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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독립 8년을 맞는 동티모르 역시 과거사에서 매듭지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포르투갈, 일본, 인도네시아에 의한 식민지배와 강점의 역사 속에는 반민족 행위, 부정한 힘을 등에 업고 일어났던 폭력과 부조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역시 친일잔재 청산에서 자유롭지 않다. 해방 직후 일제잔재의 청산에 대한 민족적 합의가 존재했지만, 그에 부응하는 처리가 이루어졌는지는 회의적이다. 또 북한과 남한은 다른 방식을 통해 친일잔재 청산에 임했다. 현재에서도 대한민국에서의 친일파 논쟁은 유효하다.

 

 동티모르와 한국의 과거사를 다루는, 그리고 다뤘던 방식을 비교는 우리를 뒤돌아볼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남한과 북한의 대조적인 친일잔재 청산 과정

 

남한의 친일잔재 청산은 실패했다. 실패의 정도를 넘어 그들은 권력을 쥐었고, 그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함으로써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덮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뤄질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미국의 정책이었다. 미국은 남한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제에 강력히 저항했던 전투적 민족주의보다 제국주의에 순응할 줄 알았던 친일파와 온건한 민족주의에 힘을 실었다. 다른 이유로는 냉전 시대의 논리이다. 남한은 반공을 제1의 목표로 정권을 수립해 나갔으며, 이는 민족 대 반민족, 애국 대 매국의 구도를 좌우대립의 구도로 바꾸어 버렸다.

 

 북한의 경우를 살펴보자. 북한은 철저히 일제잔재를 청산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처형자의 수가 많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숙청 대상은 '우두머리'수준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우두머리가 서울에 집중되어있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피바람 부는 수준은 아니었다. 광범위한 숙청을 단행했을 경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부역했던 자들을 처형할 수밖에 없고 이는 숙련된 노동자가 대규모로 숙청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은 '탄백(坦白)'이란 방식을 채택했다. 이른바 공개 선언인데,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당과 이민 앞에서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이다. 물론 탄백한 인물은 요직에 임명될 수 없었지만 사회 활동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었다.

 

동티모르의 과거사 청산

 

동티모르의 과거사 청산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긴 식민지 기간과 포르투갈, 일본, 그리고 인도네시아 모두 3국가에 의한 식민지배와 강점의 역사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평가한다면 '미온적인 대응'으로 볼 수 있다.

 

 크게 구분한다면 일본과 인도네시아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국내에서의 반민족 세력에 대한 대응으로 나눌 수 있다. 포르투갈의 경우 몇 백 년에 걸친 긴 식민 통치 기간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이후 계속적으로 동티모르를 지원한 배경 때문에 현재에 와서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동티모르 독립 후, UN은 인도네시아의 침공, 점령 등 범죄를 국제적 시스템으로 재판하지 않았다. 관계국은 더 이상 인도네시아의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외교관계 악화를 염려한 행동이었다. 이것은 동티모르에서의 문제 처리에 미온적인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일본과의 관계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딜리에 18개의 위안부가 설치되었다. 1987년 이후 증언에 의해서도 그 사실이 확인 된 바 있다. 1991년 8월 7일 아사히 신문에 투서된 글에 의하면 동부의 섬에서 연행된 여성들이 일본군의 위안소에서 일하게 되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와 같이 여러 기록들에 의하여 일본이 동티모르 섬 여러 곳에 위안소를 설치했던 것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 전체적인 발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과거의 일을 논의하기 꺼려하기 때문이다.

 

동티모르 국내에서의 화해?

 

2000년, 동티모르 '수용/진실/화해 위원회(CAVR)'가 설립되었다. '수용/진실/화해 위원회'는 진실탐구와 공동체 화해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진실탐구는 1874년 4월 25일에 비식민지화의 개시로부터 1999년 10월 25일(인도네시아 철수)까지 인권침해의 진실, 책임요인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프레테린 UNT, 동티모르군에 의한 폭력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많은 인터뷰가 실시되었고, 공청회가 열렸다. 공청회는 1.정치적 투옥, 2.여성과 분쟁, 3. 강제 이동과 기아, 4.어린이, 5.학살, 6, 정당 사이의 대립, 7.자결권과 국제사회의 주제로 7개의 공청회가 열렸다. 이 공청회는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다. 인도네시아 점령 하에서는 인권침해를 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프로그램인 공동체 화해 프로그램은 1999년 독립/자치 선거 이후 발생한 폭력 범죄의 세력인 민병대(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주장)를 다시 동티모르 공동체로 허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위원회는 1400명의 민병에 대해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화해를 성립시켰다.

 

대통령은 이것과 관련된 보고서를 보고 "인권침해에 관여했던 인도네시아 군도 재판해야한다. 아니면 선진국들은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원해야한다."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그 발언은 공개되지 않았다.  현재에는 '진실/우정 위원회'가 '수용/진실/화해 위원회'의 역할을 이어받은 상태이다.

 

과거사 청산의 어려움과 필요성

 

 나치의 4년간의 점령에서 벗어난 프랑스는 괴뢰 비시 정권에 협력한 7천여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우리의 일제잔재 청산의 미진함을 프랑스와 비교하곤 한다. 하지만 점령당했던 기간이 길어질수록 과거사 청산은 어려워진다. 인도는 영국의 통치를 200년 간 받았지만 친영(親英)파 청산이 부각되지 않았다. 식민 기간이 길어지면 반민족 행위와 생존을 위한 행위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또, 강력한 과거사 청산 정책은 자칫하면 너무도 많은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고 사회 갈등을 심화시킬 우려도 있다.

 

 남한과 동티모르는 위의 상황에 '경제'문제가 덧붙여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개발을 위한 차관(?)을 얻는 대신 일본이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일정 부분 회피할 수 있게끔 했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와 일본에게 과거 식민 지배와 강점의 책임을 물을 자격이 돼지만 관계 악화 그리고 그로인한 경제 문제의 심화를 우려해 한 발 물러서 있다.

 

 하지만 일제잔재가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의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남아있고,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감안할 때, 동티모르의 대처는 불안하기만 하다. 그만큼 동티모르의 과거사 청산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국제관계와 과거사 청산, 이 둘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왕도를 찾아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현재 동티모르에서 자원봉사활동 중입니다.


태그:#동티모르,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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