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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절벽을 바라보며 지레 질렸었는데 올라와 보니 비단길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앞모습과 뒷모습이 전혀 다른데요? 두 얼굴을 가진 산이에요."

 

맞은 편 능선길에서 주봉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바라보며 지레 겁을 먹었던 아주머니가 놀랍다는 표정입니다. 10월 21일 찾은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용화산 정상 뒷길은 정말 비단길이었습니다.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경춘가도와 춘천호반 길을 달려 두 시간 만에 춘천댐에 도착했습니다. 춘천댐을 지나자 곧 용화산 길이 나타났지요. 그러나 길은 용화산까지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길이 입구 골짜기에서 끊겼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황금빛으로 물든 벼논과 은행나무

 

버스에서 내려 골짜기를 따라 걷는 길가의 논에는 수확을 앞둔 벼가 누런 황금빛으로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랜 가을가뭄 때문인지 산자락의 단풍색은 썩 고운 빛깔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산마을 어느 집 마당가에 늘어선 은행나무들은 벼논의 그것처럼 황금빛 아름다운 빛깔이 현란한 풍경이었지요, 잔디밭에 떨어진 은행잎들이 아직도 파란 잔디 위에 금화를 뿌려 놓은 듯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황금색 벼논과 은행나무 뒤로 저 멀리 바라보이는 용화산이 웅장한 모습입니다. 골짜기 사이로 바라보이는 용화산은 화천의 명산답게 기암절벽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서울 삼각산의 뒷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도로공사를 하다가 중단했는지 도로가 끊긴 지점에서 비포장도로가 이어지다가 곧 산길로 바뀌었습니다. 산길은 온통 울퉁불퉁 작은 바위들과 커다란 돌멩이들이 깔려 있어서 걷기가 매우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산악회원 40여 명 중에서 앞장선 등산객들은 걷는 속도가 너무 빨라 따르기가 힘에 겨웠습니다.

 

산행에서 처음부터 뒤처지면 점점 더 힘들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무리를 하면 그건 더욱 위험합니다. 심장에 무리가 되면 산행을 도중에서 포기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일행 세 명은 너무 뒤처지지 않으면서 적당하게 힘을 배분하여 무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허위허위 올라 고갯길에 이르니 길은 오른편 능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대부분 바윗길이어서 밧줄과 쇠줄을 이용해야 했지요. 첫 번째 큰 바위에 오르니 고개 건너편 넓은 바위 위에서 자란 두 그루의 소나무가 경이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처음엔 빨리 올라가다가 뒤처지는 등산객들

 

생명의 경이로움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길가의 소나무 한 그루도 커다란 줄기가 바위에 기대듯 자랐는데 뿌리의 몇 가닥은 바위를 끌어안듯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바위야 이 소나무가 좀 기대고 안아야 살아갈 수 있겠구나, 나 좀 봐 주렴?"하는 모습이었으니까요.

 

조금 더 올라가자 저 앞쪽에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바라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봉우리는 앞쪽의 거대한 바위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었습니다. 그냥 보기에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지요.

 

"어머나! 이를 어째 저 봉우리를 어떻게 오른담, 여보! 난 안 되겠네, 여기서 포기하고 내려가야 하려나봐."

 

부부 등산객 중 여성이 남편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는 아주 정다운 모습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처음 오를 때는 우리 일행들보다 앞장서 올랐는데 바윗길에서 우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올라가고 있잖아? 당신도 오를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올라가자고."

"난 안 될 것 같은데, 정말 올라갈 수 있을까?"

 

겁에 질린 아내에게 남편이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부인은 일반 산길은 잘 걸었지만 바윗길에선 매우 겁을 내고 있었습니다. 밧줄이나 쇠줄을 붙잡거나 바윗길을 오를 때면 남편의 도움 없이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너무 늦어지는 그들 때문에 지체하다가 할 수 없이 그들을 앞질렀습니다. 그들 부부는 후미대장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능선길에 올라서니 전망이 시원하게 열렸습니다. 앞 쪽으로 저 멀리 오봉산 자락과 연결된 배후령 고갯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모습입니다.

 

뒤쪽으로는 파로호의 끝자락이 살짝 바라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골짜기 앞쪽에 주봉인 만장봉의 위용이 드러났습니다. 용화산의 주봉인 만장봉은 도봉산에 있는 만장봉처럼 앞면이 깎아지른 바위절벽이었습니다.

