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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이거, 몇 년 전 태풍 매미 때 파괴된 겁니다. 그땐 참 대단했지요. 마을사람들 모두 저 산 언덕 높은 곳으로 피신했으니까요."

"저 바윗돌들도 그 태풍 때 파도에 떠밀려 방파제를 넘어 들어온 것들입니다."

 

일출을 보려고 새벽녘에 일어나 바닷가에 나왔다가 만난 노인의 말이었는데 정말 놀라운 풍경이었습니다. 마을과 바다 사이에 가로 놓인 길 바깥쪽에 있는 방파제는 상당히 높고 견고해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방파제 안쪽에 있는 마을 안길, 그 안쪽에는 부서진 집 한 채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5년 전 태풍 매미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 마을 풍경

 

그리고 태풍에 파괴된 집터 곳곳에 송아지만큼씩이나 커다란 바위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 바위들이 바로 2003년 9월에 남해안을 덮친 태풍 매미 때 바닷가에서 파도에 떠밀려 방파제를 넘어온 것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란 선박이라면 쉽게 납득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거운 돌덩어리가 파도에 떠밀려 방파제를 넘을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거제도의 명승지인 신선대와 해금강 그리고 바람의 언덕을 둘러보고 돌아와 민박집에서 묵은 다음 날 아침 일찍 포구로 나갔습니다. 어쩌면 아름답고 멋진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구에 나간 시간이 조금 일러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요.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침 이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새벽 일찍 카메라를 들고 바닷가에서 서성이는 낯선 나그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인에게 말을 건 것은 나그네였습니다. 방파제 안쪽의 파괴된 채 방치된 가옥이며 바위들이 궁금했기 때문이었지요.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포구 선착장 쪽 방파제가 가장 좋은 장소였지만 이쪽으로 나그네를 인도한 것은 한 그루의 소나무였습니다. 바닷가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소나무의 자태가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나무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소나무 아래 파괴된 가옥 한 채가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들도.

 

2003년 9월에 남해안에 상륙한 태풍 매미는 중심부 최저 기압이 950hpa로 당시까지 우리나라 기상관측 사상 가장 강력한 태풍이었습니다. 이 태풍의 영향권에 든 거제도 최남단인 이곳은 엄청난 비바람과 파도가 몰아쳐 집이 파괴되고 바윗돌까지 방파제 너머로 밀어 올리는 괴력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 때 저렇게 파괴된 집 주인은 결국 집을 포기 했지요."

 

다행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태풍 매미에게 혼쭐이 난 집 주인은 집을 고쳐 지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노인은 밭이 있는 언덕위로 올라가고 나그네는 포구 쪽 방파제로 천천히 걸었습니다.

 

다대리 포구의 황홀하게 아름다운 일출 풍경

 

포구 앞 저 멀리 잔잔한 넓은 바다로 작은 어선 한 척이 미끄러지듯 사라지자 곧 수평선 위로 붉은 기운이 퍼져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쉽게 얼굴을 내밀지 않았지요. 동녘이 밝아오는 바다 위로 몇 마리의 물새들이 날아올랐습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수평선 위로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태양은 포구입구 등대와 해금강 섬 사이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평선 위에 낮게 깔린 구름이 태양을 삼켜버렸습니다. 아쉬운 모습이었지요. 그러나 구름이 태양을 영영 가리고 있을 수는 없었지요. 곧 그 검은 구름을 뚫고 태양이 다시 불끈 솟아올랐습니다.

 

"아! 아름답고 황홀한 태양!"

 

나그네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태양빛은 수평선 위에 길고 선명한 꼬리를 끌며 서서히 떠올라 누리를 밝혔습니다. 그 밝아오는 태양빛에 작은 포구 입구를 지키고 있던 등대가 두 팔을 벌린 듯 서있었습니다.

 

등대는 두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넓은 바다를 향한 앞쪽과 포구로 들어오는 방파제 옆 안쪽에 서있었지요. 방파제 끝 쪽에 서있는 등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무인등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래 쪽 바닥에는 몇 무더기의 물새 똥이 보일 뿐이었지요.

 

"행복하게 해주세요, 등대님. 오늘 거제도 여행 왔다가 좋은 곳에 오게 된 것이 영광이에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런데 물새 똥 옆에 누군가 글씨를 써놓은 것이 보여 읽어보니 등대에게 기원문과 인사 글을 써놓은 것입니다. 장난기가 섞여 있는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난기 속에 순진함이 엿보여 피식 웃음이 나왔지요. 지난 여름 다녀간 젊은 여행객의 글인 듯 했습니다.

