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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충이가 달리는 승용차를 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지난 10월 1010번 지방도에서 자전거를 끌고 오를 때다. 56만원짜리 16인치 자전거를 36만원에 판 주인은 다음날 문자로 신신당부를 했다.

 

"자전거 잘 타시구요. 오르막에선 절대 끌고 올라야 합니다. 고무벨트가 터집니다."

 

이 말을 새겨듣고 조금 가파른 경사가 나오면 무조건 끌었다. 그러니 자전거를 탈 때보다 끌 때가 많았다. 시속 4km로 긴 언덕을 쉬엄쉬엄 올라가니 별 걸 다 보게 된다. 차에 받혀 땅에 눌러붙은 사마귀, 물기 '쪽' 빠진 두꺼비, 내장 터진 개나 고양이. 송충이도 그 중 하나였다.

 

녀석은 반대편으로 가야 한다는 특수임무라도 받았는지 우직하게 2차선 도로를 건너기 시작했다. 비록 한가한 길이라곤 하나 그래도 몇 분에 한 대씩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었다. 송충이계의 '우사인 볼트'라고 해도 임무를 완성하기 쉽지 않을 성 싶었다.

 

저 멀리서 승용차가 한 대 올라온다. 녀석을 지켜보기로 했다. 자전거를 바닥에 눕히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꼬물꼬물' 기어가던 녀석이 두 바퀴 사이에 들어갔을 때 멈춰 선다. 승용차가 지나가자 다시 기어간다. 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제대로 봤을 리는 만무하다. 녀석이 가진 재주는 두 가지다. 가거나 서거나. 0과 1로 디지털 신호가 만들어지듯이 녀석은 '가고' '서고'란 두 가지를 조합해 승용차 두 대를 빠져나갔다.

 

어차피 반반 확률이었겠지만, 임무를 마친 송충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지만, 내겐 무리였다. 자칫하다간 앞서 본 사마귀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바퀴가 16인치로 보통 자전거(26인치)에 비해 10인치나 작은 자전거. 그래서 느린 자전거, 게다가 오르막에선 끌어야 하는 자전거였기에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되도록 느리게 가고자 한 이번 여행에서 친구가 되기에 제격이란 생각이다.

 

이 미친 듯이 달리는 사회에선 '관성'에 맞서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한 번 달리면 멈추기 힘든 게 운동법칙이다. 자동차도, 자전거도, 돈도, 경쟁도 그렇다. 무조건 '고'가 아니라 웬만하면 '스톱'이 이번 여행 목표다. 달리다 수시로 서서 주변을 살피고 구경하기, 내리막에서도 눈에 담고 싶은 모습 나타나면 그냥 멈추기. 다행히 지금까진 잘 지키고 있다.

 

길을 나선 지 나흘째. 이제 경남 고성이다.

 

14만여 명에서 5만여 명으로... 인구 감소 대책은 조선소 유치

 

서울과 경기도가 대한민국 인구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는 우리나라에서 고성도 피해지역 가운데 하나다.

 

1965년 경남 고성 인구는 13만5107명이었다. 1980년엔 9만2923명으로 줄었고, 2000년엔 6만3423명으로 줄어있었다. 2008년엔 6월말 기준 5만5518명으로 떨어졌다. 64년 13만8000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해마다 사람이 빠져나갔다.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은 지역경제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시장이 쪼그라들고, 학교가 사라진다. 한 번 속도가 붙으면 빠져나가는 흐름을 붙잡을 수가 없다. 이에 고성군수가 빼든 칼이 '조선업'이다.

 

경남은 해안선 길이가 2000km가 넘는다. 가장 긴 통영이 616km고 거제가 386km다. 고성도 187km나 된다.

 

2007년 기준 경남 조선업체는 1010곳에 노동자는 9만1426명에 이른다. 앞으로 10년은 걱정없다는 게 조선업이다. 남해안 도시들은 제각기 조선업을 유치하기 위해 열심이다. 고성은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다. 고성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본 것은 그물을 치고 어선을 띄우던 바다 대신 하루 종일 망치질 소리 요란한 조선소였다.

 

일단 해안도로를 달려보자. 고성읍에서 동쪽으로 빠져나오면 1010번 도로다. '봉달이' 이봉주가 연습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거류면을 지나 동해면 동쪽에서 77번 도로와 이어지는데, 이봉주가 혹할 만하다. 달리기 좋으니 자전거 타기도 오죽 좋을까.

