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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베이징 올림픽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그 자리에 장애인 올림픽(패럴림픽)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패럴림픽’ 그 자체보다도 방송의 무관심을 꼬집는 여론이 더 컸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좋지 않은 관습이다. 왜냐면 우리는 ‘장애’를 특정한 날, 특별한 행사 속에서만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볼 때, 이번에 출간된 조재도의 성장소설 <이빨 자국>은 우리가 삶의 한쪽에 비켜 둔 ‘장애문제를 생활의 중심으로 가져와 그것을 미시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장애를 삶의 한 부분으로 안고,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는 소년의 일상을 잔잔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은 중학교 2학년 학생인 ‘구승재’라는 아이의 눈을 통해 본 그네들의 이야기다. 성장하느라 팔다리가 길어 몸의 균형이 맞지 않는, 코밑이 거뭇거뭇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승재. 그러나 큰형이 장애인이기에 겪는 마음고생과 열등감을 숨기고 있는 승재, 그런 아이가 결국 주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열등감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자라난다는 이야기이다.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고. 거기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먼저 구승재와 나는 어는 면에서 같고 또 어느 면에서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에 내 체험이 아주 없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소설이란 작가의 체험을 벽돌로 찍어 지은 집이라는 점에서." - 작가의 말 중에서

그렇다. <이빨 자국>은 작가가 자신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우리가 마주보지 않았던 장애의 문제를 현실로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소년의 성장일기를 꾸밈없는 문장으로 풀어놓으면서, 성장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 되짚어보게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맺는 첫 번째 관계에서의 '상처'를 다루고 있다.

장애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려는 소년의 성장기

시골의 밤, 모두 잠든 어두운 시간. 말하지 못하는 형과 그에게 말을 가르치는 동생 둘만 깨어 있곤 했다.
"왜 말을 못 할까?"
"형은 자기 생각을 뭐로 보여줄까?"
형은 대답은커녕 '엄마'라는 말 한마디만 겨우 따라하는 정도니, 동생의 질문은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오곤 했다. - 본문 중에서

결국 밤의 말을 찾던 그 소년이 바로 <이빨 자국>의 저자 자신이다. <이빨 자국>은 작가의 유년에서 출발한 성장 소설로, 정신지체 장애인 형을 둔 작가의 가족사가 작품의 모티프다.

소년 조재도의 성장담은 소설의 화자 ‘승재’를 통해 마치 성실하게 써내려간 일기처럼 생생하고 담담하게 펼쳐진다. 때문에 이 고백적 소설은 현재의 시공간에서 숨 쉬는 한 소년 ‘구승재’의 삶으로 거듭난다.

소설은 승재가 오가는 집과 학교 두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승재네 집은 장애아 가정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정신지체장애인인 형 승운은 승재의 생활 속에 늘 함께 있는 불편한 존재다. 처마 밑에 하염없이 서 있거나 버스 정류장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는 승운의 모습은 언뜻 평온해 보인다.

열등감으로 숨기고 싶은 승재의 이야기

<이빨 자국>은 작가가 자신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우리가 마주보지 않았던 장애의 문제를 현실로 이끌어내고 있다.
▲ 조재도의 <이빨자국> 실천문학사 <이빨 자국>은 작가가 자신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우리가 마주보지 않았던 장애의 문제를 현실로 이끌어내고 있다.
ⓒ 박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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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큰형 승운은 언제나 그 평화로운 풍경에 균열을 일으킨다. 승운은 승재의 방학숙제를 망가뜨리는가 하면, 다리 밑으로 떨어져 다치고, 사기를 치려고 마음먹은 이웃의 도구가 되고, 급기야 행방불명된다. 이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승운의 모습보다는 그를 둘러싼 가족의 모습에 더 밀착하게 된다. 때문에 화자인 승재를 비롯하여 아버지, 엄마는 우리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으로 드러난다.

아버지는 승운을 골칫덩어리로, 애초부터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으로, 불운의 탓으로 생각한다. 해서 아버지에게 승운은 폭력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승운의 수족이자 유일한 응원군인 엄마는 다르다. 엄마는 장애를 한없는 보살핌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런 가운데 평범한 듯하지만 결코 예사롭지 않은 승재의 시선이 있다. 승재는 승운과 ‘장애’와 ‘소통’을 시도하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는다.

하지만 승재는 승운에 대한 관심을 접지 않는다. 그것은 감추고 외면하고 싶지만 그것이 바로 자신의 가족이 앓는 상처다. 상처는 상처를 숨기는 데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데서 치유되기 때문이다. 승재의 시선 안에서 ‘소외’되지 않았으면서도 ‘소외’된 대상인 승운. 승재는 그 승운의 실체를 어둡고 구석진 형의 방에서 목격한다.

