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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소비자들은 좀체 지갑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경기 침체 여파로 소비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서울시내 한 백화점의 모습.
 백화점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소비자들은 좀체 지갑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경기 침체 여파로 소비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서울시내 한 백화점의 모습.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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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5천원이다."

26일 오후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지하 2층 영캐주얼 매장. 한 20대 여성이 소리치는 외마디에 순간 이목이 집중됐다. 그녀가 놀란 것은 브랜드 티셔츠가 한 장당 5천원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 백화점에서 아무리 '브랜드 데이', '깜짝 타임세일', '고별전', '이월상품대전', '초대전', '특별전'을 열어도 의류가격이 1만원을 밑도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아웃렛매장이나 동대문 쇼핑타운에서 팔리는 '노 브랜드' 상품이라면 몰라도 백화점에서 브랜드 상품이 5천원에 팔리는 것은 보기 드문 장면이다. 백화점에서 옷이 이 정도 가격에 팔리고 있다면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보다도 싼 것이다. 거의 땡처리 수준이다. 

백화점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좀체 지갑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경기 침체로 펀드에 투자했다가 반토막나고 부동산 담보 대출 금리가 오르면서 소비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1997년 IMF 때보다 더 힘들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다른 백화점 명품 코너에서는 3000만 원짜리 겨울 코트가 팔려나가고 있다. 웬만한 부유층도 경기 침체에 몸을 움츠리고 있으나 대한민국 1% 최고 상류층은 끄덕없는 셈이다. 20대 80의 사회라고 하더니 이제 1대 99의 사회로 가는 듯했다.

재킷 한 벌에 10만 원 이상이라면? "생각해 보고 올 게요"

신촌 현대백화점에서 경기 불황을 가장 크게 느끼는 곳은 여성 의류매장들이었다. 지난달 6일 부도를 맞은 '패션네트'의 브랜드 '마리끌레르', '이지엔느' 등은 이미 '고별전'을 마치고 이 백화점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간혹 마지막 남은 재고 처리를 위한 '특가전'을 열 뿐 백화점 매장에서는 좀체 만나기 어려웠다.

이 백화점에서 만난 여성복 매장의 30대 담당자는 "한 번에 500만~600만 원어치씩 옷을 사가던 큰손이 사라졌다"며 "어차피 없는 사람들이야 백화점에 오더라도 매대에서 파는 세일 상품을 사고 말지만 이런 큰손들은 한 번 오면 매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데 아예 발길을 끊은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매장의 판매원은 "세일 상품의 경우에도 재킷이 10만원 이상이면 비싸다고 손사래를 치고 그냥 내려놓고 가거나 생각해 보고 다시 오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며 "고객들의 이런 소비심리를 반영하느라 업체들도 더 저렴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 소공동의 롯데백화점에서는 49만8천원에 판매되던 싱글 버버리 재킷이 단돈 9만원에 판매되기도 했다. 판매원은 "작년 이월상품이고 또 몇 장 되지 않아 아주 저렴한 가격에 내놓게 됐다"면서 "9만원에 팔기에는 매우 아까운 상품"이라고 씁쓸해 했다.

이밖에도 비록 이월상품이기는 하지만 50만원대의 겨울재킷이 6만9천원에 판매되기도 했고, 한 유명 의류브랜드의 경우에는 전 품목을 50% 할인하는 '폭탄'세일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 신촌 백화점의 부인복 매장에서 일하는 한 담당자는 "올 들어 매출이 20% 감소했다"며 "세일을 한 가격이라고 얘기해도, 비싸다고 하는 사례가 늘어났다"고 했다. 부인복의 경우에는 고가라 하더라도 마다치 않고 구매하던 소비자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비싸다'는 볼멘소리가 늘어났다는 것.