 

길가 외양간에선 소가 눈을 껌뻑이며 나그네를 바라보고 입이 뿌루퉁 나온 여학생이 길가에 펴놓은 벼를 밀고 있다. 마음은 놀고 싶은데, 부모님이 일을 시킨 모양일 터다. 이 한가한 곳에서도 동물들은 죽어나간다. 족제비, 고양이, 뱀을 봤다.

 

죽은 동물들보다 더 많은 것은 조선소다. 동아해양, SPP, CTC, 지오고성조선. 죄다 조선소들이다. 아직은 뼈대만 세워놓은 곳이 대부분이다. 동해면엔 조선소 환영보다는 반대하는 글이 더 많다.

 

양촌·용정지구 조선산업 특구 분묘 보상 안내 펼침막이 보이더니, 이내 '분진소음 때문에 못 살겠다, 주민생존권을 사수하라, 어선어업권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라' 펼침막이 이어진다.

 

한 마을은 온 벽이 빨간 스프레이칠이다. '조용한 마을에 시끄러워 못살겠다, 조선공장 들어오니 마을주민 다 죽겠다, 마을주민 다 죽이는 조선공장 반대 시끄러워 못살겠다, 못들은 척 눈감은 고성군은 각성하라' 주변을 둘러보니 잔뜩 나이를 먹은 어르신들이다.

 

고성에 사는 지인은 고성조선특구에 대해서 밝게만 보진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호황에 따른 난립이었다. 장사가 잘 된다고 알려진 자리에 우후죽순 가게들이 들어서 망하는 일이 허다하다.

 

경남지역도 비슷한 모양을 보인다. 인근 마산, 사천, 통영, 거제, 남해가 모두 조선업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나라 밖에선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다. 지인은 고성지역 특구에 들어올 업체들이 대부분 중소기업들인데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우려한다. 만약 무너지게 되면 이미 수산업은 망한 상태니 둘 다 놓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너무 어둡게만 전망하는 것도 같지만, 이미 지역 언론에서 꾸준히 다뤄진 내용들이다.

 

이들 지자체의 조선산업 유치 전략에 대해 조선업계와 전문가들은 한마디로 "무분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조선산업을 유치하고 있으나 입지적으로 모두 인접해 있어 중복투자가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업계가 불황기로 접어들 경우 과잉투자와 행정력 낭비로 인한 부담은 해당 지자체와 주민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군 간 사전협의나 공동전략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 <국제신문>(2007년 1월 3일)

 

통영지역 조선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주거지역에 들어선 조선소 인근 주민들이 더는 못 참겠다며 환경피해 대책마련과 조선소 이전 등을 촉구하는 등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통영시 도남·봉평동 조선단지 환경피해대책위(위원장 이수용) 주민 150여 명은 24일 21세기조선·삼호조선·SLS조선소 등을 돌며 집회를 열고 환경피해 실태조사와 함께 대책 마련 등을 촉구했다. 주민들은 "주거지역에 들어선 조선소 덕분에 쇳가루 섞인 밥과 중금속으로 오염된 조갯국을 먹고 페인트로 화장하며 좋은(?) 시너 냄새 맡아가며 살고 있다"면서 △조선소 전면 이전과 △환경피해 실태조사 등을 요구했다. - <경남도민일보>(2008년 1월 25일)

 

이렇게 한적한 길을 달리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지 모른다. 몇 년 뒤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숨 가쁘게 달리는 트럭들이 날 맞이할 테니까.

 

열녀·열남... '아픔'을 느끼다

 

동해면엔 유난히 열녀비와 효행비가 많다. 기열문(紀烈門), 창효문(彰孝門), 쌍절문(雙節門), 정절문(貞節門), 창선문(彰善門), 쌍효각(雙孝閣), 청효문(靑孝門), 쌍청각(雙靑閣)…. 세다 결국 포기했다. 원래 이 땅 곳곳에 많았지만 여기만 남은 것인지, 원래 많았는지는 알 수 없다.