방에 들어서니 시큼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발에서 나는 고린내보다 더 심했다. 아마도 엄마가 바쁜 나머지 가을이 다 가도록 목욕 한번 시켜주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방바닥엔 요와 이불이 깔려 있고 형이 입던 옷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수건을 덧댄 베개에는 시커먼 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어 있다.
아무리 보아도 이건 사람 사는 방이 아니다. 짐승의 우리도 이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맺혔다.
형이 너무 불쌍했다.
한집에 살면서 나는 형이 집에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집에서 밥 먹고 집에 들어와 잠만 자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방에서 짐승처럼 지내다니. 엄마야 바빠서 어쩔 수 없다지만 나는 뭔가? 일주일에 한 번 청소만 해줘도 이렇게 더럽고 지저분하지 않을 것 아닌가? - 본문 중에서

승재가 그 퀴퀴한 방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사회의 수많은 ‘외진 방’들이 떠오른다. 승재가 본 그 방의 실체는 우리가 가둬둔 이야기다. 소외된 현실의 또 다른 얼굴이다. 중학교 2학년인 승재의 최대 관심사는 이성친구도, 진로도 아닌 정신지체장애인 형이 속한 ‘우리 가족’이다. 그리고 장애라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순히 한 소년의 가족에 관한 사적비밀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공공연하게 숨기고 있는 비밀일 수 있다.

소설의 또 다른 주요 공간인 학교에서는 ‘공언하기’, 즉 ‘자기 드러내기’의 노력이 펼쳐진다.  승재가 속한 특별활동 '만두빚어'반의 ‘마인드비전’ 수업은 소년소녀들의 내밀한 속사정을 풀어내는 장이 된다. 그네들은 이 수업을 통해 학교 안팎 어디에서도 털어놓을 수 없던 사소하고도 속 깊은 비밀이야기들을 나누고, 그 이야기 듣는 와중에 자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진실게임을 벌인다. 그래서 '만두빚어'라는 기발한 별칭은 마치 만두처럼 자아를 빚어가는 이들의 진짜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 ‘종민’이 들려주는 고모 이야기는 장애인들의 세계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종민이가 장애인인 자신의 고모의 이야기는 우리가 소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범하기 쉬운 오류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도덕, 윤리, 공동선의 의무로써 장애 문제를 대하기보다는 “또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이 세상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종민의 솔직한 글과 행동은 승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 “쪽팔림은 순간이고 행복은 영원하다”라는 종민의 말은 수치와 상처가 비밀이라는 마법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이유를 건강한 소년다운 특유의 낙천성으로 대변하고 있다.

수치심과 상처를 대변하는 건강한 소년의 낙천성

소년 승재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얼굴은 만두빚어반 선생님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작달막한 키, 안경 너머 반짝거리는 눈마저 실제 작가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만두빚어반 선생님은 작가의 현재를 반영한다. ‘마인드비전’은 학교 선생님인 작가가 실제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 현장에서 영감을 얻은 소설 속 장면들에는 학생들의 글과 대화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결말은 마냥 낙천적이지 않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 엄마, 승재는 승운을 장애인 시설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다. 쌀쌀한 초봄에 시작되어 첫눈이 오기 직전, 겨울이 끝나는 즈음 승재의 성장일기는 마치 계절이 돌아오듯, 그들의 장애는 그들 곁에 머무를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결정이지만 이 마지막 장의 제목은 '새로운 결정'이다.

작가는 승재네 가족이 통과한 세 계절이 또 다른 시작을 예견하게 할 것이라는 단순하게 암시한다. 그렇지만 그 외에도 우리에게 '새로운 결정'이라는 숙제를 제시하고 있다. 함께 사는 것이 옳은 결정인가? 모두가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가? 이는 앞선 종민의 이야기와 부딪치기에 더욱 문제적인 결론일 수밖에 없다. 즉, 작가는 장애 문제에 있어 어떤 입장도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에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이 소설을 끝맺는다.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없다. 그만큼 소박하게 씌어졌다. 화려한 수식이나 과장 도 없다. 그저 유유한 강물처럼 흐르는 문장으로 일기의 마지막 장을 닫는다. 그러나 현재의 청소년 문학에서 톡톡 튀는 형식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인터넷 소설과도 크게 차별화 된다. 이 점이야말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매력이다. 멋 부리지 않고, 흉내 내지 않고, 오직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는 승재는 반항심보다는 고민이 더 깊고, 내뱉고 표현하기보다는 세상의 말을 듣는다. 그가 꾸밈없는 담백한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성장의 곰삭은 의미를 일깨운다.

이 소설의 최대의 장점은 진솔함에 있다

<이빨 자국>의 마지막 장면에서 승재의 손등에 허옇게 남아 있는 ‘이빨 자국’은 긴 여운을 남긴다. ‘이빨 자국’으로 대변되는 성장 과정의 상처는 승재가 더 이상 쪽팔리지 않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앙금은 말끔히 지워지지는 않는다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이러한 결말은 우리에게 사춘기적 쓸쓸한 성장의 한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빨 자국> 전반에 스며 있는 골계미 있는 문장의 힘 외에도 이 소설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은 진솔함에 있다. 이는 교직에 있었던 작가의 실제 삶이 글 속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이빨 자국

조재도 지음, 노정아 그림, 실천문학사(2008)


태그:#성장소설, #장애, #치유,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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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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