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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좀 뜰 거 없어요? 있으면 하나라도 주세요."

 

오늘도 역시 수화기를 통해 다른 운송사들이 애걸복걸한다. 혹시 자신들의 화물차가 싣고 움직일 만한 컨테이너 물량이 있냐는 질문이다.

 

"죄송하지만 역시 없어요. 저희 코가 석 자잖아요."

 

그러나 최근 나의 대답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내가 속한 운송사가 비교적 큰 편이라 평소 자사 차량을 모두 돌리고 나면 남는 물량을 바깥 타 운송사에게 부탁하던 것이 관례였건만, 최근 남는 물량을 바깥 운송사에게 준 사례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아아아, 물량이 없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전 세계를 덮은 이후 타격을 받은 국내 산업은 비단 건설업이나 조선업·제조업·금융업뿐만 아니다.
 
환율 급등은 수입업체들에 큰 타격일 수밖에 없는다. 그러나 우리의 '수출'이라는 것이 대부분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한 뒤 파는 것이라고 본다면, 수출입 기업 모두 환율대란 앞에 속수무책인 현실이다.

 

이런 수출입 물량 감소로 직접 타격을 받는 것은 물류업계이다. 경제위기 한파로 물동량이 턱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재 인천지역 컨테이너 터미널 장치율은 평소 70~80% 하던 것이 50%대도 유지하기 힘들다고 하며, 화물을 싣고 들어오는 선박 역시 선적량이 이전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현재 인천항만공사(IPA) 공식 통계에 따르면 11월 인천항 컨테이너 물량은 전월 대비 53.4% 감소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터미널에 들어오는 화물이 적다는 것에서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터미널에 쌓인 화물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화주(수입 화물 주인)가 물건을 꺼내지 않고 환율 내리기만 기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물류업 중 운송의 경우 아예 씨가 마른 상태이다. 부산·인천 등에 있는 운송사 모두 하릴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기사들은 하루에 한 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허덕인다. 예전에는 한 대의 화물차가 하루에 오전·오후 두 군데 운송하고 다음날 물건을 받아놓은 뒤 퇴근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지금은 하루에 운송 한 건도 못하는 화물차들이 속출하고 있다.

 

덕분에 물류업, 특히 운송시장은 자의반 타의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화물연대 파업 당시 지탄받던 다단계 구조의 끝에 있는 작은 운송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물동량은 그나마 주요 화주들과 직접 거래를 맺던 대형 운송사 중심으로 존재하는데, 이들 운송사이 소속 화물차를 운영하고도 남을 정도로 물량이 넘치지 않는 이상, 조그마한 사무실에 컴퓨터 몇대 사람 몇명 두고 영업하던 중소 운송사들이 버티지 못한다.

 

영세 운송사들은 감원 감축을 하고, 그나마 물량이 있는 대형운송사들과 하도급 계약을 맺으려고 동분서주하는 실정이다.

 

그 뿐인가. 항구 근처 창고업체들 역시 곡소리를 낸다. 물량도 없고 화주가 물건도 빼지 않는 바, 창고들은 텅텅 비어 있으며 조만간 부도날 업체가 태반이라고들 한다. 지금까지야 어떻게든 버티지만 불황이 지속된다면 어찌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관계자들 이야기다.

 

경유값 내렸지만, 좋아할 수도 없다

 

끝없는 불황 앞에 내몰린 운송사들과 화물차 기사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유값이 6월 1900원대까지 치솟았다가 11월 현재 1300원대까지 내려앉아 운송사나 기사들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도 마냥 좋아할 일은 못 된다. 오히려 경유값 인하가 또 다른 위기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유값이 떨어지면서 현재 운송사나 기사들이 6월 화물연대 파업 당시 올려놓은 요율만큼 이익을 보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 화주에 대한 요율이나 기사들에 대한 하불이 모두 경유 2000원대를 기준으로 책정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주 측에서 본격적으로 볼멘소리를 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보통 기업들이 원가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검토하는 부분이 물류비인데, 현재 요율은 6월을 기준으로 책정됐으니 운송비용이 턱없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많은 수출입 화주들이 치솟는 환율로 인해 휘청거지 않은가. 운송비 인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그러나 경유가 하락보다도 운송비 인하를 부추기는 것은, 물량 감소로 인해 일을 찾지 못한 운송사들의 존재이다. 전체 물동량이 절반으로 감소하면서 일거리를 찾지 못한 운송사들이 기존의 요율에서 덤핑을 치면서 일거리를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제살 깎아먹기'가 본격화된 것이다. 물량을 잡기위해 운송비를 내리는 만큼 기사들에게 하불 인하를 요구하는 운송사, 어떻게든지 차를 굴려야 하기에 그 요구를 수락하는 기사들.

