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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원래 노사간의 근로계약 또는 단체협약에 의해 자주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근로계약의 당사자인 개별 노동자와 사용자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임금결정을 근로계약에만 맡겨놓을 수 없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또한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것도 아니어서 단체교섭을 통한 임금결정도 일부에 해당할 뿐이다. 따라서 국가가 개입해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하자는 것이 최저임금제도의 취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각국에서 도입되기 시작한 최저임금제도는 1928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최저임금결정기구의 창설에 관한 조약'을 비준하면서 보급에 힘썼는데, 세계 대공황 이후 각국에 널리 정착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지난 1986년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어 1988년부터 이 제도가 자리 잡았다.

 

그들은 최저임금으로 살 용기가 있을까

 

2009년에 적용될 최저임금은 시간급 4000원, 일급 3만2000원에 불과하다. 이게 많기 때문에 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보시라. 그런데 이것도 많다며 깎으려고 한나라당과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지난 8일 노동부는 최저임금 법제도 개선 방향을 내놓았다. 김성조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달 18일 대표 발의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에서 지역별 차등화 방안만 제외했을 뿐 같은 내용으로 ▲60세 이상 고령자 감액 ▲숙식비용 임금공제 ▲수습기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 ▲의결기한 마감 시 공익위원 단독 결정권 부여 등이 핵심이다.

 

노동부와 한나라당은 최저임금법 개악이 명백함에도 이것이 '고용안정을 위한 조치'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에서 1~2년 더 늘리겠다는 비정규직 관련법 개악도 '고용안정'을 명목으로 내세우고 있다. 국민들을 아예 바보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최저임금법 개악은 최저임금 노동자의 임금마저 깎고 최저임금제도의 근본취지 자체를 무너뜨리는 시도다. 그리고 이는 헌법 제11조의 평등조항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명백한 위헌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것도 서러운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마저도 차별을 하겠다는 것이다.

 

헌법의 '평등조항'에 위배되는 최저임금법 개악

 

"헌법 제11조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이미 OECD 가입 국가 중 노인빈곤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한국인데, 이번 개악안이 통과되면 심각한 노인빈곤 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며, 대부분 청년인 수습 노동자들의 처지도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뻔하다.

 

게다가 의결기한이 마감되면 공익위원이 단독으로 최저임금 수준을 정하도록 한 것은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참여 자체를 배제하겠다는 발상이다. 사측 위원들이 끝까지 버팅기면서 기한이 마감되면 공익위원들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인데, 이제까지의 노사협상에서 공익위원들이 해온 역할을 떠올려보면 그 결과가 어디로 기울어질지는 뻔히 예상된다.

 

노동부가 그나마 김성조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내용 가운데 최저임금의 지역별 차등적용 부분을 뺀 것은 자신들이 볼 때 해도해도 너무한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 격차 심화 문제도 문제지만 이는 '최저'라는 개념 자체를 무색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임금 하락시켜 '내수진작' 하겠다고?

 

최근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2008년 3분기 노동자 1인당 월 평균 실질임금은 작년보다 2.7%나 낮아졌다. 특히 임시일용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9.2%나 떨어졌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최저임금법 개악은 일차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고령 노동자, 청년 노동자를 더욱 열악한 처지로 내몰겠다는 것이다. 왜 자꾸 없는 사람들한테 빼앗으려 들까.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질임금 감소가 소비부진으로 이어지고 내수침체로 연결된다.' 좌파들의 주장이 아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4일 발표한 '12월 경제동향'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다.

 

툭하면 '내수진작'을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다. 실질임금 하락을 조장하는 한나라당과 정부는 그럴 것이라면 차라리 '내수진작'이란 말을 아예 꺼내지도 말라.

 

'어처구니없는' 민주당의 행태

 

사방에서 시도되는 정부와 한나라당의 역주행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그런데 이 비상한 시국에 민주당은 무얼 하고 있나?

 

민주당은 10일부터 시작된 임시국회에서 이른바 '이념 악법'을 총력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당이 꼽은 '이념 악법' 가운데는 최저임금법 개악안도 들어 있다. 정세균 대표는 "쟁점 법안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면서 "특히 최저임금제 개악은 반서민 악법으로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 정치는 운동하고는 다르다며 부자 감세에 슬그머니 합의를 해놓고 이제와선 악법들을 물리력으로 저지하겠다고 나서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다. 부자 감세는 이런 악법하고는 차원이 다르단 말인가.

 

민주당 김현 부대변인은 지난 2일 논평에서 "지역민의 차별을 당연시하고 노령층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다니, 김 의원은 지역민을 대변하는 지역구 국회의원이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김성조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최저임금법 개악안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다.

 

웃긴 이야기다. 왜냐고? 이 '어처구니없는' 법안을 발의한 31명의 의원들이 모두 한나라당 소속은 아니기 때문이다. 발의에 동참한 31명의 뻔뻔스런 의원들을 살펴보니, 이 가운데 김충조, 노영민, 우윤근, 이낙연 이렇게 4명의 민주당 의원도 포함되어 있다. 한나라당보다 한나라당스럽게 느껴지는 이 의원들을 그대로 두고서 민주당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지금은 국민기본소득제도 논의 시작할 때

 

사실 현행 최저임금제도도 많이 모자란 제도다. 국민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지금은 최저임금제도 개악을 논할 때가 아니라 국민기본소득제도 도입을 공론화해야 할 때다.

 

국민기본소득제도는 빈민 구제가 아니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기본소득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지금은 '절대적 빈곤'의 문제를 넘어 사회생활에 따른 기본비용을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인 '사회적 빈곤' 문제의 해결로 논의의 초점을 바꿔야 할 때다.

 

그런데 안타깝다. 팍팍한 현실을 방어하기에도 힘이 부친다.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은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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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최광은 기자는 사회당 대표입니다.


태그:#최저임금법, #국민기본소득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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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비교정치, 한국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복지국가연구센터에 적을 두고 있다.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UK)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이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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