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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이 미국발 금융위기의 광풍에 휩싸이며 길을 잃었다. '신뢰의 위기'다. 진작에 신뢰를 잃고 이제 정권이양을 앞두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해결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공은 11월 4일 새로 선출된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에게 넘어갔다. 미국 대선 격전지를 취재하고 돌아온 KBS 1TV '특파원 현장보고'팀의 박성래 기자가 취재후기를 보내왔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생한 분위기를 토대로 대선 전망은 물론 방송에서 다루지 못한 다양한 뒷이야기들을 다룬다. <편집자말>
"오바마가 메시아라도 되나요?……. 버락 오바마가 예수님은 아니죠."

 

미국 폭스 TV, 미모의 백인 여성 출연자가 이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럴 리가 있냐, 웃기지 않냐는 얘기다. 시청자들은 이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오바마가 그렇게 게 잘 났어?' 폭스 TV가 노리는 게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오바마 지지자들은 그렇게 본다. 소위 '폭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아야 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런데 오바마는 정말 메시아일까? 적어도 흑인들에게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흑인들은 왜?

 

미국을 가본 사람들은 느낀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흑인들은 왜 저 모양일까? 게으르고 지저분하고 때로는 무책임하고 무례하고……'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렇다.

 

'검둥이니까 그렇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때로는 흑인들 자신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 흑인들끼리 싸울 때 서로 그런 말들을 입에 올린다. 한때 한국사람들이 '조선 X' 운운하던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흑인으로 살기로 했던 오바마도 당연히 이런 고민을 했다. 오바마의 대답은 "흑인들은 자기존중감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열등한 존재, 하찮은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인생을 막 산다는 얘기다. 물론 오바마식 표현은 아니지만 뜻은 그런 뜻이다.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자부심을 가질 만한 근거가 있다. 한국 사람들은 최소한 단군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은 있다. 세종대왕도 있다. 이순신 장군도 있다. 위대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역사왜곡에 얼마나 화를 내는지 보라. 일본의 역사왜곡이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자부심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 극우파들 입장에선 역사를 있는 대로 인정해 버리면 자신들의 자부심이 사라지기 때문에 기를 쓰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든다. 자신들의 삶이 너무 초라해져서 견딜 수 없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일 수도 있다. 그것이 역사 전쟁의 실체다.

 

미국의 흑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흑인들에게는 자부심을 가질 만한 근거가 거의 없다. 흑인들에게는 단군도 없고 세종대왕도 없고 이순신 장군도 없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노예였다. 아버지는 감옥에 있다. 어머니가 허드렛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간다. 밖에 나가면 백인들이 무시하고 멸시한다. 반박을 하려 해도 할 말이 별로 없다. 배운 것도 없다. 직장도 없다. 가난하다. 우리 동네는 더럽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뜰 때부터 매 순간순간이 '나는 열등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과정이다. 나는 하찮은 사람이다. 도대체 부모는 나를 왜 낳았을까? 지옥이 따로 없다. 남은 선택은 별로 없다. 마약과 범죄다.

 

흑인들의 큰바위얼굴, 오바마

 

물론 백인 가정에서 자란 오바마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다른 흑인들 같은 지독한 자기비하를 겪지는 않았다. 오바마는 이런 점에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흑인의 길을 선택한 이상 오바마가 피해갈 방법은 없다.

 

"웃어 넘겨서도 피해갈 수 없고 지성으로도 피해갈 수 없는 자기 경멸. 두보이스의 지식도 볼드윈의 사랑도 랭스턴의 유머도 정신을 좀먹는 이런 힘 앞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오바마도 술과 마약에 손을 대며 한 줌의 위안을 찾았다.

 

"마약중독자, 뽕쟁이. 그것이 내가 가고 있던 방향이었다."

 

대학생 오바마는 처절하게 묻는다.

 

"우리의 아버지들·삼촌들·할아버지들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런 상처가 뭔지 설명해줄 것인가? 누가 이런 열패감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여기서 지난 번에 소개했던 오바마 얘기를 다시 한 번 뜯어보자.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시카고에서 흑인 빈민운동을 하던 20대 중반의 오바마다. 젊은 거지가 다가와 구걸을 했을 때 오바마는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에 당신은 구걸보다 더 나은 걸 할 수 있어요. 당신 스스로 뭔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훨씬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제 기분도 좋아질 것 같군요."

 

오바마는 자기존중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얘기다. 당신이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은 자기존중감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열심히 해보면 자기존중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오바마에게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두보이스며, 볼드윈이며, 랭스턴을 모조리 들여다 보며 흑인들만의 큰바위 얼굴을 찾았지만 거기에 구원은 없었다. 하지만 마침내 오바마는 자기 경멸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길을 찾아 냈다.

 

공감의 사람 오바마는 자신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거지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한다. '흑인의 큰바위얼굴'을 간절히 기다리던 오바마는 스스로 흑인들의 큰바위얼굴이 되었다. 오바마가 내뿜는 카리스마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처절한 고민과 자기성찰을 통해 바위처럼 단단해진 자기존중감에서 나온다.

 

이제 대선에서 이긴 오바마는 흑인들의 조지 워싱턴이고 링컨이며 세종대왕이며 이순신 장군이다. 자신의 인생이 한심하다고 느끼고 자신이 하찮다고 느끼는 많은 흑인들이 오바마를 보며 인생이 살만하다고 느낀다. 오바마는 흑인들에게 자기존중감을 나눠준다.

 

대선 취재 중 미국에서 만난 흑인들에게서 나는 느꼈다. 상당수 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바마를 지지한다는 79살 백인 할아버지는 인터뷰 도중 오바마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보였다. 아들딸이 넷 있는데 그 중 셋이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려고 몇 달 전부터 워싱턴의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커다란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을 살 만한 삶으로 만들어주는 사람, 이런 사람을 메시아라고 부르면 호들갑일까? 로마제국의 압제 속에서 자기 인생이 살 만하지 않다고 느끼던 상당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가졌던 의미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메시아는 생각보다 인간적이다. 성경에 나오는 메시아 예수의 모습을 보자. 예수가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의 말은 이런 것이다. '과부 마리아의 목수 아들이 메시아라니 별 미친 사람들 다 보겠군.' 예수는 말했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법이라고…. 정말 인간적이지 않은가?

 

 

우리를 자랑스럽게 해줘서 고마워요!

 

2006년 8월, 대선출마를 저울질하던 신출내기 상원의원 오바마는 아버지의 나라 케냐를 방문한다. 케냐 사람들의 환영은 열광적이었다. CNN이 보도한 동영상을 보면 천진한 케냐 어린이들이 단체로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흑인 기자가 노래가사를 소개해주는데 이런 뜻이다.

 

"우리를 자랑스럽게 해줘서 고마워요, 오바마."

 

쓸데 없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청와대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합니까? 혹시 부끄러움을 참으면 이익이 생긴다는 걸 실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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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박성래 기자는 KBS 국제팀 소속으로 한국 대선과 미국 대선을 각각 2차례씩 취재했다. 저서로는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와 최근에 출간한 <역전의 리더, 검은 오바마>(랜덤하우스)가 있다.


태그:#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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