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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집필하던 작업실이 불타고 있습니다. 불길이 무섭게 타오릅니다.
▲ 불타는 영혼. 원고를 집필하던 작업실이 불타고 있습니다. 불길이 무섭게 타오릅니다.
ⓒ 정선소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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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비 냄새가 나는 듯도 싶고 눈 냄새가 나는 듯도 싶습니다.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잠시겠지만 머물고 있는 집에 인터넷이 없어 세상 소식도 잊고 살았습니다. 지난 주말에야 인터넷이 연결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암울했고, 그만 컴퓨터를 끄고 말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약속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11일(화) 새벽 1시 살던 집이 불탔습니다. 고향 땅에 살고자 어렵게 마련했던 집입니다. 내가 집을 비운 날이었고, 혼자 계시던 어머니가 가까스로 몸을 피했습니다. 집은 5시간이나 탔다고 하고, 일주일 넘게 잔해를 태우는 연기가 피어 올았습니다.

집이 불타기 이틀 전만 해도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정선에 있는 집으로 놀러 오라고 말했습니다. 장작불 때는 아궁이가 아홉 개나 되니 아무 걱정 없이 놀러오라고 했습니다. 정선에 오면 한의 소리인 정선아라리도 멀미 날 정도로 들려주고, 지역 토속 음식인 메밀국죽도 끓여준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약속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애초 빈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이었고, 봄 장마가 져서 계곡의 얼음덩어리가 둥둥 떠내려 가던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아흐레를 굶었고, 나도 그렇게 굶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그렇게 빈 몸으로 세상에 나왔으니 모든 게 불탔다고 해서 억울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탄 집에 다녀오면 까닭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그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어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잠 많은 니가 있었으면 아매 큰일 났을 기다."

집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가리왕산 자락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십니다. 사실입니다. 불이 시작된 곳이 내가 자던 방의 지붕이었으니 한순간 압사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자식처럼 큰 죄 하나 멍에처럼 지고 잔해만 남은 집을 바라보며, 만약이지만 그날 집에 있었다면 불길을 잡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리곤 잿더미로 남은 것들에 대해 미안하다고 넋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렸습니다.

건진 것이라곤 오래 전에 쓴 육필 원고 뭉치뿐입니다.
▲ 불탄 육필 원고. 건진 것이라곤 오래 전에 쓴 육필 원고 뭉치뿐입니다.
ⓒ 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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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권 책이 타면서 내는 그 아우성과 비명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어머니가 지니고 있던 모든 게 불탔기 때문입니다. 내년 봄 소설집을 묶기 위해 준비한 소설이 다 사라졌습니다. 쓰던 장편소설도 흔적없이 사라졌습니다. 긴 세월 함께 했던 내 역사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수천 권의 책이 불 타면서 내는 비명과 그 아우성들. 오랜 시간 모아둔 귀한 자료들의 비명은 허공으로 흩어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고서점에서 구한 책들은 사료적 가치 또한 높은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 이젠 재로 남아 계곡을 휩쓸고 내려오는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토종꿀이 녹아흐르는 어머니 방에는 타다가 만 아버지 사진과 검게 탄 호박이 일그러진 채 뒹굴고, 방바닥을 아무리 뒤져도 어머니의 전 재산이 든 돈주머니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읍사무소에 갔더니 집이 불탔다며 긴급구호자금인지 뭔지 돈을 50만원 준다더라"며 좋아합니다.

집이 불타기 며칠 전 나는 해남에서 문학행사가 있어 집을 떠났습니다. 이상한 것은 길을 떠난 얼마 후부터 몇 걸음만 걸어도 신발끈이 풀어졌다는 것입니다.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괴이쩍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그 현상을 두고 마음 한구석이 뭔가 찜찜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힘을 주어 꼭 조여도 풀어지는 신발끈이 바쁜 걸음을 자주 멈추게 했습니다.

신발끈이 풀어진 의미는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잠시라도 쉬었다 가라는 뜻이었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 때 신발끈이 풀어지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변에 큰 일이 닥치기 전 뭔가 징조가 생긴다는 것 또한 무지한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겁니다.

자료라도 건질 게 있나 찾아보지만 없습니다.
▲ 뭔가 있을까... 자료라도 건질 게 있나 찾아보지만 없습니다.
ⓒ 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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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버릴 수 없는 인연있어 떠남이 힘들어

이젠 가리왕산 자락을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흉하게 방치된 집터를 치워야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어쩌면 끝내 방법이 생기지 않으면 그냥 두고 떠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감당할 몫치곤 너무도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큰형집 거실에 머물고 있지만 가시방석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나옵니다. 어제는 이종사촌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합니다. 아침으로 소고기국을 맛있게 먹었다며 좋아합니다. 아들 셋을 둔 어머니의 생애가 참으로 고달픕니다. 

