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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늘 꿈을 꾼다
▲ 종달리의 겨울바다 바다는 늘 꿈을 꾼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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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변함없음이 화석화된 것이 아니라 변함이 없음에도 단 한번도 그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을 간직함으로 인해 '변함없음'이라는 말이 살아움직이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내게는 바다가 그렇습니다.

그 곳에 가면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반겨주되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마음이 울적한 날에는 내 마음 속에 있는 근심과 절망을 모두 자기에게 달라했고, 마음 벅찬 날에는 함께 기뻐하며 파도소리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때론 교만한 마음을 꾸짖기 위해 거대한 폭풍의 바다로 다가오기도 했고, 밋밋한 마음으로 그 곳에 갔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와!' 탄성을 지를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와 나를 흥분시켰습니다.

신비로운 바다의 빛깔만큼 신비로운 꿈을 품고 있는 바다
▲ 세화등대 신비로운 바다의 빛깔만큼 신비로운 꿈을 품고 있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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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여름바다보다 인적이 드문 겨울바다가 좋습니다. 겨울바다 중에서도 칼바람 몰아치는 새벽의 바다와 붉은 하늘빛이 좋은 바다를 좋아합니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늘 기대를 품고 바다로 나가곤 했습니다. '나갑니다'가 아니고 '나가곤 했습니다'라는 과거형으로 이야기 해야하는 현실이 마음 아픕니다.

하늘과 바다는 맞닿아 있습니다. 하늘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하늘이 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바다가 되고, 어느 것이 하늘이 되어도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생명들 충만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갈매기가 헤엄치고, 고래가 날아다니는 꿈, 그런 환상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다입니다.

지는 해와 파도가 품는 바다의 꿈
▲ 모슬포항의 등대 지는 해와 파도가 품는 바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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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더러운 것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다시 생명을 회복하게 하는 바다는 이 세상의 썩어빠진 모든 것들을 다시 새롭게 창조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니, 꿈이 아니라 이미 현실입니다.

바다는 그렇게 이 세상의 썩어진 것들을 보듬어 새 생명으로 바꾸고자 하는 꿈을 꾸지만, 썩어진 것들이 스스로 바다의 품에 안기지 않는 한에는 그들을 강제로 끌여들이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꿈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여, 바다로 가자!"

가장 먼저 내가 달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 겨울바다에 꼭 가서 그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 다시 새롭게 창조해 달라고 바다에게 용서를 빌어야 겠습니다.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 적이 없는 바다
▲ 고망난돌에서 바라본 제주바다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 적이 없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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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제대로 보려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 빛의 변화는 가히 놀랍습니다. 무딘 사람들은 빛의 변화가 감지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인공으로 만든 물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빛이 들어있기에 인공의 색깔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빛이기도 할 것입니다.

해가 뜨기 직전과 해가 진 후, 그 시간 바다가 가장 신비한 빛으로 우리 곁에 온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닙니다. 길어야 30초, 그런데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돌아서거나 혹은 떠오르는 태양에 마음을 뺏겨 그 빛을 보지 못합니다.

일몰의 바다를 담으려고 먼 길을 달려와 놓고는 해떨어지면 곧바로 철수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등 뒤에 신비한 바다의 빛이 잠시 머물다 사라집니다.

소를 닮은 섬, 우도의 일출
▲ 우도의 일출 소를 닮은 섬, 우도의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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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는 춥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의 느슨했던 마음이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두 손만 마주잡아도 알게 됩니다. 함께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존재를 깊이있게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겨울바다가 주는 선물입니다.

한 해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힘든 시간들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가슴 벅찬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삶을 살았어도 새해가 오기 전 겨울바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그저 발도장만 찍고 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온 몸이 '춥다!'고 느낄 수 있을 시간만큼 바다를 바라본다면 힘든 일은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다는 늘 꿈을 꾼다.
▲ 하도바다의 일출 바다는 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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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새해의 첫날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아니, 겨울바다를 만나고 싶다면 오히려 그런 날은 피해야겠죠. 버스 혹은 기차를 타고 바다 근처에 있는 허름한 민박집에서 하룻밤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일출의 바다에서부터 일몰의 바다까지 온전히  본다면 더 좋겠죠.

겨울여행, 그 어디로 떠나도 좋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 많은 곳 중에서 이 세상의 모든 꿈을 품고 있는 겨울바다로 갈 것입니다. 꿈꾸는 겨울바다, 올해가 가기 전에 가렵니다. 그 곳에 가서 내 안에 더러운 것들도 씻어내고, 이 세상 혹은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쏟아붓고 싶었던 모든 말들을 목이 터져라 바다를 향해 외칠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다 겨울바다는 받아줄 것입니다.


태그:#겨울바다, #제주도, #겨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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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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