 마흔 해나 쉰 해에 돌아보면 더없이 애틋하면서 남다른 추억이 샘솟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무렵 1967년만 해도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철길 밑이며 둘레에는 신호등이나 건널목이 따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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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인천여자고등학교 16회》(1967) 졸업사진책
 《인천 인천여자고등학교 76회》(1988) 졸업사진책
: 1967년에는 16회라 하면서 1988년에는 76회라고 합니다. 갑자기 횟수가 늘어난 까닭이 궁금합니다. 아니, 예전 1967년에는 16회라고만 적은 까닭이 궁금하군요. 스스로 잊었거나 버렸던 옛 역사를 나중에 찾아서 횟수를 덧붙이게 되었을까요. 16회 졸업사진책을 보면, 인천여고 앞 철길다리 밑을 배경으로 일곱 아이가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진을 찍을 때 꼬마아이 하나와 애 업은 엄마가 살짝 기웃거리는 바람에 함께 찍힙니다. 철길다리 밑으로 중국집 ‘쳥용관’이 보이는데, 이 중국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간판만 바뀐 채로. 신호등과 건널목은 하나도 없고, 그냥 사람과 차가 뒤섞여 있습니다. 아이들이 몇몇씩 짝을 지어 모둠사진을 찍는데, 같은 자리가 아닌 자기가 찍고픈 자리에서 찍다 보니, 뜻밖에도 예전 모습을 돌이켜볼 만한 모습이 드물게 나옵니다. 아마 자유공원이나 북성동에서 찍었음직한 아이들 사진에는, 이탈리아포플러 옆으로 길게 철조망이 쳐진 모습이 함께 담깁니다. 지난날, 인천 바닷가나 바닷가 가까이는 길게 철조망을 쳐서 넘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서울 숭인여자중학교 8회》(1984) 졸업사진책
: 교장 사진이 둘입니다. 새로 온 분과 떠난 분이 나란히 실립니다. 떠난 분이 오른쪽에 실리는데, “학생들과 작별, 교정을 떠나는 모습”이라면서 흑백으로 실은 사진 두 장을 보니,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갑니다. 비오는 날, 교직원 두 사람이 택시 뒷문을 열어 주면서 배웅을 하는 ‘떠나가는 교장 선생님’이라니, 마음이 퍽 쓸쓸하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에는 자가용이 아주 드물 때라고는 하나, 교장 선생인 몸으로서 자가용이 없는 대목이 퍽 눈에 뜨입니다.

 《서울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18회》(1988) 졸업사진책
: 이무렵 다른 학교 졸업사진책은 거의 흑백으로 되어 있는데 빛깔 넣은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법 돈을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교무실 모습을 한 장 넣었군요. 교사들 앉은 자리가 참 좁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아이들 배우는 교실도 교무실마냥 다닥다닥입니다. 요즈음도 이때하고 마찬가지일까 궁금합니다.

1980년대까지는 빛깔 담긴 졸업사진책이 몹시 드문데, 이 학교는 온통 빛깔 넣은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울 일신여상 18회 졸업사진책에서.
▲ 빛깔 사진 1980년대까지는 빛깔 담긴 졸업사진책이 몹시 드문데, 이 학교는 온통 빛깔 넣은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울 일신여상 18회 졸업사진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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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한독실업학교 12회》(1975) 졸업사진책
: 학교에 모두 남학생인데, ‘전기과’에 딱 한 사람, 여학생이 있습니다. 실업학교라는 이름이지만 기계공고라 할 만한 곳인데, 남녀 문턱이 따로 없었구나 싶으면서도, 여학생이 기계과나 전기과나 자동차과에 들어가는 일이란 아주 드물었다고 느낍니다. 벌써 서른 몇 해가 지난 옛일인데, 이때 전기과에 다니던 여학생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앞쪽에 ‘충성스런 학도호국단의 애국조회’라는 말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집니다.

 《서울 홍익공업전문대학 19회》(1983) 졸업사진책
: 대학교 졸업사진책은 그다지 재미없다고 느낍니다. 가장 볼 만한 졸업사진책은 국민학교 것이고, 그 다음이 고등학교, 그 다음이 중학교, 가장 볼 만하지 못한 졸업사진책은 대학교 것입니다. 대학교 졸업사진책은 크고 비싸기만 하지, 실어 놓은 사진이 영 눈이 안 갑니다. 모두들 너무 멋부리면서 찍어서 그러한가 싶기도 하고, 어깨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탓에 그러한가 싶기도 합니다. 수수한 맛과 지난 한때를 읽는 멋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4) ‘그런 책 뭐하러 사요?’