 

1997년 IMF 당시 구조조정 당했던 사람들이 대거 운송시장으로 진입하면서 지금의 운송료가 형성된 선례를 볼 때, 이번 경제위기를 맞아 운송시장은 또 한번 크게 요동칠 것이다. 각 주체들 입장에서 보면 힘들고 괴로운 일이지만, 수요와 공급으로 형성되는 자본주의 시장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현재의 경제 위기가 6월 파업에서 화물노조가 일부 얻어낸 성과들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당시 가장 큰 바람은 포화상태인 화물차들을 단계적으로 줄이고 표준요율제를 도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물동량 자체가 줄고 기존 화물차도 남아돌게 됐으며, 운송사도 기사들도 요율을 깎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같은 현실 속에서 표준요율제는 요원한 이야기일 수밖에.

 

또한 당시 대책 중 하나였던 LNG차량 변형 지원을 하기 위해 최근 정부가 공고를 냈지만 역시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경유가가 1300원대로 떨어진 이상, 기사들이 경유보다 힘이 달리고 충전하기도 힘든 LNG로 차를 바꿀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게다가 LNG의 경우, 유류보조금 혜택도 받을 수 없지 않은가.

 

결국 현재의 경제위기는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운송 선진화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다. 다시 운송시장은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이전투구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6월에는 동지였던 이들이 이제 하나둘씩 경쟁자로 변해가는 형국이다.

 

이제 곧 IMF와 비견할 만한 구조조정이 기다리고 비교적 운송업의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운송시장은 꽤 오랫동안 경제위기의 여파에서 허덕일 것이다. 

 

공허한 동북아 허브와 물류업의 위기

 

운송업을 비롯한 보관·하역 등 물류업의 위기. 그러나 이같은 위기는 이미 예견되었었던 문제일지도 모른다. 물동량이 없는 이상 물류업이 타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특히 현재 물류업의 위기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본격화된 비정상적 건설경기 부양으로 인해 더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취임 초부터 동북아 허브를 교조적으로 읊조리며 항만시설이나 도로 등 기간 시설에 과잉 투자해왔다. 쇼비니즘적이고 성장 이데올로기에 빠진 정부는 그것이 지방을 살리고 지방에서 표를 얻고 소위 '개인소득 2만불 시대'를 여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이 정책은 경기부양을 원하는 건설자본 구미에도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 규모 면에서 비교도 할 수 없는데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중국 물류업을 무시한 동북아 물류 허브 구상은 이미 공허한 구호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나마 그 구상에 힘을 실어주었던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빠져드는 지금, '동북아 물류허브'를 모토로 건설된 항만·도로 등이 텅텅 비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이미 개발된 서해안 터미널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기존보다 몇 배나 되는 물동량이 필요한데, 오히려 세계경제 위기로 물동량이 더욱 줄어들고 투자한 자금을 뽑지 못한 물류업체나 건설업체가 줄줄이 부도 위기에 놓여 있다. "이렇게 짓다가는 텅텅 빈 컨테이너 부두에서 낚시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업계의 우스갯소리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금융위기로부터 실물경제로 번진 경제위기는 아직 터널의 초입이라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잘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앉을 이 추운 겨울, 아직까지 고장난 축음기마냥 다 잘될 거라고 자기 최면 거느라 바쁜 관료들이 한심할 따름이다.

 

1년 후도 내다보지 못한 채 그 많은 물량을 치우기 위해서는 대운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그들. 어처구니없는 질주가 냉엄한 현실로 인해 멈추었음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 시대가 가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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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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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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