백화점 찾는 50~60대 여성들, "깎아주세요" 늘었다

정상가격으로 판매되는 백화점 매장은 소비자들의 발길이 뜸한 상태다.
 정상가격으로 판매되는 백화점 매장은 소비자들의 발길이 뜸한 상태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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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대 여성 전문 부티크 까르벤정의 매장 담당자는 "의류에도 양극화 바람이 부는 것 같다"며 "비싸고 좋은 옷을 찾는 부류와 값싸고 실용적인 옷을 찾는 부류로 나뉘고 있고 그에 따른 소비패턴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재킷과 바지, 블라우스나 티셔츠 등 시리즈나 '세트 위주'로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최근 경기 불황 이후에는 바지나 티셔츠, 재킷 등 단품 위주로 판매되는 것도 달라진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전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깎아 달라"는 고객이 많아졌다는 것. 백화점에서 정찰제로 판매되는 상품인데도 고가의 옷이니 깎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담당자는 "예전에는 DC(discount, 할인)를 많이 요구하지 않던 고객들도 최근에는 큰 폭의 DC를 원한다"며 "좀 어렵겠다고 하면 최소한 몇천원이라도 깎아 달라고 하는 고객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 백화점에서 국산 모피 코트를 팔고 있는 판매원은 하루 종일 단 한 벌도 팔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 매장 상품 가운데 저렴한 것은 200만~300만 원, 고가는 500만 원 이상인데 경기불황 탓인지, 지구온난화에 따른 날씨 탓인지, 아니면 둘 다여서인지 모르겠으나 판매율이 상당히 저조하다"고 전했다.

그는 "추석 이후에는 본격적인 모피 시즌인데도 하루에 단 한 벌도 못 판 날이 여러 날 된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의 이 말은 이미 부유층들도 최근 경기침체에 지갑을 닫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 백화점에서 명품 옷을 팔고 있는 매장 담당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최근 소비자들로부터 '재고상품 없느냐'는 문의를 종종 받는다"며 "블라우스 한 장에 150만원, 코트 한 벌에 400만~500만원인데 요즘 같은 불황에 선뜻 지갑을 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하루에 모피코트 한 벌도 못 팔 때도"

이 같은 현상은 서울시내 백화점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듯했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도 예전과 달리 매대 세일 상품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백화점 판매상품의 '심리적 저지선'인 양 5만원짜리 구두와 가방, 재킷, 코트 등 이월상품이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소비자들도 대개 저렴한 세일 상품 판매대에서 북적였다. 세일을 하지 않는 정상매장은 일요일 오후인데도 꽤 한산했다.

롯데 자체 브랜드로 20대 여성의류를 판매하고 있는 한 매장의 판매원은 "3만5천원짜리 가격표를 붙여놓으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 3만5천원이냐고 묻고 있다"며 "아무래도 경기가 어렵다는 보도가 잇따르다 보니 모두 저렴한 상품을 찾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회사 면접시험이나 맞선, 결혼 등 특별한 일정을 앞두고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경우에는 비싸더라도 40만원 이상의 재킷이나 블라우스, 스커트 등을 별소리 없이 구매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필요에 따라 좋은 옷을 꼭 사야 하는 경우에는 불황과 관계없이 옷을 산다는 얘기다.

불황 타지 않는 명품 매장... 2900만원짜리 코트도 팔려

불황을 타지 않는 명품매장
 불황을 타지 않는 명품매장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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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반대로 대한민국 1% 상류층들은 불황을 타지 않는 듯했다. 고가 상품들이 판매되는 명품 매장은 불황이 없었다. 26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1층 구찌(GUCCI) 매장에는 쇼핑객들이 줄을 섰다.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밀려들면 판매원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판매원들이 제품설명을 할 수 있는 인원만큼만 입장시켰다.

구찌 매장 앞에선 '스태프'라는 명찰을 단 남성들이 일반 소비자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크리스천디오르(Dior) 매장의 한 판매원은 "미국발 경제위기나 한국경제 불황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고 있다"며 "지난달 판매량은 오히려 중폭 상승했다"고 전했다. 이 매장에서는 가방이 200만원, 지갑이 50~70만원 선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이 같은 가격에도 "싸게 해 달라"거나 "저렴한 상품을 찾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는 게 판매원의 설명이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펜디(FENDI)도 비슷했다. 펜디 매장의 한 판매원은 "강남 압구정동이나 무역센터 현대백화점에서는 판매량이 줄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라며 "우리 매장은 전혀 불황을 타지 않으며, 판매량도 오히려 늘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달에는 2900만원짜리 여성용 겨울코트가 팔릴 정도로 명품매장에는 불황이 없다"며 "명품매장에 와서 저렴한 상품을 찾거나 깎아 달라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초호화판 값비싼 옷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몇 푼 깎아달라는 것은 코미디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면서 슬쩍 웃기도 했다.

실제 중산층이나 고소득층도 최근 닥친 경제위기에 움찔하며 상황을 관망하고 있지만, 정작 대한민국 1% 상류층들은 명품매장에서 전혀 불황을 타지 않는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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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백화점, #경기불황, #롯데백화점, #여성의류, #명품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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