이제는 옛 자료를 소담스레 여기는 매무새가 조금은 퍼져서, 졸업사진책 사들이는 일을 놓고 ‘그런 책 뭐하러 사요?’ 하는 대꾸는 퍽 줄었지만, ‘쓸데없는 데에 돈을 버리네!’ 하고 바라보는 사람은 그대로입니다. 먹고살 만하니 ‘희한한 책을 다 사고 벼라별 책을 다 모은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지난날 졸업사진책이 없이 어떻게 지난날 삶자락을 좇는 연속극을 찍고 영화를 찍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어떤 옷차림인지를 알지 못하면서, 지난날 학교가 어떻게 지은 건물이고, 책걸상이 어떤 모양이며, 교실은 얼마만한 크기이며, 책걸상 크기는 아이들 몸과 견주어 어떠했는지, 교탁은 어떠하고 칠판은 어떠하며 교무실은 또 어떻고, 골마루는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보는 졸업사진책이 아니고서, 어떻게 학교 이야기를 살려내겠습니까. 요즈음이야 졸업사진 찍는다면 잔뜩 멋부리고 차려 입을 테지만, 예전에는 졸업사진을 찍건 말건 여느 옷차림이기 일쑤였기에, 여느 사람들, 아니 여느 동네 아이들 옷차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고무신은 얼마나 많이 신고, 운동신은 몇 아이만 신을 수 있었는지, 아이들이 안경을 얼마나 꼈고, 교사들은 어떤 옷차림으로 아이들 앞에 섰는지를 짚을 수 있습니다.

집집마다 한두 권쯤 있을 기념사진책이 여느 사람들 발자취를 보여준다고 하면, 학교를 마치면서 한 권씩 사게 되는 졸업사진책은, 우리 교육 문화와 터전을 되짚도록 이끄는 고마운 자료입니다. 안타깝다면, 이런 소담스런 자료를 학교마다 제대로 간수하고 있지 못한 가운데, 교육부에서 알뜰히 그러모으는 도서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대목입니다. 집을 옮기거나 다른 나라로 떠나거나, 졸업사진책 임자가 죽으면 그예 폐휴지로 버려집니다. 그나마 헌책방에서는 재미있는 사진자료로 여겨 주면서 잘 거두어들여 주니 고마울 뿐입니다. 때때로 졸업사진책 사이에 졸업장이나 상장, 때로는 사진이나 성적표가 끼워져 있곤 합니다. 이때에는 한결 너른 우리 옛이야기가 엮이게 됩니다. 학교성적이 뛰어났건 그저 그랬건, 성적표 임자가 이름난 이이건 이름 안 난 이이건, 우리들 삶 한구석을 보여줍니다.

졸업사진책 사이에서 나오는 졸업장과 상장 들.
▲ 졸업장과 상장 졸업사진책 사이에서 나오는 졸업장과 상장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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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100년이 넘은 학교이건 쉰 해가 넘은 학교이건, 처음 문을 열던 때부터 오늘날까지 만든 졸업사진책을 차곡차곡 간수하는 한편, 해마다 써서 나눠 준 졸업장이라도 한 장씩 간수하는 학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상장은, 성적표는, 그무렵 사진은 얼마나 간수하고 있을까요. 아이들한테 나눠 준 유인물을 한 부나 두 부쯤 챙겨서 학교 역사로 두는 학교가 있을까요.

우리 나라가 오천 년 역사라느니 무어라느니 하고들 말은 하지만, 오천 해라는 역사를 뽐낼 만한, 아니 보여줄 만한 자취로 무엇이 있습니까. 오천 해가 아닌 오백 해 역사는, 아니 쉰 해 역사는, 아니 다섯 해 역사는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하다 못해 2000년에 나온 과자 봉지 하나라도, 1995년에 나온 라면 봉지 하나라도 알뜰히 챙기면서 우리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자료로 삼고 있을까요. 빨래비누를 싼 비닐을, 수억 개 넘도록 팔리고 쓰인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차곡차곡 그러모아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쓰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무엇이든 고스란히 때려부수기만 하고, 언제나 마구잡이로 올려세우기만 하면서, 오로지 돈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백범 어른도 말했지만, 문화가 없이 나라가 없고, 문화가 없이 개인이 없습니다. 문화란 다름아닌 삶입니다. 삶자락입니다. 삶결이 묻어난 자취가 없이는 한 나라를 말할 수도, 한 사람을 말할 수도 없어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주고받은 엽서 한 장이 삶이자 문화이자 역사입니다. 큰아이가 입고 둘째가 물려입다가 막내까지 이어입는 옷 한 벌이 삶이자 문화이자 역사입니다.

책 하나에도 역사가 깃들고, 밥그릇 하나에도 문화가 서리며, 버스표 한 장에도 삶이 배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와 같은 역사와 문화와 삶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도 보고 사회도 보고 경제도 볼 수 있다고 느껴요. 세상을 보는 눈이 없으면 지금으로서는 돈을 꽤 벌어들인다고 하나 차곡차곡 갈무리하지 못하고 헛되게 써 버리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꿰뚫는 눈이 없으면 지금으로서는 겉모습이 말끔하고 멋져 보인다고 하나 비어 버린 속내가 금세 드러나며 허물어지고 맙니다. 헌책방에서 드문드문 만나는 졸업사진책 하나에 ‘책이 무엇이고 사람이 무엇인지’ 하는 이야기가 알알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인천 배다리 〈문학당〉 / 전화 따로 없음 / 배다리 전통공예상가 지하도 들머리에 자리함. 저녁나절에 문을 엶.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태그:#헌책방, #문학당, #인천, #배다리, #졸업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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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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