 

많고 많은 비석들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거류면 가려리 덕촌마을에 있는 설부인 열녀비다. 동해면 열녀비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단장을 했다. 비석에 적힌 글을 읽었다. 그만 마음이 아파진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중기 설만창의 딸 소사(召史)가 과년하여 출가해 보니 불행히도 남편은 나병환자였다. 벽방으로 명약을 구해 간병하였으나 끝내 죽고만 남편. 삼년상을 마친 뒤, 소사도 남편의 뒤를 따르니, 소사의 묘소에서부터 현재의 비각위치까지 가슴에 사무친 한이 하얗게 서리되어 내린 바, 고을 원님이 그녀의 한을 달래고자 비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비석엔 분명히 '그녀의 한'이라고 적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은 큰 병에 걸린 환자. 그 당시 나병치료를 하자면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을까. 결혼생활 재미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때. 게다가 삼년상이라니.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은 게 과연 자기 뜻이었을까 싶다. 당시 유교 사회가 만든 타살은 아니었을까. '열녀'란 곧 '한'이라고 읽힌다.

 

만약 그 시절 여성 힘이 강해 열남을 떠받들며 은근히 이를 요구하는 분위기였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성에 가면 꼭 상족암에 들를 일이다. 상족암은 바위가 상다리를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바위도 절경이거니와 여기서 보는 바다경치도 눈부시다. 고성읍에서 서쪽으로 1010번 지방도를 타면 만나게 된다. 77번 국도와 나란히 달리는 길이다.

 

상족암 입구 경사도는 꽤 가파르다. 입구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한참 바라봤다. 저 길고 가파른 길을 자전거를 끌고 올라올 생각을 하니 아득했기 때문이다. 비겁한 자전거 여행자는 어느새 돌아올 걱정을 한다. 에라. 방향을 틀었다.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산책로 입구에 자전거를 세우고 산책을 시작했다. 바삐 걸어도 30분이다.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진 않았다. 없기도 했거니와 사람들이 자전거를 들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근거는? 그냥 느낌이다.

 

상족암은 공룡 발자국 유적지로 유명하다.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 40km 해안가에 남겨진 공룡 발자국 흔적이 1900여 족으로 세계 최다다. 1982년 경북대 양승영 교수와 부산대 김항묵 교수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공룡발자국 천연기념물 411호로 지정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1999년이다.

 

바닷가 공룡발자국 유적지 주위엔 들어가지 말라고 울타리가 쳐 있다. 허나 곳곳에 사람들이 앉아 술을 마시고, 닭다리를 뜯는다. 한 무리가 아니다. 입구엔 '취사 무속 가무행위 등 문화재의 보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체의 행위는 할 수 없으며…'라고 분명히 쓰여 있다.

 

주변을 둘러보는 어르신 관리원 혼자로서는 역부족이다. 엄정한 법 집행만 강조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자면 인력을 늘릴 수밖에 없다. 그 돈은 모두 세금에서 나간다. 세금 증액을 과연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세금 줄이는 방법은 가까운 데 있다.

 

다시 자전거는 1010번 지방도를 달린다. 평지인가 싶더니 곧이어 고갯길 연속이다. 자전거를 탈 때보다 끌고 갈 때가 더 많다. 그래도 좋다. 아스팔트 중간 옴푹 파진 곳에 싹을 내린 풀을 보고, 아스팔트 길 옆 흰 선에 살짝 누운 메뚜기도 본다. 이 길에 나 혼자가 아니다.

 

학림리옛담마을이 나온다. 전국에 옛담마을이 몇 군데 있다. 흑산도 사리마을, 산청 단계마을, 거창 황산마을, 청산도 상서마을, 성주 한개마을, 강진 병영마을, 대구 옻골마을 등이다. 몇 군데 안 남았다.

 

우리가 옛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란 왠지 '변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잔뜩 숨통을 조여놓고,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쉴 때 살릴 생각을 한다. 좀 많다 싶으면 죽이고, 사라질 것 같다 싶으면 그때서야 '부랴부랴'다.

 

고성 학동마을은 납작돌에 황토를 바른 모양이다.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양이란다.

 

마침 동네는 옛담 공사를 하느라 부산하다. 때를 잘못 맞춰 왔다는 생각이 든다. 길은 비좁고, 길 곳곳에 사람과 장비가 가득하다. '톡톡톡' 작업하는 소리로 시끄럽다. 학림리최영덕씨고가는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178호다.

 

다음에 오면 마을이 차분해져 있겠지.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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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77번국도, #고성, #자전거, #상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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