 

"역시 명산은 저런 바위절벽과 기암괴석이 필수요소라니까. 얼마나 웅장하고 멋진 모습이야?"

 

일행들이 감탄을 하고 있을 때 평평한 바위 위에서 쉬며 간식을 먹고 있던 아주머니 두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이 아주머니들도 이곳까지 빠른 속도로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이곳까지 오르는 동안에 10여 명의 등산객들이 우리 뒤로 쳐졌습니다.

 

"어머머! 저 골짜기 단풍 좀 봐? 그리고 이 바위 능선의 저 소나무들."

 

이 능선은 성벽처럼 이어진 바윗길이었습니다. 바위 아래쪽은 까마득한 절벽이고 그 절벽 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소나무 몇 그루가 정말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절벽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윗길 위에도 거짓말처럼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감탄을 터뜨린 아주머니들은 우리 일행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바윗길을 지나자 길은 부드러운 흙길로 바뀌었습니다.

 

"저 위가 바로 정상이네, 저쪽에서 바라볼 때는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아주 위협적이었는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이건 완전히 비단길이잖아?"

 

여성등산객들과 우리 일행들 모두 믿기지 않는 산길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합니다. 앞쪽에서 바라볼 때는 까마득한 절벽이 웅장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위쪽에 이런 비단길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정상에 오르니 제법 넓은 공간에 잘 만들어 세운 정상표지석이 다른 어느 산의 그것보다 우람하고 반듯한 모습입니다. 해발 875m 정상표지석을 모델 삼아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근처에서 점심을 겸한 간식을 먹었습니다. 준비해간 복분자주 한 잔씩으로 정상주를 마시니 그 맛 또한 다른 어느 술과 비교할 수가 없었지요.

 

다음 목표는 고탄령이었습니다. 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고탄령에서 오른편 길을 따라 골짜기 길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고탄령으로 가는 능선길 몇 곳에 복병들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산행길에서 인생길을 생각하다

 

작은 봉우리들을 올라 다시 내려가야 했을 뿐 아니라 오르내리기가 어려운 바위 구간 몇 군데에서 바윗길에 약한 등산객들의 발길이 붙잡힌 것입니다. 정상까지 어렵지 않게 오른 사람들이 이 길에서 고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등산길이 꼭 인생길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 이만하면 됐지 하는 순간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치고, 정상에 올랐다고 방심하는 순간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어려운 코스를 통과한 일행이 등산길을 인생길과 비교를 합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산행을 해보면 높고 낮은 산, 어느 산이나 결코 만만한 산은 없습니다. 높으면 높은 것만큼 힘들지만 낮은 산이라고 해서 힘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느 인생길이나 결코 쉬운 길이 없듯 말입니다. 잘 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어느 위대한 사람은 물론 비록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나름의 고난은 있기 마련일 테니까요. 하루 산행길에서도 피하지 않고 넘어야 목표지점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은 인생길의 그것과 똑같은 모습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길을 몇 군데 넘어 고탄령에 당도하니 이곳에서부터는 그냥 내리막길이 이어졌습니다. 급경사길을 내려오니 골짜기 길이 나타났습니다. 골짜기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오랜 가을가뭄에도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은 산이 그만큼 높고 골이 깊기 때문일 것입니다.

 

웅덩이처럼 고인 물에는 떨어진 낙엽이 둥둥 떠있는 모습이 물에 비친 하늘 풍경과 어우러져 아름답기 짝이 없었습니다. 맑고 시원한 물에 손과 얼굴을 씻고 내려가니 큰길가에 버스가 세워져 있습니다. 버스 옆에는 우리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와! 이곳에서 음식을 먹으면 맛이 제일 좋을 것 같은 곳이야."

 

음식을 받아들고 두리번거리자 먼저 음식을 받아 자리를 잡은 일행이 부릅니다. 일행이 앉아 있는 곳은 도로 옆 개울가였습니다. 깨끗하게 마른 도로에 주저앉아 경계석을 밥상 삼아 음식그릇을 내려놓으니 정말 세상에서 제일 멋진 밥상입니다.

 

눈앞 아래 개울에는 갈대꽃이 피어 있고, 맑은 물 건너 편 논은 황금빛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풍성한 모습입니다. 찌개와 반찬 두 가지로 소박한 음식이지만 소주와 막걸리 잔을 비우며 맛있게 먹는 일행들의 얼굴에 산행뿐만 아니라 인생길 결승점에 거의 도달한 허허로움이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태그:#이승철, #용화산, #만장봉, #밥상, #인생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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