불탄 집을 지키고 있는 개도 걱정거리입니다. 어쩌다 맺은 인연이지만 시골로 올 때부터 함께 살았으니 벌써 5년이나 한 식구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하니 책임져야 할 인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 또한 떠돌아야 할 처지이니 개 또한 챙길 방도가 없습니다.

개를 만나기 위해 불탄 집을 찾아가면 녀석은 엄마를 만난 아기처럼 응석을 부립니다. 다시는 떠나지 말라고 슬푼 눈으로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개를 골짜기에 두고 빠른 속도로 떠나옵니다. 주인을 쫒아 오다 어느 길쯤에서 엉엉 울고 있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도를 높힙니다. 그런 날은 저녁이 몹시 우울합니다. 하여 어둔 방에 앉아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잠도 오지 않습니다. 돌아올 곳이 없으니 떠나는 것 또한 자유로울 줄 알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삶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난마처럼 복잡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답없는 문제를 만들다 스스로 지쳐버리곤 마는 요즘 나는 유치장에 갇힌 죄인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미련 때문입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이 많기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버릴 수 없는 인연이 있어 번뇌가 많이 생기는 모양입니다. 세월이 약이라 하지만 지금 어깨에 얹혀진 것들을 버리기엔 겪어야 할 상처와 아픔이 너무 큽니다.

많은 이들이 내 삶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모금운동을 하고 자선콘서트도 한답니다. 면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민망하고 죄송스럽기 짝이 없는 요즘입니다. 주머니 얇은 문인들이 나서는 일이고, 말릴 수도 없으니 더욱 황망합니다.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는 약속만 합니다.

"산골짜기를 환하게 밝힌 내 영혼의 불"
▲ 가까이 갈 수도 없어... "산골짜기를 환하게 밝힌 내 영혼의 불"
ⓒ 정선소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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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내 삶의 역사 다시 씁니다

앞으로 나는 가난한 문인들이 모은 돈으로 쌀도 사고 거처도 마련하고 때로는 담배를 사고 버스를 타고 가끔은 목욕탕에도 가야 합니다. 대책없는 인생입니다. 어머니 말씀처럼 짧은 생이지만 살다보니 별 일을 다 겪습니다.

그래 가자 아니 가고 내가 누구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랴
가고 또 가면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되느니
가자 이 길을 다시는 제 아니 가고 길만 멀다 하지 말자
가자 이 길을 다시는 제 아니 가고 길만 험타 하지 말자
- 김남주 시 '길' 중에서

지금 거처하는 집도 곧 비워줘야 하니 이젠 나가야 합니다. 그러하니 등 떠밀려 길을 떠나야 합니다. 돌아올 곳이 없으니 돌아올 생각 말고 떠나야 합니다. 돌아올 곳이 없으니 미련없이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치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서러운 땅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어딘가는 나도 모릅니다. 어딘가 발 딛으면 그 곳이 평화이겠지요.

하늘에 눈 구름이 가득합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내려 알몸으로 남은 산과 거친 숨결로 남은 대지를 하얗게 만들 태세입니다. 이 순간 어떤 사람은 하얀 쌀가루 같은 눈을 기다릴 테고, 어떤 사람은 사랑 같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길 기다릴 것입니다.

눈이 내려 모든 것이 지워지면 화마로 인해 폐허가 된 가리왕산 자락의 집터도 지워지겠지요. 그리하여 흉물로 남은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개도 눈에 지워지고, 더욱 깊어진 눈매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근심도 함께 지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내린 눈 끝끝내 녹이 않아 내가 살아오면서 간직했던 지난 역사 또한 영원히 지워지길 어둔 하늘을 올려다 보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여 부끄러웠던 지난 역사 다 지워버리고 지금부터 쓰여지는 내 개인의 역사가 나의 온전한 역사로 남길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집을 잃은 건 인간뿐이 아닙니다. 불탄 집을 지키고 있는 개가 주인이 오자 떨어지지 않으려 합니다.
▲ "미안하다" 집을 잃은 건 인간뿐이 아닙니다. 불탄 집을 지키고 있는 개가 주인이 오자 떨어지지 않으려 합니다.
ⓒ 김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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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선, #가리왕산, #창작실화재,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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