 

방파제에서 일출사진을 찍고 돌아서 내려오자 작은 포구에 몇 척의 낚싯배가 매어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텅 빈 작은 포구를 돌아 나오자 마을 모정 옆에 아기를 업은 할머니 한 분이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할머니에게 다가가 이 포구와 마을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지 3일이 지났지만 정확한 이름으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가르쳐 주는 마을 이름이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이름입니다.

 

"다대포라고요? 다대포는 부산에 있는 포구 이름인데요."

"다대포가 아니라 다대리입니다. 다대리 마을. 그리고 남부면 다대리 포구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것 같았던 기억은 비슷한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부산의 포구 이름은 다대포인데 이곳은 거제도 남부면 다대리 마을. 다대리 포구였던 것입니다. 3일 만에야 정확한 마을 이름을 알고 숙소인 민박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민박집 뒤 언덕에서는 집주인이 대나무를 베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출 사진 찍고 오십니까? 그거 뭐 볼 것 있나요, 우린 날마다 보는 풍경이라서 그런지…."

 

주인은 새벽부터 나가 일출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나그네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기왕 찍으려면 해금강의 일출을 찍어야지' 합니다. 순박한 어부 아저씨의 눈에는 자신의 마을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해금강이 훨씬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아침을 먹고 다시 언덕 위의 밭으로 올라갔습니다. 매실나무 돌보기 작업이 조금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생과 제수씨가 나무를 손보는 동안 주변 경치를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밭 가장자리에 있는 묘지로 올라갔습니다. 무덤 옆에는 예쁘고 크게 자란 동백나무 한 그루가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대리 포구는 아늑하고 고즈넉한 풍경입니다. 포구 건너 바다 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산은 거제 10대 명산 중의 하나인 망산이라고 합니다. 마을 건너편에 솟아 있는 우람한 산은 이 섬에서 제일 높은 해발 585미터인 가라산입니다.

 

마을 뒤편인 맞은편 언덕에는 빼어나게 자란 소나무 아래 울타리를 둘러친 배추밭이 보입니다. 이 지역은 섬인데도 산지가 많아서인지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밤에 고라니가 내려와 채소밭을 모두 망쳐놓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고라니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불쑥 자란 소나무 아래 울타리 친 배추밭, 정겨움이 솔솔 묻어나는 풍경이었습니다.

 

나지막한 언덕에서 바라본 이국적인 풍경과 아름다운 해수욕장

 

마을과 밭 사이로 난 고샅길을 걸어 조금 더 높은 지역으로 오르자 다복솔 묘목 밭이 나타납니다. 정원수나 관상용으로 판매할 목적으로 기른 다복솔은 소복소복 자란 모습이 여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다복솔밭 옆에는 따뜻한 지역에서 자생하는 종려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습니다.

 

언덕 위쪽으로도 종려나무 숲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가깝게 바라보이는 밭과 숲이 종려나무가 많아 마치 남방의 어느 다른 나라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 종려나무들도 모두 거제도나 인근 지역의 가로수나 정원수로 팔려나갈 묘목들이라고 합니다.

 

이국적인 풍경에 빠져 있을 때 동생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매실나무 손보기 작업이 끝난 것입니다. 동생내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첫날 캐놓았던 고구마를 갈무리하여 싣고 집을 나섰습니다. 다섯 개의 사과박스에 옮겨 담은 것을 형제와 친지들에게 택배로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길가에 하얗게 널려 있는 것들이 보여 살펴보니 고구마들입니다. 농부들이 자신의 밭에서 캔 고구마를 썰어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냥 보관하면 썩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을볕에 말린 고구마들은 겨울철에 아주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남부면 우체국은 포구 건너편 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고개 넘어 우체국엔 여직원 두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직원들의 안내로 고구마들을 보내고 나자 동생이 저 아래 해수욕장을 둘러보자고 합니다.

 

명사해수욕장은 작고 아담한 모습이었습니다. 바닷가 도로 아래편의 모래사장은 길이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폭도 그리 넓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한쪽 귀퉁이가 푹 패여 나간 모습은 철지난 해수욕장을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보이게 했지요.

 

그러나 도로에 인접하여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몰랐습니다. 깨끗한 모습으로 쭉쭉 뻗어 올라간 줄기와 가지, 그리고 푸른 잎으로 차일을 쳐놓은 듯한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수심이 깊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하기 좋다는 해수욕장은 소나무 숲만으로도 아름답고 좋은 해수욕장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해수욕장과 소나무 숲을 바라보다가 앞으로 조금 더 나가자 작은 학교가 나타났습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 몇 명의 티 없이 맑고 천진스런 목소리가 도로까지 울려나오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이승철, #다대리 마을, #태풍 매미, #방파제,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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