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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가뭄 끝에 달콤하게 대지를 적셔준 며칠 전의 단비. 그러나 그 비 그친 후 세상은 느닷없이 추워졌다. 겨울을 예감하기엔 천지에 가을냄새가 진동하지만, 시월의 마지막 일요일 한가로운 궁궐 그늘에 서있자면 겨울 아니어도 한기는 정강이를 타고 오를 정도이다. 그러나 그 안에 울려 퍼진 음악은 추위을 잊고 추일서정에 폭 빠지게 하였다.

 

올해로 다섯 번째인 여성국악실내악단 다스름의 궁궐음악회가 10월 26일 오후 3시 경희궁 숭정전 뜰에서 열렸다. 궁궐의 고아한 분위기와 국악이 어우러지긴 안성맞춤이다. 특히나 경희궁은 국악의 역사와 닮은 점이 참 많다. 일제강점기에 고작 중학교를 짓기 위해 피해와 유실을 맞은 것이나, 국악의 당시 역사와 맞닿아 있다.

 

물론 궁궐음악회가 그런 역사를 되짚자는 것은 아니다. 다스름이 다섯 해째 궁궐음악회를 여는 목적은 “닫혀 있는 공연장이 아닌 궁궐이라는 특별하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국악의 터전에서 어린이들과 관객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공연장에서의 연주는 미리 알고 오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으나, 궁궐은 애초에 음악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우연히 만나 그야말로 음악 자체의 힘만으로 좌석에 앉힐 수 있는 것이니 연주단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지금까지 다스름은 우연한 관객들을 쉽게 자리에 앉혀왔다.

 

 

경희궁이 다른 고궁들에 비해 작고, 볼거리도 부족한 탓에 대개의 경우 경희궁에 머무는 시간은 몇 분에 불과하며 아마 다음 휴일 계획들이 있을 법도 한데 매년의 경우 숭전전 뜰에 마련된 객석 의자들은 늘 빼곡히 채워졌다.

 

이번 공연은 급작스런 기온 강하로 궁궐을 찾는 이가 평소보다 줄었고, 자연히 관객의 수도 평년보다 적은 수였다. 그러나 연주 시간은 오히려 예정보다 길어졌고, 자리에 앉은 관객은 추위에 서로 몸을 가까이 기댄 채로 2시간 가까운 공연을 시종일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다스름의 궁궐음악회는 장소의 특수성에 맞게 정악 국악 ‘함녕지곡’을 다스름 대표인 유은선의 집박으로 열었다. 기악곡 천년만세에 이어 우리나라 전통성악곡 중 유일하게 남녀가 함께 부르는 전통가곡 태평가를 김호성 명인과 강권순의 유장한 목청에 실었다.

 

뜨겁지 않은 가을 해님은 구름에 숨기를 반복하며 슬쩍슬쩍 내비칠 때 고고하게 궁궐을 차고나가는 태평가 한 곡조는 음악이 아니라 차라리 한 폭의 그림인 양 귀로 들어 눈을 만족시켰다.

 

그렇게 유장하게 문을 연 다스름의 궁궐음악회는 휴일의 여유로움과 어울리는 판소리 마당으로 옮겨갔다. 먼저 이영신의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으로 좌중의 분위기를 바꾼 후 국악계에서는 연예인 국악인으로 불릴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높은 젊은 판소리꾼 박애리, 남상일 두 사람이 등장해 심청가, 춘향가 대목을 따로 그리고 함께 불렀다. 또한 판소리 공연의 말미에 단골로 등장하는 진도아리랑을 관객들과 함께 불러 쌀쌀한 기운을 웃음과 추임새로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이어 다스름과 지난 다섯 해 궁궐음악회를 함께 한 김삼진 무용단이 숭전전을 배경으로 ‘줄타기’와 ‘천중절’ 주제의 독무 및 군무를 선보였다. 전통춤과 놀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해온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김삼진 교수는 낡지도 아주 현대적이지도 않은 불특정 시제의 전통창작춤을 탁월하게 만들어왔듯이 이 날의 춤 또한 고대와 현재가 절묘하게 혼합된 춤을 보여주었다.

 

여성국악실내악단 다스름과 오래 호흡을 맞춰온 어린이 노래패 ‘예쁜아이들’이 들려주는  ‘어화둥둥 우리사랑’ ‘산도깨비’ ‘소금장수’는 어린이 관객들을 신나게 하였다. 이 날 공연의 대미는 다스름이 연주하는 신국악 ‘제주의 왕자’와 ‘프런티어’로 장식되었다. 공연시간이 2시간에 육박하는데도 앵콜을 연창하는 관객들 성화에 아리랑을 연주하고서 궁궐음악회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궁궐음악회를 마치고 여성들로만 구성된 다스름 단원들은 일반 공연장 공연보다 훨씬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날씨까지 쌀쌀하여 손이 곱아 연주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다스름 대표 유은선 씨는 “국악은 자연과 가장 가까운 음악이기 때문에 궁궐음악회는 다스름의 역사와 함께 항상 같이 할 것이다. 연주하는 입장에서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다. 궁궐음악회를 더 발전시키고 확대하기 위해 방법을 고심 중이다”라고 한다.

 

올해 평소보다 궁궐은 공연과 함께 했다. 심지어 공연이 열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인 아침 7시 경에 열렸던 창경궁 국악연주도 있었고, 봄에 열린 하이 서울 페스티벌은 궁궐이 주제였을 정도이다.

 

과거 왕조시대에 궁궐은 이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음악과 춤으로 가득했던 장소이다. 여러 가지 동기가 있겠지만 근래 들어서 궁궐이 국악과 함께 정물에서 생물로 진화하는 느낌이다. 거기에 오래 전부터 궁궐에서 국악연주를 해온 여성실내악단 다스름의 작지만 알찬 기획과 연주가 밑거름이 되었다. 또 내년, 내후년에도 경희궁을 고집하는 다스름의 변화와 발전을 미리부터 기대하게 된다.

 


태그:#여성국악실내악단 다스름, #궁궐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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